[성철스님의 책 이야기]
민간 상업 출판의 가흥대장경 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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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정 / 2022 년 4 월 [통권 제108호] / / 작성일22-04-04 12:09 / 조회4,856회 / 댓글0건본문
성철스님의 책 이야기4 중국의 판각 불서①
백련암 성철스님이 소장했던 책에는 한국에서 간행된 고서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된 고서들이 상당히 많다. 그중 가장 이른 시기에 출판된 책이 바로 중국의 가흥대장경(이하 가흥장嘉興藏으로 약칭) 불서이다. 기존에 국가에서 주로 판각과 인출을 담당했던 관판官版 대장경과는 달리 가흥장은 민간에서 주도하여 판매 목적으로 간행한 대장경이었다.
가흥장의 연원
1573년(만력 1) 명나라 관료인 원료범袁了凡(1533~1606)이 대장경을 처음으로 방책본方冊本으로 만들고자 발의하였다. 원료범의 뜻을 환여법본幻余法本으로부터 전해들은 자백진가紫柏眞可(1543~1603) 대사가 그의 제자인 밀장도개密藏道開에게 대장경 편수의 책임을 맡겼다. 여러 지역에 모연문을 보내 기금을 마련하고 발원식을 거행하고 나서, 1589년(만력 17) 오대산五臺山 묘덕암妙德庵에서 본격적으로 판각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지역적으로 춥고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1593년부터 40년간은 절강성浙江省 경산徑山의 만수선사萬壽禪寺 적조암寂 照庵과 화성사化城寺 등에서 주로 판각하였다.
경산으로 내려온 후 자백진가와 밀장도개의 입장 차이 등 크고 작은 사건으로 대장경 사업도 혼란을 빚게 되었고, 경전 판각도 각지에 분산되었다. 1640년대 이후에는 그때까지 대장경을 인쇄하고 판매한 수입을 가지고서 사업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대장경 판매 유통의 중심지가 절강성 가흥부嘉興府 능엄사楞嚴寺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가흥장은 명대 만력 연간부터 시작하여 청대 강희 연간까지 백여 년 가까이 판각이 이어졌고, 방책장方冊藏, 경산장徑山藏, 능엄사판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가흥장은 대장경의 정장正藏뿐만 아니라 중국 역대 고승과 거사들의 저술을 추가하여 대략 2천여 부[종], 1만여 권이 판각되었다. 특히 명말청초 4대 고승인 운서주굉雲棲袾宏(1535~1615), 자백진가, 감산덕청憨山德淸(1546~1623), 우익지욱蕅益智旭(1599~1655) 등의 저술이 다량 포함되어 있어 문헌적 가치가 높다.
가흥장의 국내 전래
국내에 가흥장 불서가 전래된 계기는 조선 숙종 7년(1681)에 중국 상선이 전라도 임자도荏子島 근처에서 난파되었는데, 이때 표류한 선박에서 흩어진 책이 바로 가흥장 불서였다. 이 선박은 가흥장을 싣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국 무역선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중국의 가흥장을 수입해 복각하여 황벽판黃檗板 대장경(1669~1678)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있었을 때였다. 표류된 불서로 인해 황벽판 대장경의 나머지 판각 사업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국내로 표류漂流한 선박에서 구한 불서 1천여 권이 나주 관아에서 수습되어 조정에 보내졌다. 숙종은 이 책들을 다시 남한산성 개원사로 하사하였다. 당시 전라도 영광 불갑사에 머물렀던 백암성총柏庵性聰(1631~1700)도 이 소식을 듣고 인근 사찰에서 4백여 권을 수집하였다. 그는 수집한 책을 가지고 낙안 징광사와 하동 쌍계사 등에서 197권 5천여 판으로 복각하였다. 이 당시 가흥장 불서는 그대로 복각되거나 주변 사찰 승 려들에게 전해졌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까지 실물로 발굴되거나 밝혀진 것은 없다. 현재 다만 국내에서 가흥장 불서는 전남 담양 용흥사에서 초의스님 유품과 전남 영광 불갑사 팔상전과 명부전 존상의 복장전적 그리고 해인사 백련암 성철스님 소장 책에서 다량 확인되고 있다. 이들 책의 전래 시기와 경위가 함께 밝혀질 필요가 있다.
백련암 소장 가흥장 불서
백련암에 소장된 중국 가흥장 불서는 모두 92종 178책이다. 대부분 17세기에 판각된 목판본이다. 시기별로 살펴보면, 1589년(만력 17)에 경산 만수선사에서 간행한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儀經』이 가장 이른 시기 판본이다. 【사진 1】 반면 1671년(강희 10)에 절강 가흥부 능엄사에서 판각한 명나라 문수文琇가 편찬한 『증집속전등록增集續傳燈錄』과 대우大佑가 편찬한 『정토지귀집淨土指歸集』이 가장 후대의 판본으로 확인된다. 【사진 2】
판각처별로 살펴보면, 1598년에서 1637년까지 경산 적조암 판본이 15종 44책으로 가장 많다. 그리고 1642년에서 1644년까지 강소성江蘇省 우산虞山 화엄각華嚴閣에서 14종 20책, 1660년에서 1671년까지 절강 가흥부 능엄사에서 9종 18책이 확인된다.
주제별로 살펴보면, 경장이 59종 86책으로 가장 많고, 중국찬술 19종 70책, 논장 8종 9책, 사휘 4종 10책, 율장 2종 3책 순으로 나타난다. 경장 중 경집부에 속한 불서가 34종 46책으로 가장 많다. 여러 단역 경전이 한 책에 합철되어 있는 경우, 표지에 ‘사경합四經合’, ‘삼십사경합三十四經合’, ‘삼론합三論合’ 등과 같이 경론명을 표지에 기록해 두고 있다. 【사진 3】
백련암 소장 가흥장 불서는 중국서의 원래 표지를 떼어내고 5침안針眼의 조선식 표지로 대부분 개장되어 있다. 이것은 책에 장서인이 찍혀 있는 혜월거사慧月居士 유성종劉聖鍾(1821~1884)이 19세기 후반 중국에서 구입한 책을 소장하면서 개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개장 후 표제를 ‘다보장多寶藏’으로 기록한 9종 13책이 주목된다. 【사진 4】 『의족경義足經』,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 『법집경法集經』, 『귀문목련경鬼問目連經』, 『불장경佛藏經』, 『보리행경菩提行經』, 『유가대교왕경瑜伽大敎王經』, 『시식획오 복보경施食獲五福報經』, 『보살계본경菩薩戒本經』 등의 단역 경전을 별도로 묶은 것이다. 이 책들은 초기불교 경전에 해당하는 것으로, 백련암에는 『중아함경』 과 『잡아함경』 등 아함부의 가흥장 불서도 확인된다. 【사진 5】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내에서 대장경을 제외하고 초기불교 경전류가 단독으로 간행된 적이 거의 없었다. 방책본으로 판각된 가흥장으로 말미암아 화엄과 선, 정토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경전이 19세기 후반까지 국내에까지 유통될 수 있었다. 이것은 모름지기 불교의 교리와 사상 그리고 신앙의 지평까지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경전을 방책본으로 만들어 집집마다 전해 사람들에게 암송하게 하자’고 뜻을 세운 원료범은 가흥장 판각발원문[刻藏發願文]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비록 계시더라도 대장경은 여전히 있어야 한다. (기존 대장경의) 절첩본은 무겁고 커서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진실로 판목에 새겨 쉽게 간행할 수 있도록 하고 곳곳에 유통하여 사람들마다 읽고 익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스스로 판별할 수 있게 한다면 바른 법이 크게 진작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가흥장 편수에 참여했던 빙몽정憑夢禎도 「각대장연기刻大藏緣起」에서 “북경의 대장경판은 잘못된 글자도 적고 보관 상태도 양호하지만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기에 사사로이 인출을 요청하기도 어렵다. 하물며 민가에서 종이와 장황 등 인출 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외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죽는 날까지 경전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탄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대장경이라는 대규모의 경전을 오늘날 단행본 형태인 방책본으로 만들어 누구나 사서 읽고 보관하기 쉽게 만들 것을 발원했다. 그리고 후원금을 모아 민간에서 우선 판각하고, 이를 판매한 자금으로 다시 다른 경전을 판각해 나갔던 것이다.
대장경은 목판본에서 근대 활자본으로 발전되었고, 2000년대 들어 인터넷상에 텍스트화하는 작업을 거쳐 현재 우리는 한문대장경의 원문뿐만 아니라 번역문과 목판본의 이미지까지도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핸드폰 속 누구나 손쉽게 경전을 검색해 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경전을 읽고 정법을 구하고 널리 전하려는 마음이 옛 선조들만큼 간절하지 않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참고문헌
이미정, 「명말 강남 사대부의 불학 유행과 『가흥대장경』 개판」, 『명청사연구』 42집, 2014.
이종수, 「17세기 가흥대장경의 동아시아 유통」, 불교학연구회 가을논문발표회 자료집,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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