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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선불교에 대한 역사·실증주의적 해석방법론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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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2 년 5 월 [통권 제109호]  /     /  작성일22-05-04 09:38  /   조회3,79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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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17 | 호적胡適 ①

 

중국 근현대시기 중에서도 5.4 운동시기는 특히 많은 인재들이 배출된 시기이며, 이들 중 이후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로 호적胡適(1891~1962), 진독수陳獨秀, 노신魯迅 등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호적은 백화문을 주장하는 등 근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창했을 뿐 아니라 불교사상에도 큰 족적을 남긴 사상가였다.  

 

백화문과 5.4 신문화 운동의 개창

 

호적의 본명은 홍신이고 자는 적지適之이다. 그의 아버지는 안휘성 출신의 학자 겸 관리였는데 호적이 3세 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호적의 교육에는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호적이 학업을 시작한 4살 무렵은 서구 학문의 수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국 전통적인 교육방식이 경직되고 유용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1904년 호적은 신교육을 받기 위해 상해로 가서 그곳의 신식학당에 입학하고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양계초와 다윈의 글들을 다독하였고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10년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뉴욕에 있는 코넬대학에서 농학과 철학을 전공하였다. 

 

사진 1. 중국의 근·현대사상가 호적. 

 

1914년 호적은 코넬대학을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학에서 철학자 존 듀이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 프래그마티즘을 전수받았다.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은 절대 진리의 탐구를 억제하고 특정 상황 속에서 유효하게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을 권장하는 것이다. 인간은 ‘결과의 검증’을 거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은 호적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이성적, 회의적, 자유주의적 성향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조국인 중국을 오랜 전통에 대한 맹종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1916년 26세의 청년인 호적은 진독수가 창간한 문학계몽 잡지인 『신청년』에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글을 쓰자는 「문학개량추의」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는 백화문 문학을 최초로 제창한 것으로, 5.4 운동의 시발점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17년 그는 듀이의 지도로 박사논문을 완성하고 중국으로 돌아왔고, 곧 북경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이후 호적은 신문화 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큰 명성을 얻었고, 이 명성은 그의 평생 지속되었다. 

 

사진 2. 1916년 호적의 백화문 운동의 시발점이 된 잡지 『신청년』. 

 

이러한 백화문 운동은 중국 근·현대사상사에 미친 호적의 가장 큰 공헌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문학개량추의」에서 여덟 가지를 하지 말자는 ‘팔불주의(八不主義)’를 제안하였다. 이는 ① 말에 내용이 있을 것, ② 옛사람을 모방하지 말 것, ③ 문법구조에 신경을 쓸 것, ④ 이유 없이 신음하지 말 것, ⑤ 진부한 상투어를 쓰지 말 것, ⑥ 전례와 고사를 쓰지 말 것, ⑦ 대구를 사용하지 말 것, ⑧ 속어, 속자를 피하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일견 평범한 내용으로 보이지만, 이 팔불주의라는 형식의 개혁이 ‘새로운 정신’으로 연계된다고 하여 이후 사회 전반의 거대한 문화운동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죽은 문자로 쓰는 문어체 문학은 결코 생명이 있고 가치가 있는 문학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문어체를 쓰는 사람은 생각이 있더라도 이러한 생각을 반드시 수천년 전의 전고로 바꾸어야 하고, 감정이 있더라도 이를 수천년 전의 문어체로 바꾸어야 한다. 생각을 전달하지 못하고 감정을 표현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문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인가? 형식의 속박은 정신이 자유로이 발전하지 못하게 하고 내용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게 한다. 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정신은 우선 정신을 속박하는 사슬과 족쇄를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창

 

중국 근현대사상사에서 호적의 두 번째로 주요한 공헌은 당시 사상학술계에 낡은 것을 비판하고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적 시도를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1919년에 출판한 『중국철학사대강中國哲學史大綱』과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을 대표작으로 하는 일련의 역사 고증과 연구논문, 저서로 인한 것이다. 『중국철학사대강』은 중국 근·현대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중국철학사로서, 사상적으로 대단히 깊이 있는 저술은 아닐지라도 중국의 전통철학을 새로운 학문적 틀로 새로 쓴 것이다. 전통철학, 전통의 역사, 전통 사상사에 대한 원래의 관념, 기준, 규범을 버리고 근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여 새롭게 서술한 저술이다.  

 

사진 3. 호적의 대표 저서 『中國哲學史大綱』. 

 

후대 학자인 임계유는 “호적은 봉건학자들이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금기인 경학經學을 타파하였다. 봉건사회의 총규범을 거부한 것이다. 그가 공구孔丘(공자의 이름)를 다른 철학자들과 똑같은 위치에 놓고 사람들이 논평하게 한 것은 하나의 대변혁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 책에서 호적은 요·순·우·탕 등 하은주 삼대의 성인에서 논의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한참 뒤인 춘추전국 시기의 노자, 공자에서 서술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유학과 다른 제자학을 같은 위치에 놓고 논의하였다. 이 두 가지 특징이 당시 사상·문화계에 경천동지할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가 학술이라는 이름으로 대학 강단을 통해 전달되었고, 일종의 ‘과학’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예컨대 왕국유의 갑골문 연구보다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서양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전통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중국사상을 연구하는 미국인이 쓴 것 같다.”거나 “견강부회에 불과하다.”라는 악평도 받았다. 그러나 사상의 변혁이라는 점에서 당시 정치사회에 결정적인 충격을 주었다. 

 

사진 4. 실증주의적 학문방법론을 제기한 호적의 글씨. “몇 가지 증거가 있으면 몇 가지 말을 하고, 일곱 가지 증거가 있으면 여덟 가지 말을 하지 않는다.[有幾分證據說幾分話, 有七分證據不說八分話]” 증거에 근거해 학설을 펼쳐야 한다는 뜻(대만 중앙학연구원 내 호적기념관 소재. 사진. 동광). 

 

당시 대가였던 양계초는 누구보다 먼저 호적을 지지하였다. 그는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아래인 호적의 주장에 따라 백화문으로 시를 짓고, 호적이 ‘정리국고整理國故’라고 칭한 새로운 학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수많은 학술 서적을 발표, 출판하였다. 또한 호적의 주장은 고힐강顧頡剛(1893〜1980) 등을 대표로 하는 젊은 후속 세대들에게 지워질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고힐강은 불후의 역사 저술인 자신의 『고사변古史辨』 「자서」에서 호적의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 “삼황오제三皇五帝로 가득 찬 우리 학급 학생들의 머리에 갑자기 중대한 타격을 주었고, 놀란 우리는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1921년 호적은 고힐강에게 편지를 써서 “차라리 옛것을 의심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한이 있어도 옛것을 믿어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근대 아카데미적인 세밀한 고증의 과학 정신, 실증적 태도는 중국에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발전하였다.

 

보편적 활용법으로서 실용주의 제시

 

중국 근현대사상사에 호적이 미친 세 번째 공헌은 존 듀이John Dewey(1859〜1952)의 실용주의, 실험주의를 보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존 듀이의 영향을 받은 호적의 실용주의는 철학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은 세계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진리는 없으며, 구체적인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실험주의는 일종의 방법, 문제를 연구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방법은 세심하게 사실에 근거하여 대담하게 가설을 제출하며, 다시 세밀하게 논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첫째는 대담한 가설, 둘째는 세심한 논쟁”이라고 요약되는 ‘십자진언十字眞言’이다. 실제 당시 학술계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 간단한 십자진언이었고, 웅십력도 이를 인정할 정도였다. 

 

사진 5. 대만 중앙학연구원 호적기념관 건물들. 사진. 동광.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취한 호적은 혁명을 통해 사회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에 반대하고, 점진적 개혁주의자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태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당연히 반발하였다. 이 같은 입장 때문에 호적은 공산당과 원수가 되었고, 국민당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호적과 국민정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1938년에서 1942년까지는 주미 중국대사를 역임하고 1945년에 북경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48년에는 대만 국민당 정부의 부총통을 역임하였고, 1949년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57년에는 대만 정부의 국제연합(UN) 주재 대사를 역임하고, 1958년 대만으로 돌아와 1962년에 결국 대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이미 1954년부터 호적을 관념적 부르주아 사상가로 격렬하게 비판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선불교의 역사 실증주의적 해석

 

호적이 돈황에서 발견된 문헌을 중심으로 선불교를 역사 실증주의적으로 해석한 학설이 학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중국 역사와 문화 연구에 사용하는 서구적인 연구 방법론이 선불교 연구에도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실용주의 철학자인 존 듀이의 제자답게 역사적 실증주의의 방법론으로 선불교를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선에 대한 비역사적이고 본질론적인 접근법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호적의 견해는 저명한 서양의 학술지인 Philosophy East and West(1953년 1호)에 논문 「중국의 선불교: 역사와 방법」이 실리면서 소개되었다. “선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라서 선에 대하여 진실인 것과 진실이 아닌 것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선불교는 중국불교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고, 중국불교는 중국사상사에서 필수적인 부분임을 강조하였다. 중국철학 학파들을 이해할 때 그들을 탄생시킨 역사적인 배경을 토대로 해석하듯이, 선불교도 선이 일어난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판단을 사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고 선을 이해하는 데 이성으로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면 이러한 접근방식은 자연히 선의 역사성을 무시하게 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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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석·박사 졸업.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초빙교수를 지냈다. 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조계종 불학연구소 전문연구원 역임. 『웅십력 철학사상 연구』, 『신유식론』,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등 다수의 저서 및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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