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쓴 선문정로]
견성즉불의 직행노선[直路]에 휴게소를 세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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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2 년 5 월 [통권 제109호] / / 작성일22-05-04 11:34 / 조회4,313회 / 댓글0건본문
『정독 선문정로』를 통해 성철스님의 법을 처음 접한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성철선의 길은 너무 높고 멀어 일반인이 도달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수행을 좀 해봤다는 사람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화두가 또렷하게 흩어지지 않아 뭔가 되는가 싶다가도 여지없이 혼침과 산란에 유린되곤 하는 것이 나의 현재인데 스님은 오매일여도 아직 아니라고 한다. 무심을 체험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불쑥 미워하고 애착하는 마음이 불길처럼 일어나곤 하는 것이 나의 상황인데 스님은 최종 미세망상의 소멸을 강조한다. 경전을 보거나 선지식의 설법을 들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겠고, 그런 소리쯤은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일상의 삶에서는 여지없이 중생인데 10지와 등각을 넘어서라고 한다. ‘더 쉽고 빠른 길은 없는지’ 두리번거리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해적 차원의 견성과 실질적 차원의 견성
그럼에도 성철스님은 선정의 성취나 경계의 체험이나 지견의 열림에 도무지 고개를 끄덕여 줄 생각이 없다. 자나깨나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를 통과한 것이 아닌 이상, 그리하여 제8아뢰야식의 미세망념이 완전히 사라진 구경무심이 아닌 이상, 그 어떤 것도 결국 유심의 영역에 수렴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전국 선방에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 도리어 드문 것이 현재 한국 불교의 실정이고, 이 자리에 앉은 선방 수좌들 역시 나름대로 견성에 대한 견해를 한 가지씩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흔히 참선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그것을 두고 ‘견성했다’거나 ‘한 소식 했다’고들 하는데, 정작 만나서 살펴보면 견성하지 못한 사람과 똑같다. 과연 무엇을 깨쳤나 점검해 보면 저 홀로 망상에 휩싸여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떠드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선문정로』는 특별한 경계 체험을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극단적 발언도 사양하지 않는다. 예컨대 “종문의 정안종사치고 10지보살이 견성했다고 말한 사람은 한 분도 없다.”는 식의 문장이 빈번하게 발견된다. 이에 대한 반박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견성이 본격 수행의 시작점인가 아니면 수행의 최종 도달점인가 하는 데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성철스님은 이해적 차원의 견성과 실질적 차원의 견성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견성에 있어서도 ‘해오점수’에서 말하는 견성과 ‘증오돈수’에서 말하는 견성에는 차이가 있다. 해오의 견성은 10신초十信初이고 증오의 견성은 10지를 넘어선 최후의 묘각을 일컫는다.”
이해적 눈뜸을 중시하는가 실질적 깨달음만을 인정하는가에 따라 견성에 대한 의미 규정이 다르다는 말이다. 물론 성철스님은 실질적 깨달음만을 인정한다. 최종의 미세한 망념이 구름 걷히듯 완전히 사라지고 진여가 백일처럼 드러나 다시 어두워지는 일이 없어야 견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선문의 정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수행의 시작점이나 중간지점에 일어나는 어떤 체험을 견성으로 보는 관점을 철저히 배격한다. 왜 그런가?
“견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망설은 자신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선종의 종지宗旨를 흐리고 정맥正脈을 끊는 심각한 병폐이다.
『선문정로』를 편찬하면서 첫머리에 ‘견성이 곧 성불’임을 밝힌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견성은 수행의 끝에 일어나는 최종적 사건이다. 이 밖의 단계에 견성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그 수행과 결과에 심각한 왜곡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성철스님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우리를 설득해 나간다. 그럼에도 최초의 눈뜸, 혹은 중간 단계의 체험을 견성으로 보는 주장 역시 근거가 부족하지 않다. 따라서 이것을 앞에 두고 옳고 그름을 다투는 논의에 빠진다면 그것은 영원한 도돌이표를 그리게 될 수밖에 없다. 상대적 두 견해의 어느 한쪽에 서는 순간 중도의 상실이 일어나게 된다. 중도의 상실은 성철스님이 극력 반대하던 일이다. 그러니 옳고 그름을 다투는 일을 가지고 성철선의 실천으로 삼을 수는 없다.
『선문정로』의 죽비소리
우리는 성철스님이 보여준 철저한 수행의 가치와 비범한 지혜의 완성을 믿는다. 나아가 성철스님의 법문이 수행자의 발전과 완성을 독려하기 위해 설해진 것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법문이 수행을 하는 자신에게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렇게 자문해 들어가다 보면 『선문정로』의 모든 문장들이 수행자를 향한 고함이자 죽비 세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나름의 수행을 통해 “이것이다”라는 견해를 세울 때마다 성철스님은 “아니다”라는 고함을 내놓는다. 매혹적 경계에 도취되어 거기에 마음이 머물 때마다 스님의 장군죽비가 바람을 가른다. 우리가 자부하는 바로 그것이 단지 눈에 낀 백태이고, 우리가 자처하는 바로 그곳이 캄캄한 굴속임을 바로 알라는 것이다.
결국 『선문정로』는 머물지 않는 수행을 거쳐 깨달음에 도달한 석가모니의 길을 따르자는 불교의 지상 과제를 제시한 지침서이다. 우리는 그 절대 명제 앞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사실 그런 점에서 『선문정로』는 미완성의 책이기도 하다. 그것이 수행 당사자가 채워야 할 빈칸을 남겨 놓은 과제물이기 때문이다. 나를 인정해 달라는 칭얼댐이 아니라 스승의 옆구리를 쥐어박는 기특한 대답들이 그 빈칸을 채울 때 『선문정로』는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철스님이 제시한 길은 너무 높고 멀다.”는 말은 일단 접어둘 필요가 있다. 그보다 먼저 자기 몫으로 만난 화두에 대한 진지한 천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두 공부는 역동적 현실과의 역동적 만남을 내용으로 한다. 그래서 화두 참구는 부처의 마음과 가장 활발하고 긴밀하게 만나는 현장의 제1선이 된다. 화두 참구 자체가 깨달음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활동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참선에 뜻을 둔 입장이라면 그 차원과 단계의 고하에 상관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화두 참구에 전념하는 일만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깨달았다는 착각이나 고요한 선정의 탐닉, 그리고 몸의 수련에 몰두하는 등의 곁길로 빠지는 일은 철저한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바른 수행과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수행의 곁길과 그 위험성
무엇보다도 깨달았다는 착각에 빠지거나 자신의 체험에 대해 분에 넘치는 의미를 부여한다면 필연적으로 수행의 정체와 퇴보가 일어난다. 원래 이 공부는 어미 닭이 알을 품는 일과 같다. 알 품기를 멈추면 부화도 멈추는 것이다. 멈추기만 한다면 그래도 다행이다. 깨달았다는 착각이 일어나는 순간 퇴보가 일어난다. 화두 공부의 압력이 빠지면서 그에 눌려 있던 자아가 활동을 재개하기 때문이다. 몽산 덕이스님의 경우가 그랬다. 스님은 몸을 눕히지 않는 용맹정진 끝에 홀연 ‘눈앞의 검은 구름이 걷힌 듯, 새로 목욕을 하고 나온 듯, 심신이 맑아지고 상쾌해지는’ 경계를 체험한다. 덕이스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마음속의 의심덩이가 더욱 강해져서 힘을 쓸 필요도 없이 끊어지는 일 없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모든 소리와 모양과 온갖 욕구와 일체의 바깥 경계가 전혀 들어오지 못하여, 청정하기가 은쟁반에 눈을 담은 것과 같고 가을날 맑은 기운과 같았습니다.”
스님은 이 체험을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확인받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간다. 그런데 도중에 심한 고생을 겪으면서 공부에 퇴보가 일어나게 된다. 이후 장좌불와를 하면서 다시 공부에 매진했어도 그것을 복구하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덕이스님은 참선에 들어가면 맑은 무심이 되었다가 선방을 나오면 그것이 사라지는 상황에 있었다. 성철스님이 제시한 제1관문인 동정일여에 걸린 상태였던 것이다. 덕이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발원이 절실했기 망정이지 이 한 번의 착각으로 선종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가 사라질 뻔한 것이다.
어쩌면 덕이스님은 특별한 경우에 속할 것이다. 깨달았다는 착각으로 인해 공부를 잃고 중생 살림으로 돌아간 경우가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국의 선문을 강타했던 히피적 막행막식의 풍조를 기억해 보라. 그것이 남다른 안목의 열림과 해방감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또 그 자유의 퍼포먼스는 심지어 멋있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한 해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 한 수행의 생명을 끊는 독약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편 성철스님은 선정에 빠지는 일을 경계했다. 선정의 즐거움으로 인해 또렷한 화두 공부가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이 인용한 설암스님의 경우가 그랬다.
“처음에 무無 자 화두를 참구했는데 문득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한번 돌이켜 관조했더니 그 한 생각이 당장 얼음처럼 차갑게 식으며 참으로 맑고 고요하여 동요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루가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지나갔고 종소리 북소리조차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설암스님은 이것을 제대로 된 공부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고요한 삼매의 상태를 탐닉하게 된다. 이 소문을 들었던 것인지 스승이 편지를 한다. 그것이 “죽은 물과 같아서 바른 공부가 아니며 오로지 알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성철스님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 김용사 시절이었다고 하는데 선정의 성취를 자부하는 한 처사가 찾아와 점검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당시 성철스님은 이렇게 지도했다.
“들어보니 노인은 참 좋은 보물을 갖고 있소. 잠깐 앉아 있는데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몇 시간도 금방 지나가 버리니 그런 좋은 보물이 또 어디 있겠소. 내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딱 양심대로 말하시오. 거짓말하면 죽습니다. 그 보물이 꿈에도 있습니까?”
이러한 점검을 받고 나서 그 처사는 설암스님의 경우처럼 새롭게 화두를 배워 진실한 공부에 들어갔다고 한다. 해피엔딩을 향한 방향 전환이다. 물론 대부분의 착각은 이보다 더 하열한 자리에서 일어난다. 참선 중에 빛이라도 보일라치면 그것을 무량광無量光이라 하고,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그것을 불보살의 음성이라 하면서 그 특별한 사건의 재현을 위해 자리에 앉는다. 그것을 깨달음의 경계로 자처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신체 수련을 참선 수행과 동일시함으로써 일어나는 장애 역시 만만치 않다. 이와 관련하여 성철스님은 특히 단전호흡의 장애를 지적한다. 호흡에 신경 쓰고 단전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된 화두 참구를 놓친다는 이유에서였다. 단전호흡은 틀림없이 좋은 방편이다. 그러나 단전호흡으로 화두 참구를 대신한다면 그것은 장애 정도가 아니라 길을 잃는 일에 속한다. 나아가 그것으로 얻어진 능력을 과시하는 입장이 되면 그것은 외도가 될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불교 공부의 시작과 끝은 자아와 대상의 비실체성에 눈뜨는 일에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자신의 ‘못남’을 확인하는 길을 걷는다. 만약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자아를 살찌우는 일이 된다.
이처럼 깨달았다는 착각, 삼매의 탐닉, 심신 수련에 의한 특별한 능력의 추구 등은 모두 자아를 재건하는 일에 속한다. 수행자의 비상짐독砒霜鴆毒으로 지목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밥은 먹어야 하는 것이지 그것에 먹혀서는 안 된다. 밥에 먹히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맛있는 것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는 일이다. 경계는 통과하는 것이지 머물러서는 안 된다. 경계에 머물면 필연적으로 경계에 먹힌다. 경계에 먹히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대접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거듭 강조한다. “견성즉불의 직행노선[直路]에 휴게소를 세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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