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빛의 말씀]
마음자리를 바로 보는 것이 중도를 깨닫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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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3 년 6 월 [통권 제122호] / / 작성일23-06-05 12:23 / 조회4,477회 / 댓글0건본문
“견성을 하면 즉시에 구경무심경究竟無心境이 현전現前하여 약과 병이 전부 소멸되고 교敎와 관觀을 다 휴식하느니라[纔得見性하면 當下에 無心하야 乃藥病이 俱消하고 敎觀을 咸息하느니라].”
- 『宗鏡錄』, 1 「標宗章」
모든 일엔 목표가 있기 마련이다. 불교의 목표는 무엇인가? 불교의 목표는 부처가 되는 성불成佛이다. 그럼 성불이란 무엇인가? 목표의 실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추구한다면 그것은 맹목적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성불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성불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중도를 바르게 깨친 분
성불의 내용에 대한 갖가지 말씀이 여러 경론에 다양하게 설해져 있는데, 가장 근본이 되는 최초의 설법에서 그 연원을 살펴보자.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무상정각無上正覺(주1)을 성취한 뒤에 녹야원鹿野苑으로 다섯 비구를 찾아가 맨 처음 하신 말씀은 “나는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는 중도선언이다. “마음을 깨달았다”느니 “불성을 깨달았다”느니 하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으시고 “나는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최초의 법문이다. 스스로 말씀하시길 “중도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고 하셨으니 중도가 무엇인지 알면 곧 성불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양극단에 떨어지지 않는 중도를 설명하는 데도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불생불멸중도不生不滅中道이다. 생과 멸을 따르지 않는 우주의 근본이치가 바로 중도이고, 이는 또한 ‘불성佛性’, ‘법성法性’, ‘자성自性’, ‘진여眞如’, ‘법계法界’, ‘마음’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중도란 곧 마음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중도를 깨쳤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자리’, ‘근본자성’을 바로 보았다는 말로서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따라서 견성이란 근본 마음자리를 확연히 깨쳐, 즉 중도의 이치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한데 요즘 항간에서 견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견성의 본뜻과 거리가 먼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자면 유럽을 여행하다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선방을 견학하고 온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많은 유럽인들이 선방에 모여 참선을 하고 있는데, 찬찬히 둘러보니 그 좌석배치가 견성한 사람의 좌석과 견성하지 못한 사람의 좌석으로 나눠져 있더라고 한다.
견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
게다가 견성한 사람이 앉는 좌석에 견성하지 못한 쪽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견성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이 하도 신기해 “당신 정말로 견성했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인가받았냐고 되물었더니, 자기는 스승으로부터 점검을 받고 무자화두無字話頭(주2)를 참구해도 된다고 허락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지금 “무!” 할 줄 안다고 대답하더란다.
그러니 결국 그들이 말하는 견성한 사람과 견성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무!” 할 줄 아는 사람과 “무!” 할 줄 모르는 사람의 차이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 사람들이 가르치고 있는 선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들이 현재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전국 선방에 견성 못한 사람이 도리어 드문 것이 현재 한국불교의 실정이고, 이 자리에 앉은 선방 수좌들 역시 나름대로 견성에 대한 견해를 한 가지씩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흔히 참선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그것을 두고 “견성했다”거나 “한 소식 했다”고들 하는데 정작 만나서 살펴보면 견성하지 못한 사람하고 똑같다. 과연 무엇을 깨쳤나 점검해 보면 제 홀로 망상에 휩싸여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떠드는 것에 불과하다. 견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망설은 자신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선종의 종지宗旨를 흐리고 정맥正脈을 끊는 심각한 병폐이다. 『선문정로』를 편찬하면서 첫머리에 ‘견성이 곧 성불’임을 밝힌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견성은 궁극적 깨달음의 완성
견성하면 곧 부처임은 선종의 명백한 종지이다. “견성해서 부지런히 갈고닦아 부처가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부산에서 서울 가는 일로 비유를 들자면 저 삼랑진쯤이 견성이고, 거기서 길을 바로 들어 부지런히 달려 서울에 도착하는 것을 성불로 생각한다. “견성한 뒤 닦아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견성의 내용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서울 남대문 안에 두 발을 들이고 나서야 견성이지 그 전에는 견성이 아니다. 견성하면 그대로 부처지, 닦아서 부처된다고 하는 이는 제대로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다.
『종경록』(주3)에서 “자성을 보면 당장에 무심경이 된다.” 하였는데 제6식만 제거되어서는 망심이라 하지 무심경이라 하지 않는다. 무심이란 제6식의 추중망상麤重妄想뿐 아니라 제8아뢰야식(주4)의 미세망상微細妄想까지, 즉 3세 6추가 완전히 제거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부처님의 팔만대장경은 중생들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약방문이다. 환자야 약방문이 필요하지만 병의 근본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한 이에게 무슨 약방문이 필요한가?
진여자성을 확연히 깨달아 무심경이 된 사람, 즉 성불한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도 어떤 수행도 필요하지 않다. 부처님의 팔만대장경도 조사의 1,700공안도 모두 필요 없는 그런 사람이 견성한 사람이다. 역으로 가르침이 필요하고 수행이 필요하다면 그는 구경무심을 체득하지 못한 사람이고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다. 제8아뢰야식의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제거되어 구경의 묘각을 성취한 것이 견성이지 그러기 전에는 견성이라 할 수 없다.

이는 나의 억지 주장이 아니다. 부처님의 바른 뜻이 담긴 경전과 만대萬代의 표준이 되는 정론과 종문 정안조사들의 말씀을 근거로 하는 말이다. 이에 『능가경』·『대열반경』·『대승기신론』·『유가론』·『육조단경』·『종경록』·『원오록』 등에서 인용하여 그 전거를 밝혔다.
종파를 초월해 대조사로 추앙받는 마명馬鳴보살의 『대승기신론』은 대승의 표준이 되는 불교총론으로 공인된 책이다. 『기신론』에서도 미세한 망상이 완전히 제거된 묘각 즉 구경각究竟覺만이 견성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원효와 현수 두 스님도 금강유정에 든 등각보살도 아직 망념이 남아 있는 중생이라 하여 견성하면 곧 부처고 견성하지 못하면 중생임을 그 소에서 각기 밝혔다.
견성했다고 하면서 정定을 닦느니 혜慧를 닦느니 하는 것은 아직 미세망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건 견성이 아니다. 더 이상 배우고 익힐 것이 없는 한가로운 도인, 해탈한 사람이 되기 전에는 견성이 아니다. 이것이 『선문정로』의 근본사상이다.
참선 중에 만나는 기이한 체험에 현혹되지 말라
요즘 견성했다는 사람이 도처에 있어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 자리에도 혹 견성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게도 그런 이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오곤 하는데 난 그런 이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혹자는 “분명히 견성했는데 저 노장이 고집불통이라 인정하지 않는다.”며 불평하는데, 그건 견성병見性病이 골수에 사무친 것이지 진짜 견성한 것이 아니다. 내가 괜한 심통을 부려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개인적 체험과 견해를 견줘 우열을 다툴 이유가 없다. 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부처님과 대조사스님들을 재판관으로 삼고 판결을 받아보자는 것이다. 스스로 불자라 자부한다면 부처님과 대조사스님들의 말씀을 표방해야지 소소한 사견을 내세워 불조를 능멸해서야 되겠는가? 그건 터럭 하나로 허공과 견주려 들고 물방울 하나로 바다와 견주려 드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니 혹 참선을 하다 나름대로 기특한 견해가 생기고 기이한 체험을 하더라도 그걸 견성으로 여겨 자기와 남을 속이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한 올의 터럭 한 방울의 물이라 여겨 아낌없이 버리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 성철스님의 책 『옛 거울을 부수고 오너라 』(장경각, 2007) 중에서 발췌 -
<각주>
(주1) 부처님의 깨달음을 일컫는 말로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도 한다. 이보다 뛰어난 깨달음은 없으므로 무상無上, 치우침과 삿됨을 여의었으므로 정正, 진리를 깨달았으므로 각覺이라 한다.
(주2) 선문의 대표적 공안公案 중 하나. 조주종심趙州從諗(778~897)에게 어떤 이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없다[無]”고 대답한 일화에서 유래한 화두.
(주3) 법안종法眼宗 제3조인 영명연수永明延壽가 대승의 경론 60부와 300성현의 말씀 등을 인용하여 불법을 총망라하고 선종의 종지를 밝힌 100권의 저술.
(주4) 무몰식無沒識·장식藏識 등으로 한역한다. 일체법의 근본이 되는 식이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장’에 능장能藏·소장所藏·집장執藏의 세 가지 뜻이 있어 아뢰야阿賴耶·비파가毘播迦·아타나阿陀那의 이름을 붙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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