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명나라까지 알려진 낭공대사탑비의 명성과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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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2 년 7 월 [통권 제111호] / / 작성일22-07-05 10:24 / 조회4,348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21 | 태자사지 ②
그 후 대사의 제자인 신종선사, 주해周解선사, 임간林侃선사 등 500여 명이 스승을 추모하며 왕에게 비의 건립을 청하였는데, 신덕왕의 아들인 경명왕景明王(917~924)이 선왕의 숭불 정신을 이어 시호를 ‘낭공대사’로 추증하고 탑명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최인연 선생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다.
태자사에 세운 낭공대사탑비
그런데 통일신라가 멸망하고 고려로 다시 통일되는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비는 바로 세워지지 못하고 대사가 입적한 때로부터 36년 후에 비로소 세워지게 된다. 낭공대사의 뛰어난 제자들로는 용담사龍潭寺 식조式照, 건성원乾聖院 양경讓景, 연○사鷰○寺 혜희惠希, 유금사宥襟寺 윤정允正, 청룡사淸龍寺 선관善觀, 영장사靈長寺 현보玄甫, 석남사石南寺 형한逈閑, 숭산사嵩山寺 가언可言, 태자사太子寺 본정本定 화상 등이 있었는데, 당시 왕실 원찰의 책임자이고 건성원의 주지로 있던 통진대사通眞大師 양경讓景(879~?, 도당 유학: ?~928) 화상이 75세의 나이로 스승의 비 건립을 주도하여 문도들과 함께 낭공대사의 탑비를 태자사에 세웠다.
양경화상은 김씨로 육두품 출신으로 벼슬을 하다가 출가를 하여 태자산사에 주석하고 있던 행적화상에게로 가서 제자가 되었다. 그가 행적화상을 찾아간 시기는 행적화상이 왕경을 떠난 898년 이후 왕경으로 다시 돌아와 국사가 된 907년 사이일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행적화상은 태자산사에 주석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의 태자산사는 조그만 거처라서 낭공대사의 비에는 기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 광종 때에 오면, 승계제도와 승과제도를 시행하면서 화엄종을 중심에 놓고 불교계를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강력한 통제 하에 두는 방향으로 나가는데, 이 당시 선문들은 중심 사찰을 중심으로 결속을 다져나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굴산문은 태자사, 동리산문은 옥룡사, 희양산문은 희양원, 봉립산문은 고달원, 사자산문은 도봉원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려의 고승들의 탑비와 부도탑을 세우고 새로이 결집을 도모하였다.
고려에서는 굴산문의 제자들이 전국 사찰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굴산문의 맥을 이어온 양경화상은 고려 초기에 왕건의 힘을 입어 이 태자사를 거점으로 정하고 그의 스승인 행적화상의 비를 세우면서 굴산문파를 결집한 것으로 보인다. 양경화상은 행적화상이 입적할 때는 당나라에 있어 임종을 하지 못했는데, 고려 개창 후에 문도들과 같이 태자사에 스승의 비를 세워 은혜에 보답하는 동시에 자파 세력을 다시 결집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태자사가 있은 봉화는 경주에서 개경으로 오르내리는 최단거리 도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곳이었다.
통진대사 양경화상의 탑비는 사라지고 없다. 그 비의 깨진 잔편 일부가 1896년 을미의병 와중에 불타버린 옛 용수사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되었다가 발견되어 현재의 용수사에 보관되어 있다(사진 1).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태자사에 최인연이 지은 낭공대사탑비와 고려의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김심언金審言(?~1018)이 지은 통진대사비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낭공대사탑비의 비문을 쓴 최인연
최인연 선생은 행적선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문인門人이고 집안사람으로 아낌도 받았기에 그 정이 남아 있어 기꺼이 붓을 들어 양경화상의 친형제인 윤정화상이 지은 낭공대사의 행장을 바탕으로 하여 비문을 지었다. 최인연 선생이 지은 이 글은 그의 종형인 최치원 선생의 문장에서 보듯이 유가, 불가, 도가의 개념을 종횡무진으로 구사하면서 지은 명문이다. 그는 글을 다 쓴 후 비의 사詞에서 다음과 같이 쓰면서 불법의 요체를 표현하였다.
至道無爲지도무위 지극한 도는 무위이니
猶如大地유여대지 마치 대지와 같도다
萬法同歸만법동귀 만 가지 법은 같이 돌아가고
千門一致천문일치 천 가지 문은 하나로 이르네
粵惟正覺월유정각 아, 오로지 정각으로
誘彼群類유피군류 저 군생을 인도하도다
聖凡有殊성범유수 성인과 범인은 뛰어남은 다르지만
開悟無異개오무이 진리를 깨닫고 나면 다르지 않도다
(이하 생략)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에 의하면, 최인연 선생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18세 때에는 당나라에 들어가 예부시랑禮部侍郞 설정규薛廷珪 아래에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42세에 신라로 돌아와 집사시랑執事侍郞과 문한기구인 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에 임명되었고, 신라가 고려에 귀순한 후에는 고려 태조가 그를 태자의 사부師傅로 임명하였으며, 벼슬이 한림원
태학사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그 당시 고려 궁원의 편액 이름을 그가 다 지었다고 전한다. 그는 고려 왕조에 들어와서는 이름을 최언위崔彦撝로 바꾸어 활동하였다.
그는 나말여초羅末麗初에 활동했던 선사들의 비문을 가장 많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존하는 신라 선사들의 탑비 10기 중 최치원 선생이 4개의 비문을 짓고 최인연 선생이 3개의 비문을 지었고, 고려에 들어와서는 70세 노구를 이끌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세워진 9기의 선사들의 탑비 가운데 8기의 탑비 비문을 직접 지었다.
그가 지은 비문으로는 「흥녕사 징효대사보인탑비興寧寺澄曉大師寶印塔碑」-신라,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郞空大師白月栖雲塔碑」-신라,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신라,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법경대사자등지탑비法鏡大師慈燈之塔碑」, 「보리사 대경대사현기탑비菩提寺大鏡大師玄機塔碑」, 「보현사 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塔碑」, 「광조사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 「명봉사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鳴鳳寺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등이 있다. 글씨도 최치원 선생처럼 잘 썼는데, 그가 쓴 글씨로는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의 전액篆額과 최치원 선생이 비문을 지은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郞慧和尙白月葆光塔碑」의 글씨 등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진적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사진 2).
그는 최치원, 최승우崔承祐(?~?)와 함께 통일신라 말기의 ‘삼최三崔’로 일컬어졌고, 집안은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장남 최광윤崔光胤(?~?)도 문장이 뛰어나서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하였다고 전한다.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아버지와 아들 모두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한 예는 현전現傳하는 기록상 최인연 부자가 유일하다. 셋째 아들인 최광원崔光遠(?~?)의 아들인 최항崔沆(?~1024)은 고려 초기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부상서吏部尙書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낸 명신名臣이었다.
아무튼 낭공대사탑비는 바로 세워지지 못하고 고려시대에 와서 광종光宗(재위 949~975) 5년(954년)에 봉화군 태자사에 단목端目화상이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세웠다. 비 건립의 전말은 낭공대사의 법손인 순백純白 화상이 비를 세울 당시에 ‘신라국석남산고국사비명후기新羅國石南山故國師碑銘後記’를 추가로 짓고 역시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의 뒷면에 새겨 놓았다(사진 3). 낭공대사탑비의 글씨는 숭태嵩太, 수규秀規, 청직淸直, 혜초惠超 화상이 새겼고, 비 건립 실무의 총책임은 석남사 장로인 형허逈虛 화상이 맡았다.
낭공대사탑비의 운명
이 비는 그 후 태자사의 당우들이 사라진 빈 터 수풀 속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1509년 지금의 영주인 영천榮川 군수로 와 있던 이항李沆(?~1533)은 이 비가 봉화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옛 절터에 가서 발견하고 김생의 글씨임을 확인하였다. 그는 과거 안평대군이 편집한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에 실린 김생의 필적을 보고 이를 좋아하였는데, 이곳에서 김생의 글씨로 된 비석을 발견하고는 감격하여 영주의 자민루字民樓 아래로 옮기고 난간과 지게문을 설치하고 탁본할 때 이외에는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이항은 10년 후 1519년(중종 14)에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 신진사류들이 새로운 개혁정치를 펼쳐나가는 것에 반발한 훈구세력들과 작당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심정沈貞(1471~1531)의 수하로 들어가 날뛰다가 결국 중종 28년에 같은 수하인 김극핍金克愊(1472~1531)과 함께 사약을 받고 황천길로 갔다. 세상에서는 이 3명을 신묘삼간辛卯三奸이라고 불렀다. 예나 지금이나 완장을 차면 권력의 힘을 등에 업고 칼춤을 추다가 폐가망신廢家亡身하는 인간들이 사라지지 않는데, 역사는 인간에게 교훈을 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마천司馬遷(BC 145?~BC 86?)이 들으면 탄식할 얘기이지만.
그 후 남구만南九萬(1629~1711) 선생이 1662년(현종3) 암행어사로 영남지역을 시찰하던 도중에 3월 초 영주에 도착하여 이 비를 보았다. 이때는 100여 년 전에 이항군수가 설치했던 난간과 지게문은 없어졌고 탁본으로 인하여 앞면의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여서 비를 뒤집어 보다가 뒷면에 글자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당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임진년(1592, 선조25)과 정묘년(1627, 인조5) 사이에 중국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탁본을 한 것이 거의 수천 본本이었는데, 이때 추운 날씨로 얼어붙은 먹물을 녹이느라 숯불로 가열하는 바람에 비석이 많이 손상되었다고 했다.
그 후 명나라 사신인 웅화熊化(1581~1649)가 조선으로 왔을 때, 압록강을 건너기도 전에 백월비白月碑의 탁본을 청한 일이 있었는데,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이 비석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다시 명나라 사신에게 물어 비로소 비석이 있는 곳을 알고 관리를 특파하여 탁본을 해갔다고도 했다. 남구만 선생은 우리 보물의 가치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하고 중국 사람들이 더 귀하게 여겨온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웅화熊化가 조선으로 온 때는 1609년(광해군 1)인데, 이때 선조宣祖(1567~1608)에게 명나라 황제가 시호를 내리는 사시사賜諡使로 왔다. 당시 조선의 최고 문장가이자 명나라에 사신으로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 선생이 빈접사儐接使가 되어 웅화 일행을 영접한 후 서로 글을 주고받았는데, 그 후 조선에서는 월사선생이 받은 웅화의 글씨를 모아 『웅화서첩熊化書帖』을 만들어 애지중지하였다.
또 남구만 선생은 이 비의 탁본 청탁이 워낙 많아 민폐가 심해져 비석이 있는 곳을 마구간으로 만들고 말똥과 거름으로 파묻어 탁본할 수 없게 한 일도 있었는데, 이 와중에 비석이 많이 훼손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문집 『약천집藥泉集』에 기록되어 있다. 사실 유명한 비석이나 유명 글씨를 새긴 서판書板의 경우는 대부분 이런 수난(?)을 겪었다. 탁본의 청탁이 워낙 많아 실물이 손상을 입는가 하면, 탁본을 하는 데 먹물 조달과 인력 동원으로 심한 폐단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워낙 시달려 비를 부숴 버린 경우도 있었고, 비신을 뽑아 땅속에 파묻어 버린 경우도 있었다. 백성들이 한지나 차의 공납에 시달려 닥나무나 차나무를 아예 뽑아 내버린 경우와 비슷하다.
그렇지만 이런 수난 속에서도 낭공대사탑비는 살아남아 그 이후 일제식민지시기인 1918년에 경복궁 근정전의 회랑으로 다시 옮겨졌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서예실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현재는 비신이 두 부분으로 파손되어 있지만, 파손되기 전에 탁본을 한 것이 영주 소수서원에 보관되어 있다(사진 4). 현재 태자사터에 있는 귀부와 이수는 조사 결과 낭공대사탑비의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
낭공대사탑비는 서예사에서 김생의 글씨로 유명한데, 정작 김생은 통일신라시대 한미寒微한 집안의 출신이라는 것 이외에 생몰연대와 부모도 알 수 없다. 청량산이 있는 봉화 재산현才山縣 사람이라고도 전한다. ‘김생’도 성이 김이고 이름이 생인지도 알 수 없고, 이런 류의 이름은 다른 경우에 찾아보기 어렵다. 고려시대 문인들에 의해 해동제일의 명필로 칭송되었으며, 이규보李奎報(1168~1241) 선생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그의 글씨를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가하였다. 원元나라의 명필 조맹부趙孟頫(1254~1322)도 ‘동서당집고첩발東書堂集古帖跋’에서 창림사비에 새긴 김생의 글씨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글씨는 조선시대 후기까지 진적들이 일부 남아 있었던 것 같으나 현재는 진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청량산을 유람한 주세붕선생은 김생굴金生窟을(사진 5) 답사한 글을 쓸 때 자신이 김생의 서첩을 가지고 있는데 김생굴에 와서 보니 김생의 필체가 청량산의 빼어난 바위들을 닮아 그렇게 된 것 같다는 감회를 남겼다.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 선생은 그의 「청량산유람기」에서는 김생에 대한 언급을 남기지 않았지만, 시랑侍郞 허옥여許沃汝가 소장하고 있는 김생의 진적을 본 적이 있다고 쓴 글을 남겼다. 1821년 청량산을 유람하며 김생굴을 들러본 적이 있는 사진士珍 이해덕李海德(1779~1858) 선생은 승려들이 보여준 김생의 진적 2첩을 보았던 사실을 유람기에 적고 있다. 각각 금분金粉과 은분銀粉으로 쓴 작은 글씨였는데, 서첩에는 작은 부처를 여럿 그려 놓았다고 적어 놓고 있다. 현재는 김생의 진적이 없기에 한국 서예사에서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의 탑본과 이 낭공대사탑비의 탑본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사진 6).
안동의 갈라산葛蘿山에는 김생이 글씨 연습을 했다고 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고 부르는 봉우리가 있고(사진 7), 봉화의 청량산에는 현재의 청량사淸凉寺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면 자소봉紫宵峰 아래에 김생이 글씨 공부를 했다는 김생굴과 김생폭포가 있다. 김생은 80세에 이르기까지 글씨 공부를 하였다니 글씨를 수행하듯이 썼는지도 모른다. 퇴계선생은 청량산을 유람하고 이곳을 들러본 다음 ‘김생굴’이라는 시를 남겼다(사진 8).
蒼籒鍾王古莫陣창주종왕고막진
옛 글씨나 종요 왕희지 글씨만 쫓지 말지니
吾東千載挺生身오동천재정생신
천년 만에 해동에도 뛰어난 이 태어났도다
怪奇筆法留巖瀑괴기필법유암폭
특출한 필법은 바위 폭포에 남아 있는데
咄咄應無歎逼人돌돌응무탄핍인
그 뒤를 이를 사람 없어 이를 슬퍼하노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충주목에 있는 김생사金生寺를 김생이 머무르며 불교 수행을 한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불교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1977년에는 대청댐 수몰지구 유적조사반이 충북 청원군 문의면 덕유리에서 무명의 사지를 발굴하다가 ‘김생사’, ‘태평흥국’, ‘강당초’ 등의 글씨가 새겨진 기왓장을 발견하면서 김생사의 옛터가 발견되었다. 현재 충주시는 금가면 김생로 325(유송리)의 부지를 김생사터로 비정하고 있다. 고려시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선생도 김생사로 돌아가는 승려에게 송별시를 지어보냈다.
縹緲金生寺표묘김생사 파르스럼히 아득한 저 먼 김생사
潺湲月落灘잔원월락탄 졸졸졸 물 흐르는 월락탄
去年回使節거년회사절 지난해 사절로 갔다 돌아올 때에
半日住歸鞍반일주귀안 한나절 말안장을 멈추었지요
花雨講經席화우강경석 붓다의 경을 설하는 자리에는 꽃비 내리고
柳風垂釣竿유풍수조간 버들가지 살랑이는데 낚싯대 드리웠지요
此身雖輦下차신수련하 이 몸은 비록 조정에 묶여 있으나
淸夢尙江干청몽상강간 맑은 꿈은 오히려 강과 산골에 있지요
포은 선생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절의지사節義之士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7~1392) 선생도 김생사의 장로스님에게 보낸 시를 남겼는데, 이를 보면 그 시절에도 김생과 김생사의 지위는 여전히 높이 평가되었던 것 같다.
古鼎燒殘一炷香고정소잔일주향
옛 솥에는 타다 남은 한 줄기 향 오르고
頹然自到黑甛鄕퇴연자도흑첨향
꾸벅이며 조는 사이 단잠 속에 빠지네
覺來情思淸如水각래정사청여수
깨어 보니 정신이 물처럼 맑아
未用區區學坐忘미용구구학좌망
구차하게 좌망을 배울 필요가 없네
낭공대사탑비의 글씨는 기본적으로 왕희지의 행서법行書法을 따르면서 그 위에 자기만의 자유로움을 더하여 글자의 크기와 변화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집자이기 때문에 글자간의 간격과 속도 그리고 크기의 변화 등에서 전체적인 흐름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글자를 새긴 사람의 의도도 자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 원래의 글씨 모습을 알기는 쉽지 않으나 서풍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김생이 왕희지체를 가장 잘 구사하였다는 점, 현재 남은 왕희지체를 구사한 것 중 가장 뛰어난 것이 영업靈業 화상이 글씨를 쓴 신행선사비인 점, 813년에 세워진 신행선사비 이외에 영업화상의 글씨를 발견할 수 없는 점, 이름을 ‘김생’이라고 쓴 것은 김생에게서만 발견되는 점을 고려하면 혹시 김생이 ‘김생영업金生靈業’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조선시대에도 보통 사람을 칭할 때 ‘성+生+이름’으로 쓴 점을 고려해 보면, 신라와 고려 때에도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김생영업은 ‘속성+生+법명’으로 구성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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