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지의 복간을 표방한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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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 2022 년 7 월 [통권 제111호] / / 작성일22-07-05 10:03 / 조회3,480회 / 댓글0건본문
근대불교잡지 산책 19 | 『신불교』 (통권 67호, 1937.3~1944.12) (상)
『신불교新佛敎』는 1937년 3월 창간호부터 30호(1941.9)까지는 경남3본산회의에서 발행하였고, 31호(1941.12)부터 종간호(1944.12)까지는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종무원에서 발행한 잡지다.
『불교』지를 계승하다_발행 경과와 발행인
동래 범어사,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의 세 절이 주축이 된 경남3본산회의는 사무소(종무협회)를 부산부 좌천정佐川町 824번지 연등사燃燈社에 두었는데(31호 광고) 해동역경원 사업과 『신불교』 발간을 주관하였다. 창간호 발행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허영호인데, 표제는 『불교』이며 호수를 ‘신제新第○집’으로 명기하였다. 이를 ‘신불교’라 명명한 것은 1924~1933년에 간행된 권상로·한용운 발행의 『불교』지와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붙인 것이다(사진 1-1과 사진1-2).
창간호의 판권지를 보면 『불교』 신제1집, 편집 겸 발행인 허영호(경성부 수송정 44번지), 발행소 불교사佛敎社(경성부 수송정 44번지)다. 허영호는 1~19호(1937.3~1939.1)의 발행을 주간하였다. 잡지는 19호 이후 약 1년간 휴간되었다가 김삼도가 발행인으로 20~35호(1940.1~1942.4)를 발행하였다. 이후 임석진(창씨개명 임원길)이 36~67호(1942.5~1944.12)까지 발행하였다. 발행소는 1~67호 모두 불교사로 표기되어 있는데, 31호 이후 발행기관이 총본산 태고사 종무원으로 바뀐 이후로는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내 불교사’라 명기하였다(사진 1-3과 사진 1-4).
『신불교』의 발행은 발행인을 기준으로 3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허영호가 주관하여 경남3본산회의에서 펴낸 시기다. 제2기는 허영호 발행 후 1년의 휴지기를 지나 복간한 시점이다. 제3기는 총본산 태고사 종무원의 교무부장을 맡았던 임석진이 발행을 담당한 시기다. 발행기관을 기준으로 보면 제1기는 경남3본산회의에서 간행한 창간호~30호 간행 시기, 제2기는 태고사 기관지로 간행한 31~67호 간행 시기로 나누어진다. 다만 전 호에 걸쳐 잡지의 발행소는 불교사이며 현재의 조계사 자리인 수송동 44번지가 주소지로 소개되었다.
초기의 주요 필진_허영호, 한용운, 강유문
초기의 필진을 보면 발행인 허영호(사진 2)가 개인 역량으로 글을 채우고, 불교청년운동의 좌장 역할을 했던 한용운, 그리고 대정대학 후배인 고운사의 강유문이 우군으로 동참한 형국이다. 강유문 또한 불교청년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초기에 잡지가 경남3본산회의에서 ‘경영의 책임’을 맡았고, 잡지에 경남삼본산종무협회 정기총회 회록이 수록되는 등 최소한의 행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사실이나, 잡지의 필진과 글의 성격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지방의 잡지가 아닌 중앙 잡지로서 교단 기관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허영호의 발간에 즈음한 기획 논설에 보면 당시 불교계가 31본산으로 권력과 책임이 분산되어 있어 통일적 불교사업을 전개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말하면서, 시급히 중앙집권의 기초와 진로를 확고하게 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신불교』 1~19호까지 수록된 글을 계산하면 권두언이나 교계소식 등 편집실에서 제작한 것을 제외하고 필명이 있는 글이 158편이다. 이 가운데 허영호(현주, 경호)의 글이 23편(누계), 허영호 번역(역술) 관련 글이 33편, 만해의 글이 26편, 강유문의 글이 16편이다. 허영호의 글이 약 35%를 차지하고 있고 만해는 16%, 강유문은 10%의 분포를 보인다. 이들 3인의 총합은 61%가 된다.
한용운은 이제는 폐간된 『불교』지 발행인으로서 기관지 복간을 표방한 『신불교』의 등장에 큰 기대를 표명하였다(「『불교』 속간에 대하야」, 1호). 그리고 현 단계 불교계 현안과 개혁 방안을 모색한 글을 발표하여 허영호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불교 통제안」(2호), 「주지선거에 대하야」(4호), 「불교청년운동을 부활하라」(10호), 「삼본산 회의를 전망함」(15호), 「총
본산 창설에 대한 재인식」(17호) 등이다. 그리고 세계 불교계의 동향을 소개한 글(「산장촌묵」)을 연재하였다. 문학작품으로 시로는 <심우장>(9호), 소설로 <철혈미인>(1~2호)을 발표하였다.
허영호는 1933년 7월 이후 약 3~4년 만에 잡지를 복간하면서 자신이 펴낸 잡지가 기존의 『불교』지를 계승하고 있음을 형식적으로 표명하였고, 『불교』지의 편집 겸 발행인이었던 만해의 글을 다수 실음으로써 계승과 연대의 관계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강유문(묵당)은 고운사 출신으로 중앙불전 1회 졸업생이다. 강유문은 허영호와는 대정대학 동문으로서 허영호(18호)에 이어 『금강저』의 발행인(19호)이 되었다. 이후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준비위원이자 동경동맹의 집행위원장(1932)을 맡았고, 1935년 고운사 감무, 교무원의 평의원, 경북불교협회 서무주임, 『경북불교』 편집인, 중앙불전 강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항일불교 단체인 만당의 당원이었는바, 이때 만해 한용운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허영호는 「반야부경의 성립 차제에 대하야」로 대정대학 불교학과 학위를 취득(1932.3)했다(『금강저』 19호). 강유문은 「고려 말의 요승 신돈에 대하야」로 역시 대정대학 사학과 학위를 취득(1934.3)하였다(『금강저』 21호). 강유문은 『신불교』에 졸업논문인 「신돈고」를 5회 연재(13~17호)했으며, 만해의 심우장을 방문하고 지은 시조(<제심우장題尋牛莊>, 16호) 및 여러 주제의 수필을 발표하였다.
결국 『신불교』의 초기 필진은 허영호가 주축이 되고 불교청년운동의 과정에서 함께 한 한용운, 강유문이 우군으로 참여한 진용을 갖추었다. 허영호의 시론으로는 잡지 초기에 방향을 제시한 「교단의 미래를 전망하면서」(1~3호)와 「중앙회의와 총본산 문제」(11호)가 있다. 2, 3호의 논설에는 부제가 ‘교단통제와 미래’, ‘조선불교와 교지 확립’이라 되어 있어 당시의 시대 인식과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고민한 글로 ‘조선불교의 입교론, 본존론, 불성론’(9~11호)을 발표하였다. 그의 논설은 통일기관의 확립을 주장하고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교리적으로 탐구하고자 한 경향이 있다.
불경 번역의 다양성
『신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용성의 『조선글화엄경』(1927~1928) 간행 이후 전개된 후속 세대의 번역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허영호(경호)의 역술 혹은 조역朝譯은 모두 연 33회 수록되었다.
경의 번역으로는 「미린타문경彌隣陀問經」(3호), 「(범한조梵漢朝 대역對譯)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 주석」(1~4, 6호)(사진 3), 「등가의 딸 경」(10호), 「보시태자경」(11~12호), 「아미타경」(7호), 「천수경」(8~9호)이 있다. 초기경전, 대승경전, 위경 등이 망라되었는데 특히 『금강경』의 경우 범어, 한문, 한글을 대비하여 제시한 번역으로 근대 번역의 새로운 일면을 보여주었다. 이는 일본 유학 시절 서구에서 유입된 범어 원전 연구의 방법을 체득하여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논서로는 「십이문론」(용수 저, 구마라집 한역, 5~9호), 「대승기신론」(마명, 10~13호), 「천태사교의」(고려 체관, 14~17호) 등이 있다. 이외에 당시 서구의 교학에 관한 논문 일부를 수록하였다. 「보살사상의 기원과 발달」(할 다야르, 1호), 「심해탈에 대해서」(달마슈나따, 3호), 「원시불교에서 아와 무아」(빈데을닛츠, 17호), 「율장서설」(헤을만 올덴베을히, 13~15호) 등이다.
1920년대 후반 용성스님이 『조선글화엄경』, 『금강경』 등을 한글로 번역하여 근대 불경 한글화의 서막을 연 후, 거의 10년 만에 새로운 세대 허영호가 『신불교』지에 이처럼 다양한 번역물을 발표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세대의 교체, 경전 번역 대상의 확장, 범어 번역, 외국학자 논서의 번역 등 다양한 의의가 있다.
허영호는 『신불교』 편집자 역할을 벗어난 후 잠시 지면을 떠났다가 24호에 수필 한 편을 발표하였고, 29호부터는 본격적으로 학술논설을 투고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신불교』 18호에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발굴하여 소개했던 그는, 「원효불교의 재음미」(29~35호)를 통해 원효 연구에 깊이를 더해갔다. 「대소품반야경의 성립론」 5~10회(40, 42, 44, 46, 50, 56호)는 그의 대정대학 졸업논문으로서, 만해가 편집하던 『불교』지에 연재(96~97, 99, 101·102 합호)하던 것을 이어 소개한 것이다.
허영호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불교청년운동을 전개한 불교청년의 대표주자였다. 1932년 9월 중앙불전 강사로 부임한 그는, 재단법인 중앙교무원의 40만 원 증자안을 주장하다가 이를 반대하는 교무원 재무부원 정상진과 크게 갈등을 빚은 여파로, 1933년 5월 중앙불전 학감 겸 교수직에서 사면되었고, 1937년에야 복직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경남3본산회의 부속기관인 해동역경원(원장 김구하)에서 불경 번역과 저술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그는 경전을 발췌하여 순한글로 번역한 『불교성전』를 펴냈고, 『구사론 대강大綱』, 『불타의 의의』, 『사종四種의 원리』를 해동역경원에서 발간하였다(사진 4).
사진 5. 원효의 「기신론소」 특집호 표지와 과목 (18호).
그리고 허영호는 경남3본산회의를 기반으로 『신불교』를 창간하였다. 『신불교』를 통해서 그는 총본산운동을 견인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학술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번역의 가능성을 시도함으로써 한글불교를 대중화하고 풍부하게 하는 데 일조하였다. 편집 겸 발행인을 그만둔 이후로는 학술논설을 주로 발표하여 불교학자로서 역량을 키웠고, 혜화전문 이사장(1942), 해방 후 동국대의 불교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그는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52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말 내선일체론의 선전지가 되다
허영호가 간행한 『신불교』의 최종호는 19호인데, 여기에 필자명 없이 「황실의 어번영御繁榮을 축함」과 「총후보국銃後報國에 대하여」가 수록되어 있다. 김삼도 편집으로 간행한 20호에는 「내선일체와 불교도」가 수록되었고, 이후 김태흡, 권상로, 이종욱 등의 친일 논설과 홍보가 지면을 장식하였다. 임석진 편집으로 간행한 43호는 대동아전쟁 1주년 기념호로서 이들의 여러 글과 함께 「대동아전쟁의 전쟁일지」가 수록되어 있다. 『신불교』는 67호까지 간행되었지만 대동아공영권과 내선일체의 논리를 담은 제도권 기관지로서, 조선의 불교를 대표하는 살아 있는 문화잡지로서의 생명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허영호가 18호에 다른 글은 한 편도 수록하지 않은 채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의 과목과 전문(상하권)을 실어 간행한 것은 하나의 시대적 메타포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사진 5).아마도 총독부에서 요구하는 일제 정책의 홍보지 성격의 변화를 피해 가는 간접적인 저항의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19호에 「황국신민의 서誓」가 목차에 제시되고, 「황실의 어번영을 축함」이 일본 황실 부부의 사진과 함께 수록된 것의 최종 책임은 편집 겸 발행인이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가 19호를 끝으로 잡지 발행에서 손을 뗀 것은 아마도 시대의 압박 가운데 겪었던 내적 갈등을 겪은 대응방안이 아니었을까 싶다. 19호 간행 이후 1년간 휴간한 것은 자발적인 휴간인지 강제적인 정간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음미해 볼 만한 현상으로 보인다.
이후 1년 후 재복간된 『신불교』는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반영하여 내선일체의 논리를 충실히 전파하는 선전지 역할을 더욱 담대하게 실행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32집(1942.1)부터 종간호까지 두드러진다. 이는 『신불교』 초기에 보여주었던 순수한 잡지 발행의 의도가 변질된 것으로서, 잡지 발행인 개인의 비극이자 시대의 비극이요 근대불교 잡지사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사진 6)
기실 1930년대 잡지는 학인 연맹의 『회광』, 불교청년동맹의 『불청운동』, 중앙불전 학생회의 『룸비니』, 동경불교유학생동맹의 『금강저』 등이 있어 역동적인 운동성을 지면 가득 보여준 시기다. 불교청년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잡지는 학술적 수준이 좀 약화하더라도 불교 개혁의 활발한 운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비해 기관지를 표방한 『신불교』는 신진의 역량, 개혁적 논조는 들어갈 여지가 없는 보수적인 학자, 권력자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보수적인 잡지로 변모되어 갔다. 종단의 기관지를 성격을 가진 『신불교』는 1930년대 잡지의 문화적 다양성과 활발한 생명력을 담보하지 못한 잡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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