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김생의 행서체와 고승들의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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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2 년 8 월 [통권 제112호] / / 작성일22-08-05 10:18 / 조회3,899회 / 댓글0건본문
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22 | 태자사지 ③
원래 석비의 글씨체는 예서隸書나 해서楷書였는데, 행서로 쓰기 시작한 것은 왕희지체를 서법
의 전범으로 세운 당 태종太宗(李世民, 재위 626~649)이 628년에 여산廬山 온천에 들었을 때 세운 「온탕비溫湯碑(=溫泉銘)」를 행서로 쓴 것에서 비롯한다(사진 1). 그 후에도 태종은 647년에 당 고조高祖(李淵, 재위 618~626)가 태원太原의 진사晉祠에 제사를 지낸 것을 쓴 「진사명晉詞碑(=晉詞銘)」도 행서체로 써서 세웠다(사진 2).
행서체로 된 고승의 돌 비석
태종은 648년에 조공사로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603~661)에게 자신이 써서 세운 이 2기의 비를 탁본하여 주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성골聖骨의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眞德女王(勝曼, 재위 647~654)이 647년에 즉위하여 반역을 꾀한 비담毗曇 등 30여 명을 처형하고 신라를 쳐들어온 백제군을 김유신金庾信(595~673)을 보내 토벌하게 하고, 그 이듬해 이찬 김춘추와 그의 셋째 아들 김문왕金文王(?~665)을 조공 사절로 당나라에 보냈다.
이때 당 태종이 김춘추를 만나보고 매우 총명하고 능력이 뛰어남을 알고 많은 대화를 하였고, 김춘추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의 아들을 숙위宿衛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신라의 왕자들이나 귀족 자제들이 당나라로 가서 숙위하며 교육을 받고 견문을 넓힐 수 있게 되었고, 도당 유학승들이 입당하거나 귀국할 때 이 숙위로 오가는 배에 허락을 받고 승선하기도 했다.
김문왕은 나중에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金法敏(?~681),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는 김인문金仁問(629~694)을 이은 세 번째 아들이었다. 당 태종은 당시에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에 머물고 있었다. 미앙궁은 한漢 고조高祖(劉邦, BC 202~BC195) 때 장안의 서쪽에 조성된 것인데, 그 기와의 글씨는 한나라 시대의 예서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어 서법연구가들은 이 와당의 글씨를 중시한다(사진 3). 추사선생도 예서 공부를 함에 있어 한나라의 예서를 최고로 평가하고 학습하였다.
아무튼 이 당시에 당나라에서 행서로 비를 세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신라에서는 아직 비문 글씨는 해서로 썼다. 그러나 왕희지의 글씨는 당 태종부터 최고로 평가하고 서법의 전범으로 세워두었기에 신라에서도 왕희지 글씨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자료를 구하여 배웠다고 보인다. 신라에서는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하는 글씨가 전범으로 자리를 잡아 내려왔으나 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진골 세력이 왕권을 장악하고 문화가 사치와 화려함으로 나아가고 사회가 이완되면서 왕희지체가 유행하게 되고, 비도 왕희지의 행서체 글씨를 집자하여 세우거나 왕희지체로 쓰는 경우가 생겨났다.
김생이 왕희지체를 구사한 것도 이러한 시대에 나타난 것으로 짐작된다. 801년에 조성된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鍪藏寺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는 왕희지의 해행楷行을 보는 듯이 착각할 정도로 왕희지체로 잘 쓴 것이고(사진 4)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선사 탑비인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를 813년에 쓴 영업화상의 글씨도 왕희지의 글씨를 빼다 박은 듯이 뛰어나다(사진 5).
886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선림원지禪林院址의 「홍각선사비弘覺禪師碑」는 운철雲徹 화상이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하여 세운 것이다(사진 6, 사진 7). 그렇지만 나말여초의 많은 선사들의 탑비는 기본적으로 강건하고 엄정한 구양순체를 구사하여 썼다.
김생이 왕희지의 글씨에 방불할 정도로 왕희지체를 잘 썼기에 당나라 홍복사弘福寺 승려인 회인懷仁 화상이 왕희지의 행서체 글씨를 25년 넘게 모아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의 글에 맞추어 편집하고 이를 돌에 새겨 석비로 세웠듯이(사진 8) 고려에서도 단목화상이 왕희지체의 대가이며 불도에도 깊었던 김생의 행서체 글씨를 집자하여 「낭공대사탑비」를 새겨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사진 9).
김생과 왕희지체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시 일본으로 눈을 돌려 보면, 도당 유학승이자 일본 진언종의 개창조인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 774~835) 화상의 글씨가 눈을 놀라게 한다. 왕희지, 손과정孫過庭(648~703), 안진경顔眞卿(709~785) 등 중국 명필의 글씨를 익혀 당대 일본 최고의 명필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그의 뛰어난 서법은 「금강반야경해제金剛般若經解題」에서도 볼 수 있고(사진 10), 왕희지체를 구사한 백미로 평가받는 친필본 「풍신첩風信帖」은 국보로 보존되고 있다(사진 11).
고려 왕조가 개국한 초기에는 엄정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문종文宗(재위 1047~1082)에서 예종睿宗(재위 1106~1122)에 이르는 기간에는 나라도 안정되고 학문과 문화도 만개하는 시기를 맞이하면서 문인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함께 글씨도 구양순체의 방정함에서 벗어나 왕희지체를 높이 평가하는 양상이 나타나는데 이에 따라 비의 글씨도 왕희지체가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고려시대 왕희지체의 최고의 정점을 찍은 이가 바로 고려 제일의 명필이기도 한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1069~1158) 화상이다. 우리나라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이 시기에 일본에서 왕희지체의 진수를 얻어 명필로 이름을 떨친 사람으로는 헤이안[平安] 삼절三絶로 평가 받는 오노노 미치카제(小野道風, 894~966)와 후지와라 유키나리(藤原行成, 972~1027)가 있다(사진12, 사진 13). 김생의 글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이어져 버렸는데, 신라, 고려, 일본에서 살아갔던 명필들의 글씨와 왕희지체의 유행을 서로 비교하며 음미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 보면 신라와 고려의 명필들의 글씨는 비석에만 남아 있는 데 반하여 일본에는 이런 명필들의 친필본이 많이 남아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것도 서로 비교가 된다.
무엇을 위하여 그 길을?
신라의 고승들을 찾아보면 그 시절 역사와 그 삶의 조각들만 석비 등에 남아 우리에게 전해 준다. 낭공대사탑비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고 그것이 원래 있었던 태자사를 찾아가 보면서, 내 머릿속에 맴도는 물음은 여전히 ‘그들은 무엇을 찾아 그러한 삶을 살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조실부모早失父母했거나 집도 없거나 먹을 것이 없거나 하여 속세를 떠난 것이 아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하여 세속의 연을 끊은 것도 아니다. 예컨대 신라에서는 대부분의 고승들이 진골 출신이거나 육두품 출신이었고, 왕족 출신인 경우도 있었다.
이 땅에 여러 종족들이 들어와 살고 작은 소읍小邑을 이루기도 하고 서로 싸워 좀 더 큰 나라를 만들기도 하면서 살았지만, 인간이 그냥 막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들이 모여 국가를 세우고 권력을 쥔 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부리고 있지만, 과연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인간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이런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다음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도 인간이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인간의 문제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그들은 길을 찾아 나섰다고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 걸고 파미르고원을 넘었을 리도 없고 물 한 방울 없는 열사의 사막을 걷다가 죽었을 리도 만무할 것이리라. 인간 역사에서 어느 시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보통 사람은 현실에 처한 삶이 내 운명이거니 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깨인 인간이라면 그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이상사회가 있을지 모르고, 인간이 이런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이를 찾아 탐구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리라. 이것이 실현되면 모든 인간이 복되게 사는 세상이 된다. 진리를 찾아 이를 실현하는 것, 그들은 이 길을 간 사람들이다. “진리를 구하여 인간을 복되게 한다!”[上求菩提 下化衆生].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다툴 때에도 각 나라가 불교를 공인하고 받아들인 것은 이런 이상
국가를 만드는 사상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고도의 사상과 철학과 이론으로 되어 있는 것이기에 모든 인간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그 이치를 밝혀낼 필요가 있었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올 때에는 간혹 서역에서 온 승려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땅에 들어온 불교는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와 경전이 한역되고, 그 번역된 경전을 놓고 뛰어난 사람들이 그 이치를 밝혀보려는 ‘무명無明에서의 탈출’이 횃불처럼 타올라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갈 때 한반도의 지식인들에 의해 탐구되고 전파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이상적인 삶을 밝혀줄 그 진리를 탐구하고자 중국으로 건너가 지식의 본토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번역된 불교’에서 의문의 갈증을 풀 수 없었을 때는 목숨을 걸고 끝도 모르는 인도로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리라.
유사 이래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불교는 대부분 중국에서 재구성된 ‘중국제 불교’이다. 『법화경法華經』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 『금강경金剛經』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는 화엄종華嚴宗, 정토종淨土宗, 선종禪宗까지 모두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와 ‘번역된 경전’을 근거로 하여 뛰어난 지식인들이 생산한 철학과 지적 자원을 동원하여 재구성한 불교이다. 때로는 유장하게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이야기들과 때로는 치밀한 논리가 구사되는 인도 불교(철학)와는 다른 것이다.
요즘 와서 이런 중국화된 불교 말고 진짜 싯다르타가 말한 알맹이가 무엇인지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불교라고 하는 흐름도 이 문제에서 나온다. 그 알맹이를 기본으로 하여 정밀한 개념과 언어로 철학체계를 만들든지, 문학으로 그려내든지, 예술로 표현하든지, 이론으로 구성하든지, 신앙으로 만들어가든지 하는 것은 탐구자에 따라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모습은 기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모습인데,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나는 어느 시대나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산 사람들을 보고 싶다. 그래서 산도 오르내리고 비석도 찾아가 보고 그들의 삶을 찾아본다.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 그것이 사상이든 철학이든 지식이든 이론이든, 이것만 알게 되면 우리는 그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무엇일까? 헌법학자로서 말하면, ‘모든 인간이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나라’를 정하는 규범이 국가의 최고법인 헌법인데, 이런 헌법을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헌법이 실현되는 나라에서 살기만 하면 된다. 태자사터에서 돌아온 날 밤, 용수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이 깜깜할 줄 알았는데, 온통 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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