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책 이야기]
혜월거사 유성종 / 백련암에서 유성종 거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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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정 / 2022 년 8 월 [통권 제112호] / / 작성일22-08-05 11:06 / 조회4,023회 / 댓글0건본문
우연처럼, 운명처럼 끌리는 것이 있다. 내게 불교 공부가 그랬다. 지방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불교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내가 20대 후반에 ‘스님들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혈혈단신 상경까지 했으니 말이다.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불교사 교수님이셨던 김영태 선생님의 퇴임 전 마지막 개설 과목인 ‘불교서지학’을 청강하게 된 것도, 이를 전공으로 삼은 덕분에 지난 10년간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에서 불교 고서를 조사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과 행운이란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특히 2013년 해인사 성보박물관 조사 당시에 박물관이 휴관했던 월요일마다 산내 암자인 백련암에 올라가서 한 기초 조사가 또 다른 운명 같은 인연을 만나게 했다.
백련암 책에서 찾은 장서인
그 해 백련암 조사는 장경각에 소장된 성철스님 책 중에서 고서만 선별해서 기초 목록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현장 조사를 한 지 겨우 한 해를 넘긴 터라 처음 백련암 장경각에 들어선 순간, ‘이 많은 책들을 어떻게 정리할까?’라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사진 1). 다행히 현장 경험이 앞선 선생님이 계셨기에 우선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 있던 고서들을 꺼내 포갑에 쌓인 곰팡이와 책에 쌓인 먼지를 제거하고 바람과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曬 작업부터 진행했다(사진 2).
성철스님이 소장했던 고서들을 선별하고 보니 한국에서 간행된 책보다는 중국에서 간행된 책들이 상당히 많았다. 한국본과 중국본을 분류해서 주제별로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서명과 목판본인지 필사본인지 확인하고, 언제 어디서 간행된 책인지 조사하는 과정에서 책마다 눈에 뜨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책의 소장자를 알리는 장서인藏書印이었다.
‘법계지보法界之寶’는 성철스님의 장서인으로 알려져 있었고, ‘혜월거사慧月居士’와 ‘유성종인劉聖鍾印’이라는 낯선 장서인이 주목되었다. 특히 중국에서 간행된 여러 책에 그의 장서인이 찍혀 있었다. ‘중국에서 간행한 불서를 다량으로 소장했던 거사 유성종은 어느 시기의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의 책이 어떤 과정으로 성철스님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혜월거사, 유성종의 장서인
해인사 현장 조사를 마치고 2014년 봄에 다시 서울에서 조사를 이어갔다. 백련암 고서의 기초 조사도 마친 상태였지만, 정밀 조사로는 바로 이어지지 못했다. 당시 일과 별개로 ‘유성종’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는데, 인터넷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한 자료가 바로 미국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 소장된 『덕신당서목德新堂書目』이었다(사진 3). 이 책에서 동일한 ‘혜월거사’, ‘유성종인’의 장서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덕신당서목』은 대략 860여 종 5,600여 권의 불서가 기록된 목록이다. 백련암 불서에서 유성종의 책을 확인한 터라 『덕신당서목』에 기록된 불서들이 유성종의 장서일 것이라는 심증이 갔다. 유성종의 장서인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조선 초기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 850여 명의 서화가와 문인학자들의 인보印譜를 엮은 『근역인수槿域印藪』에도 수록되어 있었다. 유성종의 자호字號는 혜월慧月이며, 본관은 서울 지역을 관향으로 삼는 한양 유씨劉氏로, 근대에까지 알려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을 19세기 문헌에서 연이어 찾을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유성종의 활동
유성종의 가계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찾지 못했지만 그의 직업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1846년(헌종 12) 26세의 나이에 반감飯監에 임명된 후 1878년(고종 15) 58세에 오위장五衛將으로 관직을 그만둘 때까지 30여 년간 궁궐에서 일했던 인물이었다. 반감은 조선시대 사옹원司饔院에 소속된 잡직雜職의 하나로 궁궐 내 음식조리를 지휘하는 책임자였다. 비록 차비노差備奴의 낮은 신분 출신이었으나 궁중에서의 직무 때문에 품계와 직위가 주어졌다.
유성종의 활동에 대해서는 19세기에 간행된 여러 불서의 서·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1849년 29세 때에 유성종은 유·불·도 삼교에 밝았던 월창거사月窓居士 김대현金大鉉(?~1870) 문하에 입문하여 수학하였다. 1854년(철종 5)에는 명나라 통윤通潤(1565~1624)이 주석한 『유마힐소설경직소維摩詰所說經直疏』를 쌍월성활雙月性闊에게 보여주고 간행을 돕기도 했다. 보월당寶月堂 혜소慧昭가 쓴 서문에서 유성종이 1853년에 연경燕京에 가서 책을 구해왔다는 기록이 확인된다(사진 4). 1855년에는 천태지의天台智顗가 찬술한 『선바라밀禪波羅蜜』 10권을 스승 월창거사에게 가져다가 쉽게 요약해 주기를 부탁하여 『선학입문禪學入門』을 편찬하도록 도왔다.
유성종은 49세가 되던 1869년(고종 6)에 경기도 파주 고령산古靈山 보광사普光寺에서 환공치조幻空治兆가 결성한 정원사淨願社 결사에 동참했다. 이듬해인 1870년에 환공치조가 편찬한 『청주집淸珠集』을 정원사에서 간행하는데, 이때 ‘보광보원葆光普元’이라는 필명으로 「결사문結社文」을 직접 지어 함께 간행하였다. 유성종은 1850년대에는 ‘혜월거사慧月居士’로 자신의 법명을 사용하다 정원사 결사에 동참한 이후로 ‘보원(普元 혹은 普圓)’이란 법명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백련암에 소장된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두 가지 장서인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사진 5).
정원사 결사에 참여할 당시인 1870년 봄에 서울 화계사 뒤쪽 천태굴(현재 삼성암)에서 7명의 거사들과 함께 3일 동안 독성기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한 거사들과 1872년에 묘련사妙蓮社 결사를 맺는다. 이들은 그해 11월 서울 삼각산 감로암甘露庵에서 관세음보살을 칭명 염불하던 중에 법회 자리에 있던 감로법주甘露法主에게 감응이 나타나 대신 법을 설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1875년 여름까지 7곳에서 11회의 법회를 거쳐 『관세음보살묘응시현제중감로觀世音菩薩妙應示現濟衆甘露』(이하 『제중감로』)라는 책을 편찬했다.
감로법주인 보월거사普月居士 정관正觀이 관세음보살의 감응을 받아 강설[承宣]한 내용을 ‘보광거사葆光居士 보원普圓’과 인담거사印潭居士 성월性月이 권1과 권2를 봉휘奉彙하고, 해월거사海月居士 성담性湛과 현허거사玄虛居士 자운慈雲이 권3과 권4를 봉휘하여 전체 10품 4권으로 편집하였다. 3년 후인 1877년 겨울에 판각하려 할 때 부우제군孚佑帝君 여순양呂純陽이 무상단無相壇에 강림하여 서문이 지어진 뒤 1878년 봄에 간행을 마쳤다(사진 6).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한 ‘보광거사 보원’이 유성종이라는 사실은 우연히 확인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제중감로』의 필사본에서 목판본에는 없는 그의 실명을 찾을 수 있었다(사진 7).
기존 불서들과는 달리 재가거사들에 의해 편찬된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강필서降筆書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성종이 참여한 도교의 무상단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유성종은 1878년 관직에서 물러날 즈음 무상단시사無相壇侍士의 일원이 되어 고종高宗(재위 1864~1895)의 정책하에 이루어진 관성關聖·문창文昌·부우孚佑의 삼성제군三聖帝君과 관련된 도교 서적인 선서善書 간행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선서를 간행할 때에 그는 ‘명주溟洲 유운劉雲’이란 이름과 ‘청련자淸蓮子’라는 도호道號를 사용하였다. 유운(1821~1884)에 대해서는 이미 도교 연구가들에 의해 밝혀졌는데, 유운이 불교계에서 활동한 유성종이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유성종은 62세 때인 1882년에 다시 정원사淨願社와 감로사甘露社 결사단체의 불서 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때 편찬한 책들은 대부분 선禪과 정토淨土 염불 수행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당시 기존 불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유통되지 않았던 중국 불서를 적극적으로 구해와 유서類書나 총서叢書 형태로 새롭게 편찬하고자 했다. 실제 1882년 보광사 정원사에서 간행한 『원해서범願海西帆』은 제가諸家의 정토집설을 모은 것으로, 11편의 불서가 목차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서문을 ‘보광거사 유운’이 썼다. 결국 혜월거사, 유성종, 보원, 보광거사, 유운이 동일한 인물임을 밝힐 수 있었다.
이처럼 19세기 후반에 불교계와 도교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고 그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던 유성종이라는 인물이 백련암 성철스님의 책이 아니었다면 계속 과거 속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인연은 기다려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찾을 때 오게 된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유성종에 이은 다음 인연을 찾아 나서 봐야겠다.
참고문헌
김윤수, 「고종시대 난단도교鸞壇道敎」, 『동양철학』 30, 한국동양철학회, 2008.
______, 「고종시대의 무상단無相壇과 난단도사鸞壇道士 유운劉雲」, 『동양철학의 지혜와 한국인의 삶』, 심산, 2013.
서수정, 「19세기 후반 결사단체의 불서 편간 배경」, 『한국불교사연구』 11, 한국불교사학회·한국불교사연구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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