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이야기]
조사선에 있어서 불성론의 변용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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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2 년 8 월 [통권 제112호] / / 작성일22-08-05 10:54 / 조회7,248회 / 댓글0건본문
당조唐朝를 한순간에 쇠락하게 한 ‘안사安史의 난’ 이후 중국 사상계는 심각한 사상적 반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유가에서는 주동적으로 ‘고문古文운동’을 일으켰고, 또한 ‘유불융합儒佛融合’의 기치를 세웠으며, 불교에서도 ‘제종일치諸宗一致’와 유불도儒佛道 ‘삼교일치三敎一致’가 제창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쇠락한 당조를 다시 흥성시키고자 하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사상적 경향을 모두 논하는 것은 지나치게 범위가 넓으므로 상세한 언급은 생략하지만 조사선의 불성론과 관련된 부분은 바로 우두종牛頭宗의 유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안사의 난 이후 우두선의 유행
우두법융牛頭法融이 창립한 우두선牛頭禪은 중국선에 있어서 남종선의 흐름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우두선의 사상을 모두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허락하지 않지만 사상의 전체적 흐름으로 보면 우두선은 삼론학三論學과 그의 영향으로 출현한 성현영成玄英의 『남화경소南華經疏』, 즉 『장자莊子』에 대한 소를 통한 ‘중현학重玄學’의 제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현학’이 삼론종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출현했다는 점이나 우두선이 ‘중현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사실상 논증하기가 상당히 힘든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초당初唐으로부터 장기간에 걸쳐 치열하게 발생한 ‘불도지쟁佛道之爭’의 상황에서는 서로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
는 절대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사상적 측면에서는 분명하게 영향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정황이 많이 나타난다. 이는 종밀宗密의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에서 우두선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우두牛頭의 종지宗旨는 제법이 꿈같고 본래 일이 없으며, 심경心境이 본래 공적하여 이제 비로소 공적해짐이 아님을 체득함이다. … 이미 본래 일이 없음을 요달하면 이치에 마땅히 자기를 잃고[喪己] 정을 잊음[忘情]이다. 정을 잊음[情忘]은 곧 고통의 원인이 끊어지고 일체의 고액苦厄을 제도한다. 이것이 정을 잊음으로 닦음을 삼는 것이다.”(주1)
여기에서 노장의 색채를 분명하게 엿볼 수 있는데, “상기喪己”, “망정忘情”, “정망情忘” 등의 용어는 명확하게 『장자』에서 온 것이며, 또한 그 사상도 역시 상당히 유사하다. 주지하다시피 성현영의 ‘중현학’은 바로 『장자』를 삼론학의 논리를 받아들여 재해석하여 출현하고 있다고 볼 여지가 농후하다. 따라서 우두선이 삼론학과 중현학의 논리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거의 절대적이다. 또한 『송고승전』에 실린 우두법융의 법계에 속한 유칙惟則의 전기에서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유칙은 이미 혜충慧忠이 전한 도를 정밀하게 관한 지 오래되었다. 천지天地가 무물無物임에 나도 무물無物이다. 비록 무물이나 일찍이 물物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로 성인은 그림자 같고 백성은 꿈같은데[如夢], 누가 나고 죽는가? 지인至人은 이로써 능히 홀로 비추고[獨照], 능히 만물의 주主가 되니, 내가 이를 알았다.”(주2)
여기에서 언급되는 “혜충”은 ‘혜충국사’가 아니라 우두종 계열의 동명이인이고, 유칙도 천여유칙天如惟則이 아니다. 이러한 인용문에서 사용하는 “천지天地”, “지인至人”, “여몽如夢”, “독조獨照” 등은 모두 『장자』의 용어이고, 그로부터 노장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분명하게 ‘무정불성無情佛性’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학자들은 우두선에 대하여 “기본적인 사상이 노장老莊, 현학玄學과 서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많은 용어도 서로 유사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우두법융의 동산법문 법계 편입
그런데 역대로 선종사에서는 우두법융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을 개창한 도신道信의 사법嗣法 제자로 인정해 왔다.3) 그렇지만 도신과 법융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는 바로 이화李華(715~766)가 찬술한 『윤주학림사고경산대사비명潤州鶴林寺故徑山大師碑銘』이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도신道信 문하에서 통달한 자가 법융法融 대사이다. 우두산牛頭山에 머물며 자연지혜自然智慧를 얻었기 때문에 도신 대사가 가서 인증해 주고 말하였다. ‘칠불七佛의 교계敎戒와 모든 삼매문三昧門은 말에 차별이 있지만 뜻[義]에는 차별이 없다. 많은 중생의 근기根器가 서로 같지 않지만 오직 최상승最上乘만이 포섭하여 하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모든 과실果實이 여무는 것과 같이 그대가 능히 총지總持하니 나 또한 기쁘도다.’ 이로부터 무상각로無上覺路는 이 종宗(우두종)으로 나뉘게 되었다.”(주4)
이에 따르면 도신이 우두산에 찾아가 법융에게 법을 인가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이는 사실상 이화의 조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화는 무엇 때문에 법융의 법계를 동산법문과 연계시켰을까? 이화는 어려서부터 불교에 심취하였는데, 천태종의 형계담연荊溪湛然으로부터 천태학을 배웠으며, 담연은 그를 위하여 『지관대의止觀大意』를 찬술하였다고 한다. 또한 『대일경大日經』 등의 밀교 경전을 번역한 선무외善無畏(637~735)로부터 밀교를 배웠다. 그러나 만년에 그는 법융의 5세손인 경산현소徑山玄素[鶴林玄素, 668~752]를 스승으로 모시며 우두선을 널리 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의 비명은 바로 경산현소가 입적한 후 찬술한 것이다. 이 당시는 안사의 난(755~763)이 발생하기 이전이지만 이미 동산법문이 천하를 장악한 시기이다. 따라서 이화가 자신이 신봉하는 우두선의 법맥을 동산법문에 연결한 것은 바로 우두선에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의 선종사 연구에서는 이러한 법계는 도신이나 법융 등의 활동 시기와 입멸년도 등으로 추정하면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아 이화가 조작하였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사상적으로도 결코 같은 계통이라고 볼 수 없다.
우두선에 귀의한 이덕유와 회창법란
그런데 안사의 난 이후에 갑자기 양관楊綰(?~777), 진소유陳少游(724~784), 배도裵度(765~839), 최군崔群(772~832) 그리고 회창법란의 주역인 이덕유李德裕(787~850) 등과 같은 조정의 고관들이 우두선에 귀의함을 볼 수 있다.(주5) 이들은 모두 조정의 최고위직을 맡았으며, 특히 이덕유는 회창법란 당시 승상의 지위에 있었다. 이와 같은 고관들이 무엇 때문에 우두선에 귀의했을까? 이는 회창법란의 주역인 이덕유의 불교에 대한 이해로부터 추정할 수 있다.
이덕유의 부친인 이길보李吉甫(758~814)는 청량징관淸凉澄觀이 『화엄정요華嚴正要』 1권을 찬술해 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지만, 그도 안사의 난 이후에는 우두종의 법흠法欽에게 귀의했으며, 입적한 후 비문을 찬술하였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이덕유 역시 우두선에 귀의하였다.
이덕유는 태화太和 3년(829)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의 직위에 있으면서 20만 전錢을 보시해 남경南京에 법융法融의 새로운 탑을 건립했고, 유우석劉禹錫에게 『우두산제일조융대사탑기牛頭山第一祖融大師塔記』의 찬술을 청했는데, 이 『탑기』에서는 이화가 설정한 도신-법융의 법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후대에 우두선이 선종의 정맥으로 기술되고 있으니, 이화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탑기』에는 이덕유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실려 있다.
“(이덕유는) 이치를 숭상하고, 옛것을 믿으며, 유학儒學과 현학玄學을 함께 닦았다. 승려들이 부처를 팔아 사람들을 현혹함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참다운 실상實相에는 깊게 통달하였다.”(주6)
이러한 평가로부터 이덕유가 회창법난會昌法亂(842~845)을 일으킨 까닭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안사의 난 이후 당조는 점차 기울어가고 있었고,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에서 당조를 다시 부흥시킬 새로운 사상들을 모색하였지만, 불교의 일단에서는 “부처를 팔아 사람들을 현혹함”의 자취가 남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덕유는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불교에 상당히 깊은 이해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나아가 당시 당조의 부흥을 위해 민족적 정체성을 특히 강조하는 경향에서 중국에 가장 적합한 불교가 바로 우두선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특히 “유학과 현학을 함께 닦았다.”라는 유우석의 평가는 이덕유가 우두선에 심취한 원인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두선은 삼론종과 그의 영향으로 출현한 ‘중현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다른 불교나 선사상보다 중국적 사유양식에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회창법란이 비록 도교에 심취한 무종武宗이 개성開成 5년(840) 조귀진趙歸眞 등 81명의 도사를 불러 황궁에 도관道觀을 설치하면서부터 비롯되었지만, 당시 승상의 지위에 있던 이덕유가 적극적으로 찬동한 까닭은 바로 기존의 모든 불교를 없애버리고 ‘우두종’만을 남기고자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회창법란 시기에 이덕유가 수많은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주살했지만 우두종 계열의 승려와 사찰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우두종을 건립시키려 했던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회창법란 이후 우두종의 득세와 사상적 삼투
4년에 걸친 회창법란은 중국불교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덕유의 의도와 같이 결국 우두종이 득세를 하였고, 또한 이화와 유우석이 설정한 법계에 따라 동산법문으로부터 발생한 남종선도 비교적 피해를 덜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이후의 조사선에는 우두선의 사상과 철저하게 융합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회창법란은 이후 중국불교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는데, 무엇보다도 조사선의 불성론의 방향이 극명하게 전환됨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육조단경』으로부터 비롯한 ‘즉심즉불’을 중심으로 하는 ‘유정유성’이 점차 ‘무정유성’의 불성사상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에 따라 중국 불교학계에서는 『단경』으로부터 비롯하여 마조도일馬祖道一에 이르는 선사상을 전기 조사선으로, 그리고 ‘무성유성’으로부터 ‘불성’의 물성화物性化를 이룬 것을 후기 조사선, 혹은 ‘분등선分燈禪’이라고 구분하고, 『장자』의 사상이 철저하게 삼투渗透한 사상적 특징에 따라 조사선의 ‘장학화莊學化’라고도 칭한다. 따라서 이를 이어서 회창법란 이후에 조사선에서 어떠한 사상적 과정을 거쳐 불성의 ‘물성화’를 승인하고, 또한 주류가 되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각주>
(주1) [唐]裴休問, 宗密答, 『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卍續藏』63, 33c), “牛頭宗意者, 體諸法如夢, 本來無事, 心境本寂, 非今始空. … 旣達本來無事, 理宜喪己忘情. 情忘則絶苦因, 方度一切苦厄. 此以忘情爲修也.”
(주2) [宋]贊寧, 『宋高僧傳』卷10(『大正藏』50, 768b), “則旣傳忠之道, 精觀久之. 以爲天地無物也, 我無物也. 雖無物而未嘗無物也. 此則聖人如影, 百姓如夢, 孰爲死生哉? 至人以是能獨照, 能爲萬物主, 吾知之矣.”
(주3)[宋]契嵩編修, 『傳法正宗記』卷9(『大正藏』51, 763c), “三十一祖道信尊者(此土之四祖也)旁出法嗣一人, 曰牛頭法融.”, [宋]道原, 『景德傳燈錄』卷4(『大正藏』51, 223b), “第三十一祖道信大師旁出法嗣九世共七十六人, 金陵牛頭山六世祖宗第一世法融禪師.” 등 대부분의 禪宗史書에서 牛頭法融을 道信의 傍系嗣法으로 인정한다.
(주4) [唐]李華, 『潤州鶴林寺故徑山大師碑銘』(補遺編29, 299b), “信門人達者曰融大師. 居牛頭山, 得自然智慧. 信大師就而證之, 且曰: 七佛敎戒, 諸三昧門, 語有差別, 義無差別. 群生根器, 各各不同, 唯最上乘, 攝而歸一. 凉風旣至, 百實皆成, 汝能總持, 吾亦隨喜. 由是無上覺路, 分爲此宗.”
(주5) 김진무, 『중국불교의 거사들』(운주사, 2013.), pp.137-146 참조.
(주6) [唐]劉禹錫, 『牛頭山第一祖融大師塔記』(補遺編29, 293b), “尙理信古, 儒玄交修. 始下令禁桑門販佛以眩人者, 而于眞實相深達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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