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사전』 편찬에 얽힌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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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10:35 / 조회3,434회 / 댓글0건본문
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2 |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 ②
▶ 월운스님께서 불경을 번역하기 전에 어떻게 불경을 공부하셨나요?
운허스님은 그 당시 파란이 많으셔서 바쁘게 왔다 갔다 하시고, 나는 주로 통도사에 가서 경을 좀 봤는데 뭐 제대로 보지는 못했어요. 하루에 한 권씩 보게 되는데, 이것저것 다 보고 또 다니면서 건달 비슷하게 살기도 했지요.
해인사와 통도사를 오가며 불경공부
통도사로 해인사로 그렇게 다니는 동안에 대통령이 서울로 돌아가서 ‘사찰의 토지는 돌려줘라’, 그리고 내가 날짜는 잘 모르겠어요, 대통령이 ‘처자식 가진 사람은 절에서 물러가라’는 유시(1954년 5월 21일)를 내립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유시를 내리자 비구스님과 대처스님 간에 싸움이 났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사판事判 스님네들도 문제지만, 그렇게 해서 절 재산 손실이 컸어요. 그 기간이 한 3∼4년 지나갔어요. 그래서 지금 그게 몇 년 도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불교정화가 끝나고 비구승단이 발족되어 종단이 안정이 되었지요.
그 당시에 나는 통도사로 왔다가, 해인사로 왔다가, 또 진주로 오가고 했지요. 내가 한문은 좀 했어요. 그런데 불경을 공부했단 얘기는 죄송한 말씀인데, 나는 불경 공부를 제대로 못했어요. 다만 불경 구조가 어떻게 됐는가 그것만 훑어보고 다녔던 거예요. 율장은 또 어떻게 됐는가 하고 좀 살펴봤지요. 그때는 내가 글을 보던 때라 경을 보면 기억이 났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나요.
나는 봉선사가 고향이에요. 그래서 승적도 봉선사에다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봉선사를 찾는 것이 늦어졌습니다. 돌아다니다가 1960년대 후반인데 봉선사로 간 때가 기억이 안 나요. 그거 말하려면 내 연보자료를 좀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봉선사에 와서 자리 잡았는데, 우리 봉선사는 일제강점기에 사격寺格이 높았던 절이에요. 31본산의 하나이고 홍월초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근대불교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분이셨어요. 그리고 동국대학(명진학교)도 그 분이 혼자 세웠으니까요. 그런 분인데 내가 봉선사에 와서 조계종이 생겼지만, 처음에는 교구본사가 아니었더랬지요.
▶운허스님이 불경을 번역하게 된 배경을 알려주세요.
종단에서 운허스님이 계시고 하니까 봉선사를 25교구본사로 정해준 거예요. 그 운허스님이 1980년도에 돌아가셨지만 평생 소원이 불경 번역 즉, 역경譯經이에요. 그런데 그 어른도 역시 속가가 평안도 분인데 글이 아주 장하셨어요. 그래서 일기를 두고 가셨는데, 그걸 보면 뭐 자자구구字字句句에 문장이 넘쳐흘러요.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그걸 모릅니다. 바둑도 고수가 두는 걸 보면 두 수, 세 수 앞을 두지만 하수는 오므라든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은 저렇게 기가 막힌 수가 있냐고 하면서 혈맥이 막힌다는 거예요. 그렇듯이 운허스님은 진짜로 글이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어른이 속가에서 글을 많이 하시고 또 의협심에 중국으로 들어가서 독립군에 투신하셨지요. 그야말로 광복이 되어 돌아오셨지요. 돌아오셔서 이승만 박사가 건국하는 진영과 노선이 달라서 거기에 참여하지 않고 봉선사 스님으로 사셨어요. 참 이렇게 한동안 숨어 사시다가 해방이 되고 난 후 25일 만에 학교설립 허가신청을 냈어요. 발 빠르게 하셨죠.
학교 이름이 광동학교입니다. 봉선사 다섯 사찰의 재산을 투입하여 학교를 만드셨는데, 그때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에요. 그래 학교를 만드시는데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남쪽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범어사에서 운허스님을 만났지요. 6.25사변이 안정된 다음 해인사로 돌다가 다시 봉선사로 들어왔어요. 그때가 몇 년도인지 모르겠는데, 봉선사가 다른 곳보다 교구본사가 늦게 승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른이 그런 능력이 계시니까 소위 그 마음속에 있는 것, ‘존호심存乎心이면 형어외形於外라’. 무슨 말인가 하면 “마음에 꼭 박혀 있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겉으로 나타난다.”고 그랬어요.
운허스님의 불경 공부를 도운 월초스님
그래서 그 어른이 속서에 능하시니까 불경은 짧게 보셨어요. 운허스님의 글이 장한 걸 아시고 홍월초 스님이 봉선사로 모셔다가 불경을 보도록 했어요. 홍월초 스님이 선운사의 석전 박한영 스님을 개운사로 모셔다가 대원암 옆에 크게 강사실을 지었어요. 그때 3,000원을 들였다고 합니다. 그 강원을 개설하고 우리 스님(운허 스님)을 공부하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3년이든가 4년이든가 거기서 불경을 보고 나오셨죠.
▶운허스님이 홍월초 스님 지원으로 불경을 보셨군요?
나는 훨씬 후에 만났지만 석전 노스님의 강맥이 운허스님을 건너 나한테도 왔다 그러죠. 그래 내가 무슨 얘길 하려고 하느냐면 모르는 사람은 10년 두드려 봐야 소용없지만 기초학문이 있는 운허스님과 같은 분들은 훑어보고 넘어가고 정리를 하는 것이지 배우는 건 아니예요. 근데 그 운허스님이 강의를 하시다가 생각한 것이 뭣이냐 하면, 이 한문 속에 있는 깊고 오묘한 뜻을 골고루 나눠 잡지 못하는 게 한이 된 거야. 그래서 그 분은 아마 누구보다도 세종대왕의 나랏말씀이 글자와 달라 이것, 글자가 어려워서 뜻을 못 전하는 게 안타깝다고 하신 분이 운허스님이에요. 그래서 그분이 역경을 생각했지만 역경원 설립까지는 생각 안 하셨죠. 처음엔 번역을 많이 하셨죠.
개인적으로는 번역을 하시고, 그 분이 번역하신 게 참 좋다고 하는 것은 한문만 알고 우리말을 모르면 번역이 안 됩니다. 알긴 아는데 소위 언어화하는 훈련이 돼야 해요. 근데 저분은 소시적에 속성으로 중학교를 졸업하셨어요. 한문을 하셨기 때문이지요. 그 짧은 시간에 어학의 세계라든가, 아니면 과학의 세계, 수학의 세계를 모두 다 짐작을 하셨어요. 그래가지고 번역을 하시다가 보니까 ‘우리말로 번역을 하는 데는 혼자선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을 하셔 가지고 그때 『(불교)사전』을 만드는 게 큰일이고. 그것도 사실 내가 통도사에 있을 때인데, 그보다 먼저 범어사 있었을 때 이야기죠.
범어사 동산스님이 날 깊이 신임하셔 가지고 한 150명 되는 대중살림을 내가 맡았어요. 사실 내가 변두리 구석에서 아무것도 모르던 것이 가서 살림을 살았는데 그게 언제인지 기억을 못 해요. 어느 때인가 쌀이 떨어졌어요. 근데 비룡스님이라는 분이 나를 데리고 부산 완월동에 갔어요. 그 동 이름도 안 잊어버려요. 아무튼 그렇게 나를 데리고 어떤 이상한 집으로 갔어요. 거기 양쪽 방에 색시들이 쭉 문을 열어놓고 있는데, 그때 그 예감이 이상했어요.
칠순까지 『불교사전』 표제어 카드를 만든 운허스님
그런데 그 안쪽에 내실이 있었는데 화장을 짙게 한 보살님이 있었어요. 비룡스님이 그분한테 들어가서 뭐라고 말하니까 글쎄 그분이 보리쌀 50가마하고 쌀 50가마인가 100가마인가를 자연스럽게 내주더라고요. 아주 쉽게 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어디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분을 뵈었는데 바로 통도사였어요. 운허스님이 통도사에 계시고 내가 그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산책하는데 웬 영감님하고 새댁이 왔어요. 내가 부산 그 색시집에서 봤던 바로 그 보살인 거예요.
▶스님이 부산 색시집에 갔다구요?
그 분이 오씨 보명월 보살님이라는 분이었어요. 그래 내가 그분을 알고 있어서 인사를 하니까 그 보살이 “아, 우리 영감님이야.”라고 하면서 나에게 반말하는 거예요. 몇 번 봐서 보명월 보살님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 “보명월 보살님 아니십니까?” 그러니까 “아이, 영감님이야 인사해.” 그래요. 내가 인사를 하고 방으로 안내를 잘 해드렸지요. 사실 보명월 보살은 나를 수양아들로 삼는 게 목적이었어요. 자꾸만 유도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스님들이 수양어머니를 삼는 게 많았는데, 신세지는 일이 많았어요. 나는 그것이 보기 싫었어요. 중이 돼 가지고 친부모도 버리고 와서 또다시 남을 부모로 삼는다는 게 내키지 않았어요. 그렇게 하면 나는 내 부모님한테 양심의 가책을 가지게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분을 수양부모로 삼지 못하겠더군요.
그런데 그 전날 내가 예불하고 운허스님 방에 들러서 절을 드렸는데, 그때 스님께서 사전을 만들려고 카드에 글을 쓰시던 때입니다. 카드가 다 써졌다고 했는데, 그날 문안을 가니까 방에다가 사과박스를 댓 개를 꽁꽁 묶어놨어요. 내가 “이게 뭡니까?” 하고 물으니까 운허스님은 말씀을 아주 천천히 말씀하셨어요. “올해 내가 칠순(1961)인데 이것을 다 해놨어. 카드를 배열해서 쓰기만 하면 되는데 이거를...”
그러시면서 사전을 만드는 데 그때 돈으로 무슨 7백만 원인가 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돈으로 엄청나게 큰돈입니다. 그런데 돈도 없고, 내 나이가 칠순인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차라리 흩어지지 않게 묶어놓고 그 박스 겉에다가 이게 『불교사전』 원고니까 “누구 돈 있는 분, 뜻있는 분은 번역해서 쓰시오.”라고 죄다 그렇게 써놓으셨어요.
『불교사전』 제작비 화주에 얽힌 일화
▶그 박스들이 『불교사전』을 위한 카드였군요?
원고가 아니라 원고를 써 가지고 그걸 출판하려면 카드를 만들어서 감아서 나열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콜렉션이지. 거의 그 단계까지 간 겁니다. 카드는 가, 나, 다, 라 순서로 되어 있었어요. 지금의 사전들은 낱말을 되는대로 모아놓지만 그때는 카드를 각각 정확하게 확인해야 되니까 카드가 아니고 원고로 작업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해놓고는 칠순이 되니까 운허스님은 감개무량하신 거예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내일이 곧 칠순 설날이 다가오는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그 소리를 들으니까 참 안 돼서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날 저녁 때 보명월 보살이 영감을 하나 달고 온 거지요. 그 보살이 원래는 혼자 살았어요. 내가 인사를 하니까, 영감에게도 인사하라고 해요. 그래서 그분들을 방에 모시고 갔지요. 내가 또 그런 건 잘했어요. 저녁 잡수라고 그러고서 저녁을 다 먹었고, 또 주무실 때 뭐 불편한 거 없는지 물어보기 위해 다시 가 보니까 그 영감님은 아랫목에서 잠들어 있고, 그 보살님이 “아이고 해룡(월운) 수좌는 내가 늘 좀 뭘 도와주려 해도 기회가 없고.” 그래요. 기회가 없단 얘기가 바로 수양아들 삼자는 그 얘기지요. 나는 “기회가 있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그랬거든요. 내가 그 『불교사전』 얘기를 쫙 설명했어요. 돈 800만 원이면 만든다는데 그걸 못해서 마음이 안 좋다고 말하니까 이 보살은 심드렁해요.
내가 딴소리를 하니까 보살님은 심드렁했어요. 그런데 아랫목에서 잠자던 영감이 갑자기 이불을 벌떡 차고 일어나서 “지금 뭐라고 그랬어 너?” 그 사람은 반말로 너야. 그래서 내가 『불교사전』 얘기를 했죠. “그래? 그러면 지금 당장 운허스님 방으로 가자.”고. 또 반말을 해요. 나는 그랬어요. “지금 어르신도 주무시고, 또 어디 가실 거 아니니까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지요.” 그 순간 나는 두 사람이 만나기 전에 조율해야 되겠으니까 그랬어요. 내일 아침에 가자고 했지요. 이분들을 재워놓고는 내가 다시 운허스님 방에 갔어요.
주무시는 걸 깨웠지요. 나는 들어가서 죄송하다고 좀 일어나시라고 그랬어요. “스님이 원하시던 사전이 출판될 가능성이 보여서 왔습니다. 이러이러한데 그 영감님이 내일 아침에 뵙자고 스님 방에 오겠답니다. 오시면 하실 말씀을 좀 정리해 놓으십시오.” 그렇게 말씀드리고 “이제 주무세요.”하고 나는 나왔어요. 그 이튿날 아침에 그분들하고 도킹이 된 거예요. 그래 거기서 돈이 얼마 들고 그러는데, 사전을 편찬하는 게 사실 큰돈 아냐. 3천 몇 백만 원이라고 그래요. 그게 술 한 잔 값이라고 그러더구먼요. 그 영감이 운허스님께 “염려 마세요.” 그렇게 해서 『불교사전』이 세상에 나오게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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