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심원사 체험 이전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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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13:31 / 조회3,825회 / 댓글0건본문
1971년 문경 도장산 심원사에서 35세의 고우스님이 좌선하던 중 느낀 강렬한 공空 체험은 스님의 성격마저 바꿔 놓았다. 그 체험 이전에 고우스님은 은둔형이었고 염세주의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군복무 중에 얻은 폐결핵으로 인생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던 터이고 제대 후 유일하게 의지하던 어머님의 죽음은 세상을 허망하게만 보이게 했다.
공 체험 이후 고우스님의 성격이 바뀌다
그런 사연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나 깊고 깊은 산중으로 가서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도산 수도암으로 들어가서 불법을 만나 출가의 새 길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내향적이고 소극적이며 허무주의적인 생각은 여전했다.
역사적인 봉암사 제2결사를 선도하였지만 고우스님의 내면에는 여전히 염세주의적 성향과 기질로 큰일을 하거나 대중이 많은 큰절 생활이 부담스러웠고,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그렇지만 옳은 일, 불교를 위하는 일, 대중을 위하는 일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때는 어디에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지 정면 돌파했다. 봉암사 제2결사가 그랬고, 봉암사 산판 문제의 해결이 그러했다.
봉암사 정화 중 산판 문제를 마무리한 고우스님은 새벽에 홀연히 떠나 깊은 산중인 농암 도장산 심원사로 갔다. 고우스님이 심원사에서 정진할 때 봉암사 주지 지유스님도 오셨고, 또 대효스님도 왔다.
고우스님은 지유스님을 친형처럼 따랐고, 지유스님은 친동생처럼 아꼈다. 고우스님과 대효스님도 마치 사이좋은 형제처럼 평생을 우의 있게 잘 지냈는데, 서로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였다. 심원사에서 정진하던 어느 날 고우스님은 대효스님에게 봉암사의 일을 하면서 너무 힘들고 지쳤다며 “어디 무인도 등대지기 자리가 없을까? 그런데 가서 살고 싶다.”고 하셨다고 한다. 대효스님은 형님처럼 따르던 고우스님이 그런 말을 하자 정말로 등대지기 자리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등대지기도 그냥 가는 게 아니었다. 등대를 움직이는 기계와 작동 원리에 대하여 공부해서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고우스님은 단념했다. 그럴 정도로 심원사에서 고우스님은 소극적이고 은둔형이었다.
그러나 심원사 좌선 중 ‘무시이래無始以來’를 깨닫는 공空 체험을 한 고우스님은 얼굴도 말도 마음 씀씀이도 달라졌다. 훗날 법문할 때면 가끔 심원사 공 체험 이야기를 하시며 불교에 대한 첫 번째 체험이었다고 하였다. 이 체험을 한 뒤 고우스님은 그동안 출가해서 강원의 경전과 어록 공부를 통해서 보고 들은 ‘공空’이 체험이 되어 불교의 이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체험까지 되니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에 대한 확신이 들었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고 스스로 자존감도 높아졌다. 세상을 허무한 것으로 알았던 스님은 불교를 만나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를 확신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당시 심원사에서 정진하다가 고우스님과 같은 체험을 한 대효스님은 이때부터 “고우스님이 달라졌다.”고 회고한다. 그전에는 상당히 괴팍하고 염세주의적이라 은둔하려는 성향이었는데, 이 심원사 체험 이후로는 밝아지고 편안해지면서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고우스님도 대효스님의 체험과 변화를 알아차렸지만 서로 묻지도 말하지도 않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느꼈다고 한다.
공 체험, 해오解悟인가? 돈오頓悟인가?
출가하여 불교를 공부한 지 10년 만에 심원사에서 좌선 중에 공을 체험한 고우스님은 당시에는 그것을 깨달음, 즉 견성見性으로 알았다. 워낙 성격이 내성적이고 은둔적이어서 당신의 체험을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공부를 점검 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제방 선원에서는 돈오점수頓悟漸修 공부가 대세였다. 돈오점수란 고려시대 보조普照(1158∼1210)국사가 『수심결修心訣』에서 주장한 깨달음을 향한 독특한 수행관이다. 돈오頓悟, 단박에 깨치더라도 전생의 미세한 망상과 습기는 완전히 없앨 수 없으니 점점 닦아[漸修]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돈오에 대한 점수적 해석은 마조스님의 상수제자 대주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에서 “돈오란, 단박에 번뇌망상을 없애어 더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치는 것이다.”는 정의와 다른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이 독특한 주장은 실은 선종의 5조 홍인대사의 회상에서 6조를 누구로 할 것인가를 두고 행자 혜능과 법전을 겨룬 교수사 신수의 게송과 같은 견해이다. 신수대사의 “깨치려면 티끌 먼지를 부지런히 떨고 닦아야 한다.”는 주장처럼 돈오점수관도 깨쳤더라도 번뇌망상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보조국사의 『수심경』 이래로 이 돈오점수관이 깨달음의 길로 자리 잡아 불교의 경전과 선어록을 모두 이런 안목으로 해설하고 공부하고 닦아 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1967년 성철스님은 해인총림 동안거 『백일법문百日法門』에서 이 보조국사의 돈오점수관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선문禪門의 바른 안목은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것을 역설하였으니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그동안 고려시대 보조국사의 돈오점수설을 1천년 가까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는데 성철스님이 이런 주장을 했으니 실로 파격이었다. 하지만 당시 선원뿐만 아니라 교문에서도 성철스님보다 보조국사를 높이 받들었으니 당연히 성철스님의 돈오돈수 입장은 배격되었고, 성철스님의 엉뚱한 주장으로 치부되었다.
고우스님은 성철스님이 『백일법문』을 설한 1967년 동안거에서 직접 듣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한 이유도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을 직접 들었더라면 공부에 대한 정견을 좀 더 일찍 세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고우스님은 깨달음에 대하여 돈오점수설을 신봉하던 터라 당신도 심원사 공 체험을 돈오한 것으로 알았고, 이제 깨달았으니 전생 이래 미세망상은 점차 없애 가면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또한 평소 존경하고 따랐던 서암스님이나 지유스님도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공부의 지침으로 삼았고, 고우스님도 그런 견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리하여 심원사 공 체험을 돈오로 여겼던 고우스님은 적당한 보림처를 물색하던 중 태백산 각화사 동암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각화사 동암으로 갔다. 동암에 도착한 스님은 당신이 봉암사를 나올 때 봉암사 백련암에 계시던 혜암스님께 인사도 못하고 나와서 혜암스님이 걱정하실까 봐 동암에 와서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때가 1972년 고우스님 나이 36세였다. 공부를 마쳤다고 생각한 스님은 이제 태백산 깊은 산속 암자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연과 함께 소요하였다.
1970년대 초 희양산 봉암사
1972년 봉암사 주지였던 지유스님이 주지를 다른 사람 이름으로 하라 하였다. 지유스님의 동생도 출가하여 종단 총무원에서 문화재 관련된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갑자기 죽자 지유스님은 인생무상을 절감하고는 일체 소임을 놓고자 하였다. 봉암사 제2결사를 성취한 도반들은 다시 모여 누구를 주지로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수좌 중에 해야 하는데, 당시 제대로 승적을 갖추고 있는 스님이 법화스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자연스럽게 법화스님을 봉암사 새 주지로 하였다. 법화스님은 1947년 봉암사 결사 당시 한 중심이었던 청담스님의 상좌였다.
법화스님은 봉암사 주지를 맡자 고우스님 등 수좌 도반들과 상의하여 봉암사의 선풍을 진작하기 위해 서옹스님을 조실로 모셨다. 서옹西翁(1912 ~ 2003)스님은 백양사 만암스님의 전법제자로 일찍이 견성도인으로 인가 받은 대선지식이었다.
서옹스님을 조실로 모시자 봉암사에는 선객들이 더 몰려들었다. 서옹스님은 봉암사에서 선풍을 진작하고자 보름에 한 번씩 ‘선어록의 왕’이라 불리는 『임제록臨濟錄』 강설을 하였다. 당대의 대선지식 서옹스님이 봉암사 조실로 주석하며 법문을 하니 봉암사는 참선도량의 면모를 갖춰갔다. 선객들은 날이 갈수록 모여들었다.
이리하여 1970년대 봉암사는 그야말로 수좌들의 천국이 되어갔다. 여전히 가난한 절이지만, 구도의 열정을 가진 본분납자들이 모여들었다. 아직 큰 선방이 없어 전각에서 각자 자율 정진을 하였지만 공양, 운력, 탁발도 각자 소임을 나눠 자율적으로 했다. 쉬는 시간에는 도량 안에서 배구도 하고 축구도 했다. 특히 지유스님은 운동을 좋아했는데, 배구공을 가지고 운동했다. 그런데 조실 서옹스님은 수좌들이 공부하지 않고 공놀이 한다고 못마땅해 했다. 어느 날 서옹스님은 봉암사의 배구공, 축구공에 구멍을 내고는 버려 버렸다. 그 뒤 봉암사는 점점 더 참선도량으로 안정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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