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정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재야 불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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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3 년 2 월 [통권 제118호] / / 작성일23-02-03 10:33 / 조회2,433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26 | 이재열
불화佛化 이재열李在烈(1915~1981)은 보조지눌을 조계종의 종조로 내세운 재야의 불교학자였다. 출가했다가 다시 환속했고, 대학 등 학계에 소속을 갖지 않아서인지 그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년시절과 출가
그의 주저인 『조선불교사의 연구朝鮮佛敎史之硏究 제1』(1946, 동계문화연양사)도 그 존재를 아는 이가 드물다. 이 책은 한국불교의 종파와 법통을 다룬 것으로 지눌을 중심으로 한 조계종을 주류의 위치에 두고 그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 주된 논지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이재병李載丙이었는데 40대 전반인 1958년에 이재열로 개명했다. 1915년에 강원도 양양에서 4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들이 없던 당숙에게 양자로 들어가 유년을 보냈는데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많았다. 훗날 이재열로 개명한 것도 재병의 병이 ‘병病’ 자와 발음이 같아서였다고 한다. 어릴 때 생부에게 한문을 배웠고 11세에 대포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만주로 이주할 생각으로 함경남도 안변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뒤 학업을 계속하여 졸업했다.
1931년에 서울로 올라왔고, 다음해 4월 14일에 18세의 나이로 봉선사에서 출가했다. 이때 대허태오大虛泰旿를 은사로, 운허용하耘虛龍夏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법명을 기환基幻이라고 했다. 이후 1935년 4월까지 3년 동안 봉선사의 강원에서 수학하는 한편 초등과·중등과 교과를 마치고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리고는 봉선사의 지원을 받아 1936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아이치현의 임제종 묘흥선림妙興禪林과 오사카에서 1년간 공부했다. 1937년 귀국 후에는 서울의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했고 개운사에서 박한영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1938년에는 이름을 이석불화李釋佛化로 바꾸고, 1939년 9월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도쿄의 니혼대학 전문부 종교과에 입학하여 일본의 교육제도를 연구했다.
이재열은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오사카에서 일생의 동지이자 지음知音이 된 이종익을 만났다. 이종익은 1933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했고, 1938년에 오사카에 왔다가 다음해 교토에 있는 임제종 전문학교(현재 하나조노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다시 도쿄의 다이쇼대학 불교학과에 편입했다가 1944년 졸업과 함께 귀국했다.
이재열이 두 번째로 일본에 유학을 갔던 도쿄 시절에 두 사람은 함께 자취하며 살았다. 이 시기에 이재열은 니혼대학 종교과에서 배우면서 종교교육의 과제로 「조계종 조사 보조국사의 종교교육에 대해서」를 써서 냈는데, 이 무렵에 보조종조론의 초석이 다져진 것으로 보인다.
불교정화 때 비구 측에 이론 제공
해방 후 1950년대 전반에는 불교 정화의 거센 불길이 일었다. 대처승으로 살다가 환속을 감행한 그는 출가자 출신의 재가자로서 비구 수행자 중심의 청정 불교계를 지지하고 그 길에 동참하고자 했다. 이재열은 재가 거사로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며 불교 개혁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정화 기간에는 비구 측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며 보조종조론을 강하게 피력했다. 그는 종조와 관련된 건의서와 성명서를 종단에 제출하며 종헌의 수정을 계속 요구했고, 그의 노력이 일시적으로 결실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승가나 학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불분명한 정체성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는 점차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이재열은 1981년 3월 19일 세상을 떠났는데, 49재 추도식 때 평생의 동반자였던 이종익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해방 이듬해 11월 즈음에 『조선불교사의 연구』라는 400쪽의 유인물을 발표한 것은 실로 그의 피와 땀의 결정으로서 큰 개척이요 발명이었음을 안목 있는 몇몇 학자들은 확인한 바였습니다. 그 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35년여 동안 부단히 그 과업에 심혈을 쏟아온바 …… 한국학계에서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지만, 그의 학설을 제대로 이해하고 논평할 이조차 매우 적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조계종 보조종조론을 끝까지 고수하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에는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관련한 종단과 종조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일었다. 당시 태고종조론 외에 보조종조론이 나왔고 또 9세기 초에 남종선을 처음 전래한 도의, 지눌이 속한 사굴산문의 개조인 범일도 종조로 거론되었다. 이재열은 태고법통의 사실관계를 일일이 논증하며 그 오류를 밝히려 했고, 조계종사 서술과 보조종조론의 관철에 일이관지했다. 그는 많은 사료들을 활용해서 비판적 논점의 글을 썼지만, 대학 등 학계에 적을 두지 않아서인지 정식 학술지보다는 대중잡지에 싣거나 자비로 책을 출판했다.
1941년 5월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체제가 출범했는데, 이는 조계종의 역사성과 태고법통의 정통성이 결합된 조합이었다. 이때 종조로 올려진 태고보우는 조선 후기 태고법통의 전통적 권위에 의거한 것이었다. 즉 중국 임제종의 법통이 고려 말 태고보우에 의해 전수되어 청허휴정, 부휴선수 등 조선시대로 이어져 왔다는 불교사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태고종조론은 권상로, 김영수 등 일제강점기 때의 대표적 불교학자들이 지지했다. 반면 송광사의 금명보정은 보조종조론을 주장했고, 이능화도 앞서 『조선불교통사』(1918)에서 “조계종은 보조지눌에 의해 처음 세워졌으니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지눌이다.”라고 한 바 있다. 한편 권상로와 방한암은 지눌이나 태고보우 이전에 신라에 선종을 전래해온 도의를 초조로 앞세우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재열은 1942년 「조계종 원류 및 전등사의 근본적 연구」 등에서 도의는 조계종이 성립되기 400년 전이고 태고보우는 조계종이 만들어지고 나서 약 200년 뒤의 인물로서 원에서 임제종 승 석옥청공의 법을 받아왔으므로 조계종의 종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지눌뿐이라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그런데 종헌·종단을 무시하고 500년 동안 신봉해 온 태고 조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고 결국 종단에서 그의 승려 자격을 박탈하고 승적에서 제명했다고 한다.
한편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에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는 기존의 조계종을 폐지하고 임시로 ‘조선불교’라고 칭했다. 이어 1946년 5월에 「조선불교 교헌」이 공포되었는데, 여기서는 원효의 대승행원과 지눌의 정혜겸수를 강조하고 법맥은 태고보우 이하 청허휴정 및 부휴선수를 잇는다는 기존의 법통 인식을 답습했다. 이 시기에 이재열은 교조 추대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고 그간의 연구를 모은 『조선불교사의 연구』를 자비로 출판했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이 책자는 약 5년 전에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출판 허가를 취소당한 것을 개편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동명東明 고등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만주나 일본에서 출판하려고 번역도 해 보았지만, 전쟁으로 중도에 그만두었던 것을 시급히 개편해 보니 내용에 소략한 것이 적지 않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짧은 시일에 수만 원이란 금액을 마련해 출판하게 된 것은 이번 총무원에서 개최되는 제3회 중앙교무회의(1946)에 생각해오던 소감을 참고로 진언하려는 뜻에서였다.”라고 하여 출판의 과정과 목적을 밝혔다. 앞서 출판 허가를 취소당한 때는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가 세워지고 그 법령에서 태고종조설이 채택된 후 이재열이 그에 반박하며 보조종조설을 끝까지 주장해 도첩을 체탈당한 무렵이었다.
『조선불교사의 연구』의 주요 내용
이재열은 『조선불교사의 연구』에서 태고법통설의 오류를 하나하나 논증하고 보조법통설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며, 한국불교의 총본사로 지눌이 개창한 송광사를 지목했다.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편 ‘조선불교사 연구에 대한 관견’은 서언, 조선불교의 개념, 사료의 수집과 선택, 사실사의 연구법, 전등사의 연구법, 고사료 취급법, 결언의 7장으로 되어 있으며, 개념과 방법론 및 사료 비판, 기존 오교양종설과 태고법통에 대한 반박이 주된 내용이다.
제2편 ‘고려 양종오교사의 근본적 연구’는 오교와 구산, 조계종을 다룬 총설에 이어 화엄종, 해동종(분황종), 자은종, 천태종, 그리고 구산의 선종과 조계종 등 고려시대의 여러 종파에 대해 개관했다.
제3편 ‘조계종 전등사의 근본적 연구’는 서언에 이어 조계종의 종지로부터 전등사상 이설과 그 논거까지, 그리고 결언으로서 조계종의 정통성과 종조 보조지눌의 위상을 강조하고 있다. 부록에는 종조와 관련한 방한암의 편지, 교헌 개정안 등이 들어 있다.
1954년 5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불교 정화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대처승이 절대 다수인 상황에서 이재열은 비구 중심의 교단 정화에 찬동하고 보조종조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같은 해 8월과 9월에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서는 ‘불교 조계종 헌장’을 채택했는데, 여기에는 “신라 선종 사굴산파 조사 범일을 원조遠祖로 하고 고려 조계종조 보조 지눌을 종조로 한다.”고 하여 보조종조론을 골자로 하는 종헌 개정안을 수립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처 측의 반발이 있었고 종조 논란이 펼쳐지게 된다. 결국 종정이던 만암이 보조종조설에 대해 조상을 바꾸는 ‘환부역조’라고 비판하며 종정직을 사퇴하여 보조종조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면서 태고종조설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초조 도의, 중흥조 태고보우, 중천조 보조지눌의 복합적 형태로 귀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대에 들어 원종, 임제종, 조계종 등의 종명이 쓰였고, 종조에 대한 여러 주장이 제기되며 역사적 정통성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종조 논의는 크게 보면 전통적 태고법통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보조지눌의 역사적 위상에 주목하는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한국불교 연구의 대표적 학자였던 권상로, 김영수 등은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 태고법통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반면 보조유풍의 계승을 주창한 송광사의 금명보정 이후 이재열과 이종익 등은 조계종과 보조종조설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한층 무르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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