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 길라잡이 ]
절은 왜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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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스님 / 2024 년 2 월 [통권 제130호] / / 작성일24-02-05 14:20 / 조회3,857회 / 댓글0건본문
“힘은 드는데 변화가 생겼어요.”
절은 왜 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한 번이나 세 번이 아닌 108배에서부터 수백 배, 더 나아가 삼천배에 이르기까지.
어느 보살님이 다실에서 함께 차를 마시다가 문득 질문을 한다.
“스님, 절은 왜 해야 하나요? 그것도 많이요. 절을 하다 보면 ‘절하는 이유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 보살님은 일과로써 108배 이상 절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다 보니 힘이 들고, 자연스레 ‘왜 이렇게 절을 많이 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일어났는가 보다. 힘들수록 의미와 이유를 찾게 된다. 그 심리 밑바탕에는 힘든 것은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찾고 싶은 에고적 습성習性이 깔려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절을 시작하니 뭔가 든든하고 그 힘든 걸 하고 있다는 성취감이 있어 좋았던가 보다.

“무슨 변화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확실하게 표현은 못 하겠는데 생활이 전보다는 즐거워진 듯하다고 했다.
그래서 웃으면서 “그런 변화가 절을 하는 이유와 의미가 되지 않겠어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실은 예전에도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느 스님들의 법문을 듣거나 때로 불교 관련 신문 등에 실려 있는 저명한 논설위원이신 어느 분의 글을 보면, ‘절은 지극한 마음을 모아 108배라도 정성껏 하는 것이 중요하지 많은 양의 절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3000배의 경우에 엎드렸다 일어서는 동작이 반복되면 그 동작 자체가 힘이 들어서 나중엔 마음조차 제대로 담지 못한 채 정해 놓은 숫자 채우기에 급급해질 뿐이라면서, 그렇게 되면 그것은 부질없는 고행苦行일 뿐이라고 합니다. 절 수행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림사에서는 ‘절’에 대해 어떤 뜻을 가지고 실천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수행으로서의 절, 양量보다 질質
‘불기자심不欺自心’, 성철 큰스님께서 강조하신 이 구절을 나는 종종 되새기곤 한다. 그 의미를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라.”라기보다는 “자기 마음에 속지 말라.”고 풀어내고 있다. 우리는 단지 윤리적으로 잘 살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속고 싶어 속겠는가. 몰라서 혹은 잘못 알아서 속는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좋을 땐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궁색할 땐 오만 가지 하지 않을 핑계거리를 찾는 것이 마음이다. “정성을 모아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지만, 어디 정성을 모으고 싶다고 마음먹는다고 정성이 제대로 모아지는가? 때론 감정에 속아 모아졌다고 여기지만, 그 정성이 얼마만큼 유지되던가? 이것은 제대로 모아진 게 아니다.
절을 많이 해야 하는 이유는 참으로 간단하다. 초심자일수록 양量을 많이 해야 한다. 많이 해야 질質이 확보된다. 많이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맞다. 하지만 많이 해야 한다. 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질이다.
무엇보다 절을 하는 나 자신의 마음이 산만한 상태가 아닌 차분하게 집중된 마음의 흐름이어야 한다. 그 상태는 감정에 의한 문제가 아니다. 실제 존재의 상태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기적인 에고의 습기가 자신으로 하여금 감정의 조작을 일으킨다. 잠시 동안. 그리고는 속는다. ‘정성 들여 여법하게 자세를 취하면서 하는 게 중요하지…’라고 마음 먹고 조금만 하다 보면, 그 정성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온갖 하지 않으려는 구실을 찾는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된다. 절을 많이 하다 보면….
그 이기적인 에고의 습성과 맞닥뜨려야만 한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자기 수행修行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고 힘든 것을 피하려는 에고의 습기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슬러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 내가 배우고 이해한 스승의 가르침을 지침指針 삼아 보다 높은 의식의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즉, 질을 확보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에고Ego를 내려놓는 일
‘하심下心’, 해인사 행자시절, 행자실 중앙에 액자로 크게 걸려 있던, 행자들에게 무척이나 강조되었던 문구이다. 상하관계가 군대보다 더 엄격했던 행자실 분위기에서, 고참에 해당되는 상행자의 이해되지 않는 지시와 방식 때문에 속앓이를 할 때마다 ‘나를 낮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하고 하심에 대해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왜 나를 낮추어야 하는 걸까? 성철 큰스님의 법문 중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자
(…)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貪·진嗔·치癡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 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근본이냐 하면 탐욕貪慾이다.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이다. 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된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 살자 하는 데에서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눈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이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 깨나 ‘나’뿐인데, 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 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기준을 ‘남’을 위해 사는 데에 두는 것이다. (…)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나’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서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 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 그러니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 『자기를 바로 봅시다』(성철 저/장경각/148쪽).
성철 큰스님의 말씀처럼 ‘자기 위주로 살아왔던 삶’을 거꾸로 ‘남을 위한 삶’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하나의 큰 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지 못한 삶의 습성을, 어찌 단번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바꾸어 나갈 수 있겠는가?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성철 큰스님께서는 절을 많이 하는 것이라고 제시해 주고 있다.
‘나’를 낮춘다는 것은 단지 몸을 낮추는 게 아니라, 에고를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내 안에 있는 ‘나라는 이기심利己心, 즉 에고를 없앤다면 탐욕이 사라지고 자신이 편안해질 수 있다.

‘절’은 대상 앞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행위이다. 보통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스승 앞에서 자신을 낮추라고 한다면 낮추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배타적인 종교인라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처음 시작은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으로부터 하라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절을 하다 보면 출가자인 스님들에게도 할 수 있고, 나중에는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에게도 스스럼없이 절을 할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절을 할 수 있게 된다.
내 안의 ‘에고’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이것이 절을 해야 하는 진짜 이유이고 의미일 것이다. 내 안의 오만한 ‘나’, 이기적인 ‘나’를 꺾고 ‘참 나’를 찾기 위해서라도 ‘절 수행’은 기본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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