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이야기]
임제의현의 생애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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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3 년 2 월 [통권 제118호] / / 작성일23-02-03 14:39 / 조회6,077회 / 댓글0건본문
중국선 이야기 26 | 임제종 ①
조사선의 ‘오가五家’ 가운데 두 번째로 성립한 종宗은 바로 임제종이다. 임제종은 후대에 양기파楊岐派와 황룡파黃龍派로 분화되면서 ‘오가칠종五家七宗’의 명칭이 성립하는 원인이 되었다. 임제종은 오가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그 법맥이 계승되고 있다. 특히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를 찬술한 이능화李能和는 중편에 「조선 선종 임제적파朝鮮禪宗臨濟嫡派」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선종은 모두 임제 계통임을 논증하고 있다.(주1) 따라서 임제종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선종에서도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고 하겠다.
오역문뢰의 임제선
임제종의 가풍에 대하여 후대에 양기파를 세운 오조법연五祖法演에게 어떤 승려가 “무엇이 임제 문하의 일입니까?”라고 묻자 법연은 “오역문뢰五逆聞雷”라고 대답했다.(주2) 여기에서 ‘오역’이란 ‘오역죄五逆罪’를 가리키며, 불교에서 가장 커다란 중죄로 여기는 살부殺父·살모殺母·살아라한殺阿羅漢·파화합승破和合僧·출불신혈出佛身血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이러한 오역죄를 지으면 명命을 마친 후에 악취惡趣 가운데 태어난다고 하고,(주3) 또 “죄악을 많이 지은 자는 벼락이 내리쳐 죽으니, 그 과보果報를 받음을 볼 수 있다.”(주4)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역문뢰는 선리禪理를 깨우치지 못한 자가 임제선을 만난다면, 오역죄를 지은 자가 마치 벼락이 내리치는 소리를 듣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는 임제종이 망집妄執을 타파하는 데 상당히 과격한 제접법을 설시設施한다는 의미라 하겠다.
임제의현의 출가와 제방의 유행
임제종은 남악계南岳系의 마조도일馬祖道一―백장회해百丈懷海―황벽희운黃檗希運을 계승한 임제의현臨濟義玄(?~867)에 의하여 세워졌다. 임제종의 종풍은 대부분 종조인 의현의 선사상으로부터 출현하고 있어 무엇보다도 임제의 생애와 선사상을 먼저 살펴보아야 임제종의 참다운 모습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의현의 전기는 송대 『경덕전등록』 권12, 『송고승전』 권12, 『전법정종기』 권7, 『조당집』 권19 등 후대에 편찬된 전등사서傳燈史書에 모두 실려 있으며, 『고존숙어록』 권5에는 풍혈연소風穴延沼가 찬술한 『임제혜조선사탑기臨濟慧照禪師塔記』가 실려 있다. 그러나 그의 구체적인 출생연도와 출가 시기 등을 추론할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조주曹州 남화南華(현 산동성山東省 하택시菏澤市) 출신이고, 속성俗姓이 형邢 씨라는 것은 모든 자료가 일치한다.
『임제혜조선사탑기』에는 어려서 남달랐고,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하였다고 한다.(주5)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이후에는 강사講肆(講院)에 머물면서 비니毘尼(律)를 정밀하게 탐구했는데, 갑자기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는 세상을 구할 의방醫方이지만,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종지宗旨는 아니다.”라고 하며 옷을 바꾸어 입고 제방을 유행하였다고 한다.(주6) 이로부터 의현은 출가 이후 먼저 계율을 연구하다가 당시 유행하던 남종선南宗禪을 수학하고자 제방을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경덕전등록』과 『조당집』에 나타난 깨달음의 기연
『임제혜조선사탑기』에는 “먼저 황벽黃檗을 참알하였고, 다음에 대우大愚를 참알하였다.”(주7)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의현의 깨달음을 얻은 순서를 말한 것이라 하겠는데, 제방을 유행하면서 다양한 선사들을 만나본 이후에 황벽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경덕전등록』 권12에 실린 전기에는 황벽에게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라고 물었다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기를 세 차례 겪고 난 후, 황벽에게 하직 인사를 하자 대우大愚에게 찾아가라고 권하여 대우의 처소로 찾아갔다. 대우가 어째서 왔는가를 묻자 세 차례 몽둥이로 맞은 일을 고하자, 대우는 “황벽이 그렇게 그대를 위해 노파심으로 애를 썼는데 아직도 허물을 찾고 있는가?”라고 했다. 그 말에 의현은 크게 깨닫고 “불법에도 다른 것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우가 의현의 옷깃을 잡고, “금방 나는 모르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또 다른 것이 없다고 하는구나. 얼마나 알고 얼마나 알았는가?”라고 힐난했다. 의현이 대우의 갈비뼈 밑을 주먹으로 한 대 때리니 대우가 놓으면서 “너의 스승은 황벽이니 나와는 상관이 없다.”라고 하였다.(주8) 이후 다시 황벽의 처소로 돌아와 황벽을 한 대 때린 일은 상당히 잘 알려져 있다.
사진 2. <조당집>. 사진: 불교학술원.
이것이 의현이 깨달음을 얻게 된 기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당집』의 전기에서는 그와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그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황벽이 설법 가운데 대우를 언급하면서 “나중에 영리한 사람을 만나면 나를 찾도록 지시해 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의현이 그를 듣고 대우를 찾아가 『유가론瑜伽論』을 언급하며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대우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자 대우는 “노승이 홀로 산에 집을 짓고 살고 있어 그대가 멀리서 온 것을 생각하여 하룻밤 묵어가게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어젯밤에 내 앞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깨끗하지 못한 것을 쏟아냈는가?”라고 하며 몽둥이로 몇 차례 때리고 문을 닫아버렸다.(주9)
의현은 황벽에게 돌아와 그 일을 말하자 헛되게 다녀온 것을 꾸짖었고, 의현은 다시 대우에게 가자 다시 몽둥이로 때리고 문밖으로 밀어내었다. 의현은 다시 황벽의 처소로 돌아왔다가 열흘 후에 다시 대우를 찾아가니, 대우가 몽둥이를 들어 때리려고 하자 의현이 몽둥이를 빼앗고 대우를 껴안고 쓰러져 그의 등을 주먹으로 여러 차례 때렸다. 마침내 대우가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홀로 산에 집을 짓고 살면서 일생을 헛되이 보냈다고 했는데, 뜻밖에 오늘 한 아들을 얻었구나.”(주10)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의현은 10여 년 동안 대우를 시봉하였고, 임종하면서 “그대는 스스로 평생平生을 저버리지 않았고, 또 나의 임종을 지켜 주는구나. 뒷날 세상에 나가 마음을 전하게 되거든 무엇보다 황벽黃蘗을 잊지 말라.”(주11) 라고 하였다.
따라서 의현의 깨달음에 대한 기연은 『조당집』과 『경덕전등록』이 서로 차이가 난다. 『조당집』은 952년에 간행되었고, 『경덕전등록』은 1004년에 간행된 것이기 때문에 『조당집』의 기사가 더 빠르다고 하겠다. 그러나 의현의 제자인 삼성혜연三聖慧然(?~?)이 편집하고 흥화존장興化存奘(830~888)이 교감한(주12) 『임제어록臨濟語錄』에 실린 『행록行錄』에는 『경덕전등록』의 전기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고,(주13) 『임제어록』에는 “내가 20년 전에 황벽선사의 처소에서 세 번 불법의 대의를 묻다가 세 번 몽둥이로 맞았다.”(주14)라는 기사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경덕전등록』의 기사는 당대唐代에 만들어진 『임제어록』에서 연원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CBETA에 실려 있는 『임제어록』은 영향永享 9년(1437)에 편찬된 판본(주15)으로 표기하고 있어 오히려 출판 연도가 가장 늦다.
사진 3. 임제사 전경.
이를 통하여 의현은 황벽과 대우 두 선사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황벽의 사법嗣法임을 알 수 있다. 의현이 깨달음을 얻은 이후 황벽의 처소로 돌아와 황벽의 깊은 신임을 얻자 황벽은 의현에게 말하기를, “나의 종宗이 너에 이르러 세상에 크게 흥하겠구나!”(주16)라고 하였다.
임제원의 주석과 입적
황벽의 인가를 얻은 후에 의현은 진주鎭州(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정정시正定市) 동남 호타하滹沱河 변상의 작은 선원인 임제원臨濟院에 오래도록 주석하였기 때문에 임제臨濟라고 칭하였다.(주17) 그 당시 수많은 학인을 제접하여 일가의 종풍宗風을 이루었다. 후에 대명부大名府(현 하북성河北省 감단시邯鄲市 대명현大名縣)의 흥화사興化寺에 주석하다가 어느 날 질환이 없이 의복을 수습하고 선좌禪坐에 기대어 입적하였다. 입적 시기는 대부분 자료에서는 함통咸通 7년(866)(주18)이라고 하지만 『임제혜조선사탑기』에서는 함통 8년(867)(주19)이라고 한다. 시호諡號는 ‘혜조선사慧照禪師’라고 하고, 탑의 명칭은 ‘징령澄靈’이라고 하였다.
『경덕전등록』에는 임종에 앞서 설했다는 다음과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싣고 있다.
沿流不止問如何 흐름을 따라 그치지 않음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眞照無邊說似他 참된 비춤은 끝이 없다고 그에게 말하리라.
離相離名如不稟 상相을 떠나고 이름도 떠나 받지 않음과 같으니
吹毛用了急須磨(주20) 취모검吹毛劒을 다 썼다면 급히 갈아 두어라.
『경덕전등록』에서는 임제의현의 법사法嗣를 22인을 거명하고 있고,(주21) 『전법정종기』에서는 24인을 들고 있고,(주22) 『조당집』에는 2인을 언급하고(주23) 그 전기를 싣고 있다. 이러한 제자들은 모두 뛰어나지만, 그 가운데 흥화존장이 후세에 대한 영향이 가장 크며, 임제종의 법맥은 모두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사진 4. 임제사 징령탑.
임제의현의 선법이 출중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제자들이 전승되어 임제종이 현재에까지 계승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를 이어 임제삼구臨濟三句, 무위진인無位眞人 등의 선사상과 가불매조呵佛罵祖의 선풍, 그리고 학인의 제접提接에 상용되는 임제할臨濟喝, 방할제시棒喝齊施, 삼현삼요三玄三要, 사빈주四賓主, 사료간四料簡, 사조용四照用 등과 임제종의 종풍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고찰하기로 하겠다.
<각주>
(주1) 조선불교통사역주편찬위원회, 『역주 조선불교통사』 3(동국대학교 출판부, 2010), pp.487-897 참조.
(주2) [宋]才良等編, 『法演禪師語錄』 卷上(大正藏47, 655c), “僧問: 如何是臨濟下事? 師云: 五逆聞雷.”
(주3) [東晉]僧伽提婆譯, 『增壹阿含經』 卷5(大正藏2, 567a), “作五逆罪已, 身壞命終, 生惡趣中.”
(주4) [唐]道世撰, 『法苑珠林』 卷4(『大正藏』53, 298b), “有罪惡多者, 霹靂而死, 見受報也.”
(주5) 『臨濟慧照禪師塔記』, [宋]頥藏主集, 『古尊宿語錄』 卷5(卍續藏68, 35a), “幼而穎異, 長以孝聞.”
(주6) 앞의 책, “及落髮受具, 居於講肆, 精究毗尼, 愽賾經論. 俄而歎曰: 此濟世之醫方也, 非教外別傳之旨. 即更衣游方.”
7) 앞의 책, “首參黃檗, 次謁大愚.”
8)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12(大正藏51, 290a), “師遂參大愚. 愚問曰: 什麽處來? 曰: 黃蘗來. 愚曰: 黃蘗有何言敎? 曰: 義玄親問西來的的意, 蒙和尙便打. 如是三問三轉被打. 不知過在什麽處? 愚曰: 黃蘗恁麽老婆, 爲汝得徹困, 猶覓過在. 師於是大悟云: 佛法也無多子. 愚乃搊師衣領云: 適來道我不會, 而今又道無多子. 是多少來是多少來? 師向愚肋下打一拳. 愚托開云: 汝師黃蘗, 非干我事.”
9) 靜筠編著, 『祖堂集』 卷19(大藏經補編25, 661b), “老僧獨居山舍, 念子遠來, 且延一宿, 何故夜間於吾前無羞慚, 放不淨? 言訖, 杖之數下推出, 關卻門.”
10) 앞의 책, “吾獨居山舍, 將謂空過一生, 不期今日卻得一子.”
11) 앞의 책(大藏經補編25, 662a), “子自不負平生, 又乃終吾一世, 已後出世傳心, 第一莫忘黃蘗.”
12)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506c), “住大名府興化嗣法小師存奬校勘”
13)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504c).
14)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496c), “我二十年在黃蘗禪師處, 三度問佛法的大意, 三度蒙他賜杖.”
15) 앞의 책(大正藏47, 506c), “永享九年八月十五日板在法性寺東經所.”
16)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12(大正藏51, 290c), “吾宗到汝, 大興於世.”
17) 『臨濟慧照禪師塔記』, [宋]頥藏主集, 『古尊宿語錄』 卷5(卍續藏68, 35a), “旣受黃檗印可, 尋抵河北鎭州城東南隅臨滹沱河側小院住持, 其臨濟因地得名.”
18)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506c), “師無疾, 忽一日攝衣據坐, 與三聖問答畢, 寂然而逝, 時唐咸通八年丁亥孟陬月十日也.”
19) 『臨濟慧照禪師塔記』, [宋]頥藏主集, 『古尊宿語錄』 卷5(卍續藏68, 35a), “時唐咸通八年丁亥孟陬月十日也.”
20)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12(大正藏51, 291a).
21)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12(大正藏51, 289b), “鎭州臨濟義玄禪師法嗣二十二人: 鄂州灌谿志閑禪師, 幽州譚空和尙, 鎭州寶壽沼和尙, 鎭州三聖慧然禪師, 魏府大覺禪師, 魏府興化存奬禪師, 定州善崔禪師, 鎭州萬歲和尙, 雲山和尙, 桐峯菴主, 杉洋菴主, 涿州級衣和尙, 虎谿菴主, 覆盆菴主, 襄州歷村和尙, 滄州米倉和尙(已上一十六人見錄), 齊聳大師, 涿州秀禪師, 浙西善權徹禪師, 金沙禪師, 允誠禪師, 新羅國智異山和尙(已上六人無機緣語句不錄).”
22) [宋]契嵩編, 『傳法正宗記』 卷7(大正藏51, 754a), “其所出法嗣凡二十四人. …… 一曰魏府大覺者, 一曰定上座者, 一曰奯上座者.” *『景德傳燈錄』의 法嗣 22인 가운데 “魏府大覺禪師”가 제외되고, 위의 3인이 추가되었다.
23) 靜 筠編著, 『祖堂集』 卷1(大藏經補編25, 302a), “臨濟下出寶壽和尙,灌溪和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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