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안변 석왕사에서 보낸 수행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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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3 년 3 월 [통권 제119호] / / 작성일23-03-03 10:35 / 조회2,427회 / 댓글0건본문
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7 |인환스님 ③
▶ 원산 부근에는 유명한 사찰이 어떤 것이 있었나요?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의 불교계에는 31개의 본산本山이 있었지요. 삼팔선 이북에는 그런 본산이 아마 일곱 개 정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 가운데 하나가 안변 석왕사釋王寺라고 하는 곳입니다. 원산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 쯤 걸리는데, 설봉산雪峯山 석왕사입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젊어서 대망을 품고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다지요. 명산대찰을 찾아서 기도도 하고 심신을 단련했어요.
이성계와 안변 석왕사 창건 설화
남해南海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 가서도 열심히 기도했지요. 소원을 빌 때에 “나의 그 원願이 이루어지면, 그때는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은혜를 갚겠습니다.”고 했어요. 나중에 조선을 개국한 후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는데 주변 대신들이 온 나라의 힘이라도 그 산을 비단으로 덮지 못한다며 산 이름을 비단 ‘금’자를 붙여 ‘금산錦山’이라고 하면 산 전체가 그대로 ‘비단산’이 된다고 건의했지요. 그래서 금산 보리암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성계는 또 원산 안변에까지 왔었는데, 안변에서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잘 곳을 찾다가 마침 정자가 있어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어요. 한참을 자다가 비몽사몽간에 갑자기 정자가 무너지면서 기둥 셋이 자기 몸을 덮쳤어요. 깜짝 놀라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아주 생시처럼 너무너무 분명해요. 좋은 꿈인가, 흉한 꿈인가 알 수 없었어요. 마침 산속 토굴에 유명한 도사 스님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어요. 그 꿈 얘기를 했더니 그 도사께서 “앞으로 누구에게도 이 꿈 얘기를 하지 마시오. 사람이 가로누웠는데 기둥 셋이 덮쳤다는 것은 곧 임금 왕王자가 되니, 그대가 장차 나라의 왕이 될 수 있다는 꿈이오.”라고 했어요.
그분이 유명한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입니다. 이 인연으로 이성계는 대사를 왕사로 극진히 모셨고, 바로 그 자리에 석왕사를 창건하였지요. 지금도 석왕사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쭉 내려오다가 S자로 돌아가는 곳에 돌다리가 있고, 그 위에 누각 문이 있어요. 누각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것으로 기억하는데 ‘단속문斷俗門’이라는 아주 잘 쓴 현판이 걸려 있어요. 세속의 모든 걸 끊고 여기서부터 참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부터 한 7리 쭉 올라가는데, 야트막하게 걷기 좋은 길입니다. 그 중간쯤에 약수가 나와요. 아주 유명했습니다.
▶ 당시 석왕사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기억하시군요?
그 약수터에는 비바람 피할 수 있는 간단한 건축물이 있고, 거기 들어가서 맘대로 두레박 같은 걸로 우물물 푸듯이 마셨어요. 그 주변은 약수에 철분이 많아 붉게 물들었지요. 설악산에 오색약수五色藥水 있잖아요. 규모는 석왕사 약수보다 훨씬 작지만은 조건은 비슷해요. 한 바가지 마시면 그야말로 설탕 안 친 사이다 맛입니다. 단속문에서 조금 내려가면 절 밑 동네, 사하촌이 있었어요. 서울에서 원산 왕래하는 경원선이 있었는데 경원선 중 가장 높은 지역을 삼방이라고 하는데 그 곳의 약수가 또 유명했어요 ‘삼방약수三防藥水’라고 하는데 물이 좋아 서울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지요.
그래서 사하촌에는 여관들도 많았어요. 중학교 때 근로봉사 가면 이곳 여관에서 여러 날 유숙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나이 들어서 소화가 안 되고 할 때 두서너 달씩 여기에 가셨어요. 나도 어머니 따라갔지요. 삼방약수는 석왕사 약수보다도 조금 더 독해요. 조금 더 올라가면 석왕사에 당도합니다. 지금 해인사라든지 통도사, 송광사 이런 대본산에 비교해도 규모나 전각, 경치 이런 게 전혀 손색이 없어요. 대웅전도 상당히 크고 여러 전각이 있는 가운데 지금도 내가 기억에 남는 곳은 나한전羅漢殿입니다.
석왕사 나한전(응진전)에 대한 기억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과 마주치는 왼쪽에 있는데, 오백나한을 모셨어요. 내가 처음에 갔을 때 어느 스님이 설명을 해 줬어요. 이성계가 석왕사를 건립할 당시 그때는 이미 왕의 자리를 이방원 태종에게 넘겨준 다음이에요. 오백나한을 모시겠다고 원을 세웠지요. 절 북쪽에 옥이 나오는 유명한 산이 있는데 이름은 잊었어요. 오백나한을 그 현지에서 조성해서는 배로 안변 가까운 해안까지 옮겼다가 절까지는 육로로 옮겨가는 데 다른 사람 안 시키고 본인이 직접 한 분, 한 분 등에 업어서 옮겼다는 거예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렇게 정성을 들였단 얘기지요. 그렇게 매일 그렇게 했는데 오백나한이니까 5백일을 했다는 얘기 아니요?
▶ 나한전 건축 연기설화가 재미있군요?
그렇게 마지막에 두 분 남았어요. 두 번을 더 갔다 와야 되는데, 이제 마지막이니 두 분을 한꺼번에 업고 옮겼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그 마지막 나한님 한 분이 “나를 하나 취급을 제대로 안 하고 남이 가는 데 덤으로 그렇게 했으니 기분 나쁘다. 있을 수가 없다.” 그러더니 어딘가로 가 버렸어요. 내가 갔을 때까지 그 한 자리가 비어 있어요. 어려서 아주 참 감명 깊게 들었어요.
일제강점기 선방 스님들의 이동
다시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지요. 해방되기 7, 8개월 전 언제 폭격이 올지 모르니 원산 시민을 모두 이주시켰어요. 우리 가족이 모두 소개疏開해 간 곳이 석왕사 아래예요. 단속문 근처에 큰 집을 구해서 우리 집하고, 또 한 집하고, 두 집이 함께 지냈어요. 해방될 때까지 거기서 살았어요. 그래서 석왕사에 자주 갔던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석씨 출신의 성인 부처님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왕 중의 왕이시다. 그래서 석왕사라고 했다는 거예요. 경기도 부천에도 석왕사가 있는데 안변 석왕사가 원조이지요. 지금은 분단돼 있지만 앞으로 남북교류가 이루어지고 다시 원조 석왕사를 찾을 수 있는 인연을 짓기 위해서 그런 뜻으로 석왕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불교를 몰랐어요. 그저 좋아 다니고, 경치 좋고, 길 좋고, 공기 좋고, 물 좋고 그래서 다녔지요. 석왕사에 선방禪房이 있었어요. 그때는 대처승帶妻僧들이 대부분 주지를 하고 있었어요. 걸망 짊어지고 선방에서 참선 정진하는 스님네들은 한 5백 명 정도 됐다고 그럽니다. 그 적은 숫자의 스님네들이 걸림 없고 자유롭게 선지식들 찾고 그러는데, 여름이 되기 앞서 하안거 결제에는 스님네들이 북쪽으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그럼 북쪽으로 가면 어디냐면 석왕사 선방이나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 선방에 많이 갔어요. 또 겨울 결제는 남한에 와서 대구 팔공산이라든지 지리산 이런데 선방에 가기도 했지요.
▶ 그 얘기들을 부산 선암사에서 들으셨군요?
대중교통이 있기야 있지만 주로 걸어서 다녔어요. 그때 그 중간되는 금강산에는 반드시 꼭 들려요. 워낙 경치도 좋고 절이 많았어요. 대표적인 사찰인 4대 사찰이 유점사楡岾寺, 장안사長安寺, 신계사神溪寺, 표훈사表訓寺이렇게 네 개가 있단 말이요. 그 6·25전쟁 때 세 절은 다 폐허가 되었고, 표훈사만 예전 건물이 그대로 있어요.
표훈사 주지를 지낸 스승 원허스님
그 표훈사 주지를 오래하신 분이 우리 은사스님인 원허圓虛 스님이에요. 그 어른은 1898년생으로 알고 있는데 스무 살 때 출가를 해서 금강산에서 가장 유명한 선지식인 관허貫虛 스님께 배웠어요. 나에게는 노스님에 해당되는 분이지요. 그 스님 밑에 들어가서 상좌가 되었는데, 젊었을 때는 석왕사 강원에 가서 일념으로 경전 공부를 하시고 돌아와서 표훈사 산내 암자로 그 유명한 마하연 선방에서 수행하셨어요.
서른여덟인가, 젊은 나이에 인정을 받아 관허스님의 명으로 표훈사 주지를 하셨어요. 금강산 생활이 한 40년 쯤 되고, 표훈사 주지만 해도 근 20년 가까이 하셨지요. 그 당시에 거기를 왔다 갔다 하던 스님들이 향곡스님, 월산스님, 또 서옹스님, 해인사 지월스님, 홍경스님, 성철스님, 무불스님 등 이런 아주 쟁쟁한 선지식들이었어요. 내가 60년 전에 부산에서 출가한 선암사仙岩寺 소림선방少林禪房에서 이분들을 모두 뵈었지요. 내가 행자로 있다가 계를 받아서 5년 동안 선방에서 열심히 정진할 때 그 어른들을 같이 모셨어요.
▶ 근·현대의 선지식들 모두 뵈었군요?
다담茶談 시간이나 쉬는 시간, 또 방아 찧을 때, 그때는 떡방아고 고추방아고 메주방아고 전부 다 밟아 가지고 했어요. 정진하던 스님네들이 오후 네 시에 ‘딱! 딱!’ 방선放禪 죽비를 치면 원주院主가 울력 목탁을 두 번 쳐요. 스님네들이 큰 방에서 나와 가지고 그 방아 있는 데 모여요. 방아공이가 둘이서도 안 올라가요. 네 사람이 붙어야 올라간단 말이요. 교대해야 되니까요. 그때에는 스님네들이 주변에 다 모이지요. 여기서 뭐 재미있는 얘기가 나오고 왁자지껄하고 그래요. 젊었을 때 경험한 얘기들이 아주 재미있었어요. 나는 방아공이가 올라가면 착 뒤집고~ 이런 일을 하면서 그 얘기를 듣는데 참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어요.
지금도 기억에 남고 참으로 고마운 어른이 바로 표훈사 주지하시던 원허스님입니다. 수좌스님들이 금강산에 가면 숙소는 마하연이지요. 선방이니까 거기 가서 한 철, 두 철 공부 안 한 사람은 그냥 요샛말로 ‘그건 간첩이다’하는 식이었어요. 오가는 수좌들은 반드시 표훈사 주지인 원허스님에게 인사를 간답니다. 그러면 이 노장님이 대부분이 대처승인 현실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참선 수행자들에게 적지 않은 차비를 꼭 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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