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로서 본분도리를 다하는 큰스님 상좌로 2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불면석 그늘 아래 ]
수행자로서 본분도리를 다하는 큰스님 상좌로 2


페이지 정보

원소스님  /  2024 년 9 월 [통권 제137호]  /     /  작성일24-09-05 11:21  /   조회1,118회  /   댓글0건

본문

지난 호에 이어 소납이 성철스님을 모시면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를 이어 나갑니다. 큰스님께서는 성직자는 재물과 여색에 대하여 초연해야 한다, 윤리적으로 깨끗하지 않으면 성직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성철스님은 이미 경계를 뛰어넘은 도인이셨지만 후학들을 위하여 항상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젊은 보살들이 삼천배를 하러 오거나 젊은 비구니 스님들이 친견하러 오면 절대 혼자서는 오지 못하게 하고 두 명 이상 짝을 지어 오게 했다. 만약 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백련암에 들어올 수 없게 했다.(주1)

 

사진 1. 성철스님의 상좌로서의 본분도리를 다하길 서원하는 원소스님.

 

『초발심자경문』과 『율장』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수행자의 방에 젊은 여성 신도나 이성異性의 수행자가 출입하는 것은 부처님 당시부터 엄격히 규제하고 있습니다. 성철스님도 이 규칙에 충실하셨으며, 한여름철에 큰스님 방문이 열려 있는데 어쩌다가 무심결에 젊은 보살이나 젊은 비구니 스님들이 큰스님 방에 혼자서 들어오면 잘못되었다고 훈계하시고 상좌들이 생활하는 큰방으로 건너와서 면담을 하셨습니다. 사람은 정情의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 자주 만나다 보면 남녀노소와 승속을 가릴 것 없이 사고가 생기기 쉽습니다.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윤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볶아 지길래!! 얼카 지길래!

 

백련암에 살면서 큰스님께 세 번 혼난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비군 동원훈련을 받기 위해 합천부대에 갔다 와서 피곤해서 아침예불을 한 번 빠진 일이고, 그 다음은 전날 울력을 많이 해서 예불을 두 번 빠졌다가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에 대한 신심信心이 없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습니다.

 

사진 2. 원당암에서 혜암스님을 친견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군불에 관한 것입니다. 겨울에는 큰스님 방의 온도를 섭씨 20도로 맞춰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싸락눈이 내리고 매섭게 추운 날이어서 평소에 아궁이에 넣는 장작보다 몇 개 더 넣어서 따뜻하게 주무시라고 군불을 지폈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 호출을 당해서 큰스님 앞에 갔더니, “야! 이노무 새끼야, 볶아 지길래!” 하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 다음 날은 주눅이 들어서 장작을 적게 넣었는데 또 호출을 당해 갔더니 이번에는 정반대로 냉방이 되어서 “야! 이노무 새끼야, 얼카 지길래!” 하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이렇게 몇 번 꾸지람을 듣다 보니, 나중에는 장작불로 방 온도를 맞추는 데는 도사가 되었습니다. 

 

큰스님은 상좌들에게 칭찬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꾸지람을 듣지 않으면 그것이 칭찬인 줄 알아야 합니다. 큰스님은 공부뿐 아니라 모든 일상생활 일체를 공부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매사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성심성의껏 할 것을 늘 강조하신 것 같습니다.

 

수행자 모습 그대로인 큰스님

 

성철스님은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고 철저히 은둔하며 수행하는 토굴납자土窟衲子에 가까웠습니다. 백련암에 살 때 하루는 큰스님께서 “야 키달아! 내가 공부 마치고 나서 세상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는데, 한국불교를 항상 걱정하던 도반인 청담스님과 자운스님이 생각나서 결심을 멈췄지.”라고 하시는 비화祕話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깨닫고 나서 바로 열반에 드시려고 했는데 천신들이 사바세계 중생들을 불쌍히 여겨 제도해 주셔야 한다고 간청을 하자 그 결심을 멈추신 경전의 내용과 같이, 깨달으면 정신적으로 대변환이 올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 3. 1994년 2월 13일 봉암사 선원에서 조실 서암스님을 모시고(왼쪽부터 관성, 일수, 조실 서암스님, 월우스님과 필자).

 

큰스님께서 평생을 통하여 은둔하며 사신 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타고난 천성天性인 것 같습니다. 종단이나 본사의 중요한 업무가 발생했을 때나 소임자 스님들을 만나셨고, 공부를 점검받으러 오는 스님들이나 신도 외에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극히 자제하셨습니다. 권력자나 재벌가의 유명 인사들이 큰스님과 인연을 맺으려고 무척 노력을 많이 했지만 큰스님께서는 그들을 교화의 대상으로만 보셨지 그들의 후광이나 득을 볼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1977년 구마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해인사를 참배했을 때도 백련암에서 칩거하며 마중하지 않은 일과 5공화국 때 각 종교 원로들에게 국정자문위원을 억지로 떠맡겼을 때 대통령이 비서를 보내서 청와대에 직접 초청을 해도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스님께서 오만해서가 아니라 종교인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인생관이 확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성철스님의 법력法力이기도 합니다.

 

사진 4. 1995년 1월 8일 해인사선원 용맹정진을 마치고 남산 제1봉을 등반한 도반들과 함께.

 

성철스님이 정치인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는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애국애족과 민주주의를 부르짖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국가와 국민이야 어떻게 되든 오로지 사리사욕만 채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 인구는 많고 자원은 별로 없어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국민들에게 우리도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5천 년 가난을 물리친 대통령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습니다.

 

법보시를 통해 끊임없는 대중교화를 하신 큰스님

 

5공화국 때 진보 좌파 인사들은 성철스님이 로마 교황이나 김수환 추기경처럼 대중 앞에 나서서 소신을 밝히지 않고 산속에서 칩거만 한다고 비판하는 소리도 많았지만, 그것은 큰스님의 타고난 기질에 의한 것일 뿐 성철스님께서 대중교화를 멈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세계적인 불교학자였던 일본의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는 종교지도자에는 두 가지 스타일이 있는데, 철저히 은둔하며 사는 수행자와 반대로 대중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는 유형으로, 그것은 각자 타고난 기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불타의 세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사진 5. 삼정사를 찾은 고향 친구들과 함께.

 

종교인으로서 사람들의 숭앙을 한 몸에 모으고 있는 인물에는 두 가지 형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다스리는 데 지극히 엄격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은 채 수도에만 전념하여 무엇인가 신비로운 위엄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형이다. 또 하나는 자기를 다스리는 데에도 물론 엄격하지만,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 그 속에서 스며나오는 가르침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심어가는 형이다.(주2)

 

철저히 은둔하고 무소유로 사시던 성철스님께서 사부대중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깨달음의 길로 그들을 이끌어 주시던 법문이었습니다. 법보시法布施 또는 법공양法供養이라고도 하는데, 성철스님께선 평생을 통하여 법보시에 절대로 소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진 6. 1994년 10월 7일, 성철선사상연구원 주최 <성철스님의 생애와 사상> 학술세미나에서 사회를 보는 모습. 

 

큰스님께서는 열반 이후에도 승속을 막론하고 깨닫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지침으로 삼을 수 있도록 원택스님으로 하여금 도서출판 장경각을 설립하게 하고 책을 출판하도록 하셨습니다. 『선림고경총서』 37권은 중국과 한국 선사들의 선어록이고, 『선문정로』, 『본지풍광』, 『백일법문』, 『돈황본 육조단경』, 『신심명 증도가 강설』, 『자기를 바로 봅사다』 등 11권은 성철스님의 법문 모음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에 “세 가지 보시가 있는데, 법보시法布施, 재물보시財物布施, 무외시無畏施 중에 최상의 보시는 법보시”라고 하셨습니다. 성철스님은 대중 앞에 모습을 안 보였을 뿐이지 큰스님의 기질에 맞추어 평생을 통하여 사부대중을 향하여 법문을 하시면서 최선을 다하신 것입니다.

 

큰스님 상좌로서 도리를 다하고픈 마음

 

지금은 입적하셨지만 해인사 선원에서 수좌首座의 직책을 맞고 있던 원융스님이 상좌들과 함께 성철스님이 도인인지? 아닌지? 법거량을 한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성철스님이 열반하기 며칠 전에 체력이 극도로 쇠퇴하여 자주 주무시길래 완전히 혼침昏沈에 빠진 줄 알고 “큰스님, 지금 경계는 어떠하십니까?” 하고 법거량을 하였더니 혼침에 빠져 주무시는 줄 알았던 성철스님이 벌떡 일어나서 원융스님의 뺨을 후려쳤다고 한다. 이 일은 그 당시 전국의 제방선원諸方禪院에서 화제가 되었던 유명한 사건이다. 성철스님은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간화선看話禪의 선사禪師답게 늘 깨어 있었던 것이다.(주3)

 

소납은 이 일화가 성철스님께서 열반 전에 본래면목을 보여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인사에서 승가대학장과 율주律主와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을 하셨던 종진스님께서는 “성철스님 열반 후 해인사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수십 리 길이 문상객으로 뒤덮여서 차량 통행이 어려워지고 다비식을 할 때 다비장을 연꽃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성스럽게 다비식을 봉행한 것은 출가해서 처음 보는 일이었다.”라고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평소에 성철스님을 존경하던 원로 정치인 김종필 씨는 해인사로 들어가는 도로가 꽉 막혀서 차량 통행이 어려워지자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문상을 하고 갔습니다. 오늘날 진정한 영웅도 도인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종교를 초월하여 온 나라 국민들이 추모를 한 것은 우리 시대에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진정한 도인이 가셨기 때문에 수많은 추모객이 자발적으로 해인사에 모인 것입니다.

 

사진 7. 2008년 동국대 가을 학위수여식에서 오영교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증을 수여받는 모습.

 

가까이에서 모셨을 때는 너무나 엄한 분이라서 그다지 인간적인 정을 느낄 수 없었는데, 다른 회상會上에 가서 살아 보니 오늘날 그런 스승이 다시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큰스님 열반 후 수행하면서 장벽에 부딪칠 때마다 스승이 가신 허전함은 더욱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이나마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항상 훈계받았던

 

첫째, 불법佛法에 대한 굳건한 신심을 가져라. 

둘째, 승려들은 신도들의 시줏물로 살아가니 항상 근면, 검소, 절약하며 살아라. 

셋째, 자투리 시간이라도 낭비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

넷째, 오계五戒를 잘 지켜라.

다섯째, 항상 하심下心하고 어디를 가든지 잘난 체하지 말고 못난 중으로 살아라.

여섯째, 항상 참선해서 자성을 깨치라.

 

는 말을 다시 한 번 회상하며, 모시면서 눈여겨보았던 큰스님의 훌륭한 모든 점들을 잘 받들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데 더욱 매진하며 성철스님의 상좌가 된 도리를 다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각주>

(주1) 원소, 「다시 없을 스승을 그리며」, 『가야산호랑이를 만나다』(아름다운 인연, 2006, pp.138~139.).

(주2) 中村元 著·김지견 역, 『佛陀의 世界』(김영사 1984. pp.200-201).

(주3) 원소, 「다시 없을 스승을 그리며」, 『가야산호랑이를 만나다』(아름다운 인연, 2006, p.142).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원소스님
해인사로 출가하여 1978년 성철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해인사승가대학, 율원,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방선원에서 정진을 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사회국장, 중앙승가대학교 수행관장, 외래강사, 도서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정릉동 삼정사에 거주하면서 지역포교와 참선 보급에 힘쓰고 있다.
원소스님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