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인드라망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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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3 년 4 월 [통권 제120호] / / 작성일23-04-05 10:17 / 조회2,286회 / 댓글0건본문
“누구도 외딴섬일 수 없다.”영국 문학사에 크게 공헌한 존 던(John Donne, 1572~1631)이라는 신부의 시구인데, 이와 함께 나오는 시구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물어보지 말지니, 그것은 그대를 위한 조종弔鐘이기에.”라는 것입니다. 어딘가에서 울려오는 조종은 결국 그대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이라는 뜻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관련해서,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의 다른 점 한 가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표층종교가 사물을 각각 독립된 개체로 보는 반면, 심층종교는 만물의 상호연관(interrelatedness),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의 관점에서 봅니다. 표층종교는 자기를 중심으로 만물을 대상으로 보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심층종교는 자기를 포함하여 만물 모두가 하나의 큰 얼개 속에서 서로 어울려 있다고 보는 세계관입니다. 이런 심층종교적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두 가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봅니다.
첫째는 2018년 하버드대학 졸업식에서 한국계 박진규 군이 졸업생 대표로 연설한 내용입니다. 연설의 주제는 하버드 졸업생들의 훌륭한 재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버드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모두 훌륭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인데, 이 재능이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이 재능을 자기 자신을 위해 효과적으로 쓸까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자기의 재능은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진: 허프포스트.
학생들이 오늘 졸업의 영광을 가지게 된 것은 부모님의 헌신, 학교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주시는 분들, 학교 미화원, 가족, 친구, 그 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협력과 합동 프로젝트’로 얻어진 ‘공동의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질문할 것은 “나의 재능으로 ‘나를 위해’ 무엇을 할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재능으로 ‘남을 위해’ 무엇을 할까?”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학생은 일곱 살에 미국으로 갔는데 불법체류자 신세로 뉴욕 식당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미용실에서 일하는 어머니 밑에서 영주권도 없이 지내다가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의 특별법으로 영주권을 얻고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나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 등 세계 지도자급이 받은 로즈 스칼러쉽을 받고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수 있는 특권도 받았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자기의 오늘이 자기만의 노력의 결과일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한 것 같습니다. 연설 도중 한국말로 “엄마 and 아빠, 고맙고 사랑해, Don’t cry.”라는 말을 했습니다.
또 어느 국회의원의 강연이 생각납니다. 강연을 시작하며 “여러분이 신고 있는 구두는 몇 명이 수고해서 나온 것일까요?”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100명? 100만 명? 아닙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고한 결과입니다. 구두 밑창에 깔린 고무의 경우, 고무나무를 심는 사람, 고무를 채취하는 사람, 채취하는 기구를 만드는 사람, 그 기구를 만들기 위한 제철공장 사람, 채취한 고무를 싣고 오는 배를 만든 사람, 배 만들기 위해 연구한 사람, 고무를 운반하기 위한 트럭을 만든 사람, 고속도로를 건설한 사람, 구두를 만든 사람, 구두를 파는 사람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수고 덕택으로 우리가 구두를 신을 수 있는 것입니다. 괘종시계, 집, 옷 등 우리 주위에서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 덕택이라는 것을 알고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고,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뜨고 모든 것에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모든 종교의 심층에서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동학에서 말하는 삼경三敬, 곧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이고, 원불교에서 말하는 사은四恩, 곧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이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도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고 했습니다.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
그러나 이렇게 상호연관·상호의존을 가장 힘 있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불교, 그중에서도 특히 화엄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불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는 연기론緣起論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연기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다.”는 설명에서 보듯이, 주로 사물이나 사건의 ‘시간적’ 연속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연기법은 시간적 원리라기보다 ‘존재론적 구조’에 관한 것으로 발전했습니다. 일체의 사물이 ‘지금’ 있는 그대로 다른 것과의 연관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화엄종은 이런 구조적 연기사상을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하고, 주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나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礙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이 용어의 구체적인 비유는 『화엄경』에 등장하는 ‘인드라망’입니다.
인드라, 혹은 제석천帝釋天이라는 신의 궁전에는 끝없이 넓은 그물로 둘러 쳐져 있고, 그 그물코마다 보석이 달렸습니다. 이 보석들은 서로를 반사하고 있어서 각각의 보석에 다른 모든 보석의 상像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가 모두를 품고 모두가 하나를 품는다는 뜻에서 일중다一中多·다중일多中一, 일즉다一卽多·다즉일多卽一,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우리말로 고치면 집이라는 것과 집을 구성하고 있는 문이나 창문, 기둥, 지붕 같은 부분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우리가 집이라는 실체를 상정하면 당연히 문이나 창문, 기둥, 지붕 같은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집이라는 말 속에는 집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집이라는 것과 집을 이루는 문이나 창문, 기둥 등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상통하는 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를 ‘이사무애理事無礙’라고 합니다.다른 한편 문이 없으면 집도 있을 수 없고, 집이 없으면 창문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문에는 창문이 들어 있고 창문에는 문이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문과 창문 사이의 관계를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합니다.
이런 안목을 가지면, 쌀 한 톨 속에는 햇볕이 있고, 비가 있고, 바람이 있고, 천둥이 있고,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고, 농부의 땀이 있고, 농부의 부모가 있고, 그 부모의 부모가 있고… 결국 쌀 한 톨 속에 온 우주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교 용어로 하면 티끌 하나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는 뜻을 지닌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 됩니다. 결국 쌀 한 톨도 독립적인 존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신비주의 시인 겸 예술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시로 읊었습니다.
모래 한 알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하늘을 보기 위하여
그대 손바닥으로 무한을 붙들고
이 한 시간 속에서 영원을 잡아라.
유기적·통전적 세계관의 유용성
지금껏 말한 것을 요즘 말로 고치면 유기적(organic)·통전적(holistic)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복잡하고 번쇄적인 사상을 알아야 하는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유용성을 불교의 교판 문제, 돈오점수의 문제, 부처님의 성불 체험을 나의 체험으로 여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등 불교적 관점에서 여러 가지 열거할 수 있지만 우리 범인으로서 눈여겨볼 수 있는 실용적 이점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이런 유기적·통전적 세계관을 가지면 앞에서 예거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의 나됨을 비롯하여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 남과 나의 구별이 없어지기 때문에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참된 의미의 자비慈悲가 가능해집니다. 영어로 자비를 ‘compassion’이라고 하는데, 문자적으로 ‘함께(com) 아파함(passion)’입니다. 자연의 훼손도 나의 아픔이 됩니다.
셋째, 이런 세계관을 가지면 편견이나 옹고집에서 해방됩니다. 모든 것이 관계에서 규정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독단적이나 독선적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책상이라도 아이에게는 너무 높고 거인에게는 너무 낮을 수 있고, 또 그 책상이 공부할 때는 책상이라도 올라서서 전구를 바꿀 때는 사다리도 될 수 있고, 걸터앉으면 의자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사물에 불변하는 본질이 있음을 부정하는 이른바 ‘비본질론적’ 입장에 서게 되므로 어느 한 가지 견해를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심층적 안목을 지닐 수 있게 된다면 불교는 빌어서 복 받고 죽어서 극락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유와 환희를 맛볼 수 있음을 가르치는 종교라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주1)
<각주>
주1) 화엄사상에 관해 좀더 자세한 것은 오강남,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현암사, 2011), pp. 201~218를 참조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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