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봉화 축서사 시절과 선납회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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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3 년 4 월 [통권 제120호] / / 작성일23-04-05 12:08 / 조회2,523회 / 댓글0건본문
1980년 10·27법난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아 고우스님은 봉암사 대중의 결의로 서울 조계종 총무원에서 두 달 동안 총무부장 소임을 살면서 사태를 수습하고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한 뒤 봉암사로 돌아왔다.
세간에 화제가 된 성철스님의 종정 취임 법어
서울 조계사에서 지낸 두 달은 마치 20년처럼 느껴진 고난의 나날이었지만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수좌계나 불자들에게 큰 신뢰를 받던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모신 것이었다. 비록 종단의 원로 대덕스님들의 뜻이었지만 총무원에서 같이 동고동락한 수좌들 입장에서는 간화선의 대종장께서 종정에 추대됨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특히 10·27법난으로 한국불교와 승가의 위상이 나락에 떨어진 때에 성철스님이 최고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종정에 오르신 것은 한국불교가 다시 깨어나게 하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성철스님은 조계사에 열린 종정 추대식에는 가지 않고 그 유명한 법어를 내렸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짧지만 성철스님의 이 종정 취임 법어는 세간에 큰 화제가 되었다. 「동아일보」에는 ‘81
년 「말」의 성찬 기자방담’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연초 이성철 종정이 취임법어를 통해 했던 이 말이 금년 내내 유행했어요. 머릿속이 복잡한 현대인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통쾌하게 한마디로 알려줬다 해서 화제가 됐었습니다.” - 「동아일보」, 1981년 12월 12일 기사.
산으로 돌아오다
성철스님의 종정 법어가 세간에 큰 화제가 되고 불교의 위상이 다시 회복될 기운이 보이자 고우스님은 참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봉암사에서 지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황당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스님은 위기에 빠진 종단을 구하고자 온갖 고초를 겪으며 고생해서 수습하고 종단 빚도 다 갚았다. 명분에 따른 인사도 하고 다방 출입을 금할 정도로 청정하게 총무원 소임을 살았다. 그런데 「불교신문」에 수습한 수좌들을 ‘워커 앞잡이’라 비방하는 글이 실린 것을 보았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총무원에 올라간 수좌들이 폐간된 신문사를 군부의 온갖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불교신문」이라 이름을 바꾸어 발행했다. 회사가 지고 있던 막대한 빚도 다 갚고 직원들의 월급까지 올려주고 왔는데 그런 기사가 실린 것을 보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려운 때에 총무원 소임을 맡아 총무원 부채도 해결하고, 종단에 처음으로 계단위원회와 사미·사미니 단일계단을 만들고, 중앙승가대학 설립까지도 도왔다. 당시 학인들이 찾아와 학교를 세울 도량을 구해 달라고 하여 개운사에 중앙승가대학이 설립되도록 적극 도왔다. 가장 큰 문제는 종헌 개정이었다. 군부의 온갖 간섭과 협박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총무원 중앙집중제를 관철 시켰다. 종단 안에서 군인들과 내통하며 이간질하던 이들이 자기들 뜻대로 주지 인사 등을 안 해 주고 떠나자 이제는 뒤에서 ‘워커 앞잡이’라고 비난한 것이었다. 워커란 군화이니 ‘군인 앞잡이’란 비방이었다.
부처님 법이 훼손당하는 법난의 위기 상황에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총무원 살림을 맡아 살다내려왔다. 나름의 보람도 있었으나 종단 내부에 대한 실망도 컸다. 특히 출가 승려가 부처님 가르침보다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군부와 협잡하거나 패거리를 만들어 모략을 일삼는 것을 눈앞에서 직접 겪으니 종단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되었다.
봉화 축서사 시절
법난 수습 뒤 봉암사로 돌아왔던 고우스님은 워낙 마음고생이 심했던 터라 조용히 지낼 도량을 알아보았다. 마침 봉화 축서사가 빈다는 소식을 듣고 본사인 고운사로 가서 주지 근일스님을 만났다. 근일스님은 이름 높은 수좌로 고우스님이 총무부장 할 때 고운사 주지로 임명장을 준 인연이 있었다. 근일스님은 고우스님이 축서사에 가고 싶다 하니 흔쾌히 환영했다. 그리하여 고우스님은 처음으로 절의 주지를 맡게 되었다. 이것은 고우스님이 주지를 맡게 된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 된다.
봉화 축서사는 고우스님과 인연이 깊었다. 처음 출가하여 김천 청암사 강원에서 공부하던 학인 시절 불교정화를 하다가 몸싸움이 났다. 그 일로 경찰이 조사를 하자 고우스님이 모든 걸 뒤집어쓰고 야반도주를 하여 발길이 닿는 대로 가다가 머문 도량이 봉화 축서사였다. 당시 주지스님이 환대를 해 주어 잘 쉬다가 다시 돌아가 공부하게 된 인연이 있었던 절이었다.
오늘의 축서사는 무여스님이 주지를 맡은 이후 대작불사를 하여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도량으로 탈바꿈하였다. 하지만 1982년 고우스님이 주지를 맡을 당시에는 문수산 높은 산비탈에 법당 하나에 요사채가 전부였으니 암자나 다름이 없었다.
고우스님은 가난한 축서사 살림에 공양주를 둘 형편이 안 되어 손수 공양을 해서 먹었다. 그렇지만 아름답고 늠름한 문수산이 포근하게 감싸면서도 빼어난 안대案帶를 가진 도량이라 고우스님이 쉬는 데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이렇게 고우스님은 봉화 축서사로 온 뒤 2021년 입적할 때까지 봉화를 떠나지 않았다.
도반 활성스님과 초기경전에 대하여 탁마하다
고우스님은 출가하여 강원에서 공부하고 평생 참선 수도하였으니 도반 인연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도반이 바로 활성스님이다. 활성스님은 사단법인 고요한 소리를 만들어 초기경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한 선구자다. 고우스님은 활성스님을 봉암사 선방에서 처음 만났다. 활성스님은 서울대를 나와서 신문사 기자를 하다 출가한 늦깎이 였다. 고우스님은 당시로선 드물게 수좌가 강원 공부를 하고 경전에도 밝았기에 서울대를 나온 영민한 활성스님을 만나자 말이 통해서 가까워졌다. 특히 법난 수습을 위해 서울 총무원에 올라갈 때도 같이 동행하였고, 총무원에서 법난 수습을 할 때에도 세속 사정에도 밝았던 활성스님의 안목은 고우스님 등 수좌들의 한계를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고우스님과 활성스님은 더 가까워졌다.
그런데 법난 수습을 위한 총무원 생활을 하면서 활성스님은 종단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승단에 크게 실망하게 된다. 그래서 활성스님은 선방을 떠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공부하기 위해 한문 경전이 아닌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초기 경전을 공부하게 되었다.
활성스님의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면서 고우스님은 부처님 가르침과는 다른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비판적인 인식을 같이했다. 하지만 선禪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바라본 점에서는 견해 차이가 있었다. 해제 철이 되면 고우스님과 활성스님은 한 번씩 만나 밤새도록 법담을 나누었다. 활성스님은 그동안 공부한 초기경전의 부처님 말씀을 이야기했고, 고우스님은 대승과 선종의 견해로 반박했다. 이런 견해 차이는 결국 밤샘 논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좌 공부모임 선납회의 창립과 활동
그러나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활성스님과 대승경전과 선이라는 전
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고우스님의 탁마는 단순히 개인의 견해 차이를 넘어 한국불교가 직면한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사이에 놓여 있는 사상적인 갈등이었다. 한국에서 불교를 깊이 공부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이 문제를 만나게 된다. 어쨌든 고우스님은 이런 인연으로 활성스님을 통해서 초기경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남방 상좌부 승가의 주요 경전과 논서를 정독하며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고우스님이 대승경전과 선종에 한정된 불교 인식을 초기경전과 남방 상좌부 승가 전통으로 확장해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우스님은 참선하는 수행자들도 경전과 선어록을 공부하여 바른 안목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확신을 다지게 되었다. 마침 적명스님, 현기스님 같은 수좌 도반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1984년에 고우스님은 적명스님과 수좌들이 결제 철에는 선방에서 정진하고 해제 뒤 산철에는 모여서 경전과 선어록을 공부하자는 뜻으로 선납회禪衲會라는 단체를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고우스님은 혼자 공부하기보다는 선납회를 통해 수좌 도반들과 함께 부처님의 법을 바로 공부하고 선풍을 진작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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