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아수라장 같던 피난처에서 만난 출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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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3 년 5 월 [통권 제121호] / / 작성일23-05-05 12:10 / 조회2,189회 / 댓글0건본문
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9 |인환스님 ⑤
두 달에 걸친 목숨을 건 피난길
▶남한 땅 처음 발 디딘 곳이 어디인가요?
원산에서 겨우 탄 군함이 묵호항에 도착했어요. 묵호가 지금은 동해시로 바뀌었지요. 어디로 갈지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은 여기저기 귀동냥을 들을 수밖에요. 당시 소문이 동해안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철도가 없으니 순전히 걸어야 하는 힘든 길이고, 태백산 넘어 제천 쪽으로 나가면 현재의 중앙선을 탈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도 그 길을 택했어요. 우선 강릉을 거쳐 대관령을 넘고, 정선을 지나 제천까지 걸어갔어요. 그저 걸을 뿐, 하루 세끼 먹을 돈이 없어요. 그저 가다가 동네에 들러서 밥 한 술씩 얻어먹곤 했지요. 나하고 형하고 둘이서 가는데, 그때만 해도 걸음을 잘 걸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더 빨리 제천까지 갔어요.
더러 사랑방 같은 데서 자거나 거의 움막이나 물방앗간이나 이런 데서 겨우 새우잠을 잤는데 며칠 걸렸는지 생각이 잘 안 나는구만요. 여기까지는 큰 봉변 없이 그렇게 얻어먹으면서 갔지요. 그런데 제천에 도착하니 여기도 열차가 없어요. 다시 걸을 수밖에요. 제천에서 남행하는 길은 피난민들로 큰 길이 꽉 찼어요. 그런데 이전에 북에 올라가지 못하고 산속에 숨어 있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총으로 위협하는 거예요. 이런 일들 일일이 다 얘기할 수가 없어요. 그들도 피난민 대열에 섞여 있었어요. 그러자 미군들이 정보를 입수하고는 쌕쌕이라는 전투기가 날아다녔어요. 피난민 대열을 향해 기총사격을 하기 시작해요. 그러면 모두 길바닥에 바짝 엎드리기를 여러 번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요. 그때마다 목숨이 저승에 갔다 왔다 해요. 이제 앉아서 이런 얘기하니까 그렇지, 그때는 참 말도 못할 지경이에요.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경상북도 어디쯤인지, 큰 강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는 파괴돼 버렸어요. 뒤에서는 패잔병들이 총을 쏘며 쫓아왔어요. 피난민들의 재물을 뺏으려고요. 우리는 꼼짝없이 헤엄칠 수밖에 없었어요.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제 생명,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게 참으로 어려워요. 다른 사람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요. 그때도 학생 때 익힌 수영 실력으로 강을 건넜지요. 이렇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어요.
▶ 부산까지 가는데 얼마나 소요되었나요?
다시 남쪽으로 현풍, 화원 가는 길로 들어서 역시 똑같이 밥 조금씩 얻어먹으며 노숙해 가면서 영산靈山이라는 곳에 도착했어요. 지금 부곡온천 있는 그 근방인 거 같네요. 여기서 비로소 대엿새쯤 좀 쉬었어요. 그 동안 피난길은 그저 걷고 자기만 반복했지, 쉴 엄두를 못 냈는데, 비로소 며칠 쉬었어요. 이후 김해를 거쳐 부산에 도착했어요. 아마 원산에서 부산까지 두 달쯤 걸리지 않았나 싶어요.
아수라장 같았던 국제시장
부산은 전국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 솥에 뭐 끓이듯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동국대학교도 이곳에 피난 왔지요. 저 일본 절은 밑이 높아요. 그 마루 밑 공간을 교실같이 꾸며서 ‘피난 동국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걸 보기도 했어요. 한 달쯤 지나서 부친을 영도에서 만났어요. 그러나 낯선 땅에서 가진 것 없으니 각자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아버지와는 다시 헤어지고, 나와 형은 한동안 같이 지냈어요. 그러나 얼마 후에 형과도 헤어지고 혼자 반년 이상 지냈어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 여러 가지를 했지요.
모든 사람들이 피난지에서 우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뭐 먹을 수 있는 걸 구해야 되고, 돈벌이라도 해야 되잖아요?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피난민 대부분이 국제시장에서 노점을 하고, 나 역시 그렇게 하루 풀칠하고 그랬어요. 부모 밑에서 고향에 있던 열여덟 살 때까지는 학생으로 공부만 하고, 세상 물정 전혀 모르고 살았지요. 피난 생활 몇 개월 만에 세상은 그야말로 약육강식이고 힘 쎈 놈, 무기 가진 놈이 제일이고, 힘 약한 아녀자들, 약한 사람은 그 뭐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 피난민들의 삶이 마치 아수라 세계와도 같았군요?
지금 생각하면 육도중생六道衆生 가운데 아수라阿修羅 세계가 있다더니, 바로 눈앞에 아수라 세계가 벌어지고, 눈앞에 지옥이 벌어진 겁니다. 고향에서 살던 그런 세계 말고 또 이런 극한적인, 기가 막힌 이런 세계를 체험했지요. 그 무렵에 나는 ‘도대체 사람 살아간다는 게 뭐냐’, 조금 근원적인, 철학적인 의식이 생기더라고요. 모두들 피난 와 가지고 돈 한 푼이라도 빵 한 조각이라도 얻으려고 오만 노력을 바르게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 틈을 타 사기치고 남의 물건 빼앗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나날들에서 얼른 그 판에 들어가 사생결단하고 나도 돈 한 푼이라도 벌어야 되겠다고 악다구니를 쓸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이상하게…
그러던 어느 날 한 노보살님을 만났어요. 성씨는 변이고 불명은 천한행天閑行이라고 하는 보살님인데 부산 토박이지요. 좋은 집안이고 아들들은 다 장성해서 부산에 큰 사업가로 활동한다고 들었어요. 이 보살님이 불심이 아주 대단해요. 보통 보살들과는 달리 기복불교에서 한 발 탈피한 분이었어요. 절에 후원을 해도 선방을 자기 힘껏 후원하고, 안거 때는 자기 자신도 선방에서 참선하는 상당히 수준이 있는 보살님입니다.
백양산 선암사 출가
그런데 무슨 인연이 있었던지, 우연히 이 보살님을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부산까지 오게 된 내력을 간단하게 말하고, 이런 약육강식의 아수라 같은, 지옥 같은 세계에 대한 감정을 느낌대로 말했지요. 이런 세계에서 젊은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뭘 의지하고 뭘 목표로 삼아서 가야될지 지금은 내 힘 가지고는 갈피를 못 잡겠다고 했어요. 그 보살님이 그때만 해도 연세가 아마 칠십 넘었을까. 내 얘기를 들으시더니 나한테 그러더라고요. “지금 심경이 그렇거든 어떠냐? 불도를 닦아볼 생각 없느냐? 불도 수행할 생각이 없느냐?”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불교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도대체 불교가 뭐고 수행한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간단하게 이러이러하다 하고 얘기를 해 주더라고요. 그러더니 내가 열흘 후에 절에 갈 터인데 그때까지 잘 생각해서 불도를 수행할 생각이 서거든 내가 절에 가는 길 안내해 줄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그때 저한테는 그야말로 인로왕보살이었지요. 그 뒤 열흘 동안 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가지고 오만 가지를 다 생각을 했어요. 그야말로 계란을 세워 올렸다, 허물었다, 올렸다, 허물었다 하는 식으로 오만 생각이 지나갔지요.
▶ 관세음보살처럼 위기에 처한 청년 앞에 나타나셨군요?
도대체가 결론이 안 나는 거예요. 세상은 콩가루 같은 세상이 돼 버렸고, 불교라는 것은 전혀 짐작도 못할 만한 세계였으니까요. 그러다 열흘이 되는 날 아침 내가 머물던 곳으로 전화가 왔어요. 그렇게 해서 노보살님을 따라 절에 가게 됐어요. 서면 롯데호텔 쪽에 있던 부산상고 근처에서 만나 당감동 지나서 부암동釜岩洞이라고 하는 산 밑에 있는 선암사仙岩寺를 갔습니다. 19살 때인 1951년입니다. 음력으로 7월 백중날이니까 8월 하순쯤 되겠지요. 당감동 지나 산길 2km쯤 가면 절이 있는데 큰 아름드리 노송이 산에 가득했어요. 낮에도 산길은 어두컴컴해서 심약한 사람은 겁이 날 형편이였지요. 걸어서 선암사에 들어갔어요.
그때 선암사 선방이 ‘소림선원少林禪院’이라고 그랬어요. 전쟁이 일어나자 전국의 수좌스님네들이나 혹은 선방 조실스님들까지도 거의 피난 내려와 있었어요. 당시 부산에 스님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어요. 범어사 동산스님 계시는 청풍당에 있는 선방하고 여기 소림선원, 금정사 그리고 수좌스님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점이 영도에 아~ 이름이 생각 안 나네요. 보살님이 세운 절인데 수좌는 누구든지 며칠 쉬고 밥 얻어먹고 머물 수 있었어요.
대선지식 향곡스님
나는 뭣도 모르고 노보살님 따라 선암사를 갔더니 마침 백중날이라 신도들 5~6백 명이 절에 가득해요. 법당은 한 70평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법당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마당에 덕석을 깔고 위에 텐트를 치고 있더군요. 나는 간신히 법당에 들어가 구석 기둥 옆에 딱 앉았지요. 생전 처음 보는, 도대체 뭣이 어떻게 돌아가나 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봤어요. 의식이 끝나고 조실스님의 하안거 해제 법문이 있었어요. 그분이 유명한 향곡스님이요. 지금 종정으로 계시는 진제스님의 스승이지요. 그때 스님은 아마 마흔 살 조금 넘었을까 한 나이였어요. 아주 몸이 우람합니다. 카리스마가 넘치지요.
법문을 시작하는데 요즘 같은 법상法床이 있을 리가 없고, 다리 네 개 달린 책상을 불상 앞에 놓고 그 위에 책상보를 펼쳐놓았는데 스님이 그 위에 턱 올라앉았어요. 향곡스님은 평소에도 버릇처럼 자리에 앉으면 우람한 몸으로 몸을 흔들흔들했어요. 약간 흔드는 정도가 아니고 상당하게 각도를 가지고 몸을 흔들흔들하는 그런 버릇이 있었어요. 책상 위에 그 우람한 스님이 앉아서 몸을 계속 흔들어대니 다리가 찌그득찌그득 소리를 냅니다. 스님은 개의치 않고 우람한 큰 소리로 ‘창천蒼天, 창천蒼天’ 하시고는 주장자를 탁 짚고는 탕, 탕, 탕, 세 번 내리더니, “이제 해제를 하고, 안거 동안 열심히 정진을 했으니 누가 있어서 이 뜻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있거든 한마디 일러라!” 그런단 말이에요.
▶법거량 현장을 목격하셨군요?
당시 선방 수좌가 한 45명쯤 있었어요. 요새는 이런 거 보기가 어려워요. 그때만 해도 참 대단하게 모두 용맹정진하고 또 조실스님이 그럴 만한 법력을 갖춘 분들이고 그랬어요.
조금 있더니 대중 가운데서 한 37~8살 쯤 돼 보이는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실스님에게 뭐라 뭐라 몇 마디 하더라고요. 근데 그것도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지요. 그랬더니 이 조실스님이 “안 돼, 안 돼. 그것 가지고는 안 돼!” 그러니까 이 수좌스님이 앞에 쫓아 나와 가지고 그 조실스님이 앉아 있는 법상에 어깨를 집어넣고는 조실스님 법상을 훌렁 뒤집으려고 들었단 말이요. 어지간히 시원찮은 사람이었으면 그만 훌렁 뒤집어서 사람이 그냥 마루에 떨어져 일 났을 겁니다.
그러나 역시 향곡스님은 달라요. 뒤집으려는 찰나, 조금도 당황하시는 법 없이 들고 있는 주장자로 수좌의 등허리를 가볍게 딱딱 두 번 치더니 “안 돼, 안 돼.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니까 그러네.” 그러시더라고요. 그러자 수좌가 어깨를 싹 빼고는 합장을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더군요.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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