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모든 산들의 아버지 팔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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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3 년 7 월 [통권 제123호] / / 작성일23-07-04 10:25 / 조회2,488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33|팔공산 은해사 ①
봄날이든 가을날이든 문경새재를 넘어 영남 팔공산八公山 자락에 있는 은해사銀海寺를 찾아가는 길은 늘 즐겁다. 팔공산의 본래 이름은 공산公山인데 신라시대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리면서 중악中岳으로 불렸다. 산의 신이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여 준다는 산악신앙을 바탕으로 이런 제사를 지냈다.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성산聖山(sacred mountain)은 세계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걸출한 위인을 배출한 팔공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시대 제사를 지낸 성산을 3산山과 5악岳으로 기술하고 있다.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올리는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의 3개의 산과 다음 등급의 중사中祀를 지내는 5개의 산이 그것이다. 5악은 동서남북과 중앙에 있는 산인데, 동악東岳은 대성군大城郡의 토함산吐含山, 서악西岳은 웅천주熊川州의 계룡산雞龍山, 남악南岳은 청주菁州의 지리산地理山, 북악北岳은 나이군奈已郡의 태백산太伯山을 일컬었다. 공산을 중앙에 있는 중악으로 삼고, 모든 산의 아버지 산라고 하여 부악父岳이라고도 했다. 이 오래된 신성한 공산에 터를 잡고 대대로 불교의 중심이 되어 온 양대 거찰이 동화사桐華寺와 은해사다(사진 1).
이 지역은 신라 때는 원효元曉(617~686) 대사와 그의 아들인 홍유후弘儒侯설총薛聰(?~?) 선생이 태어난 곳이고, 고려에 오면 정몽주鄭夢周(1338~1392)선생이 태어난 지역이기도 하고, 일연一然(1206~1289) 국사가 태어나 활동한 지역이기도 하며, 조선시대까지 우리 역사에서 기라성 같은 위인들과의 인연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곳이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진 선산의 도리사桃李寺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와 영천시로 들어서면 거조사居祖寺로 가는 길과 만난다. 그곳에 들렀다가 더 내려가면 청통면에 있는 은해사에 도착한다. 사찰의 이름이 ‘은빛 바다’의 절이라고 되어 있어 무심하게 보아도 시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은해사의 창건과 부침
역사적으로 은해사는 팔공산을 두고 동화사와 양대 축을 형성했을 만큼 크고 작은 많은 사찰들을 거느렸고, 인종의 태실이 뒷산에 조성되면서 왕실의 후원으로 사세가 번창했던 때도 있었다. 그 후에 화재로 인한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1789년 무렵에는 은해사의 산내 암자가 15개에 이르렀을 만큼 번창하였지만 오늘날에는 9개 암자만 남아 있다.
은해사의 역사는 신라시대로 올라간다. 신라의 제41대 헌덕왕憲德王(재위 809~826)이 되는 김언승金彦昇(?~826)은 동생인 이찬伊湌 김제옹金悌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조카인 제40대 애장왕哀莊王(재위 800~809)의 형제들을 시해하고 왕이 되었다. 왕으로 즉위한 809년(헌덕왕 1)에 그 당시 화를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나라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현재의 운부암雲浮庵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해안평海眼坪에 절을 지었는데, 그것이 해안사海眼寺이고, 이 절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지금의 은해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0년 김달현金達鉉이 지은 「은해사중수기銀海寺重修記」의 내용이다.
1943년에 세운 「팔공산은해사사적비八公山銀海寺事蹟碑」에는 혜철국사惠哲國師(785~861)가 해안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814년(헌덕왕 6)에 당나라로 건너가 강서성 건주虔州에서 종풍宗風을 날리던 서당지장西堂地藏(735~814) 선사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839년(문성왕 1)에 귀국한 후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태안사太安寺(泰安寺)에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한 그의 활동 시기와 비교하여 보면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애장왕은 13살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작은아버지인 김언승이 병부령으로서 섭정攝政을 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가야산에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도량이 되는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기도 하였고, 신라와 일본 간에 중단된 외교관계를 복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헌덕왕 때는 천재지변과 기근으로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다. 급기야 웅주熊州 도독都督 김헌창金憲昌(?~822)이 그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780?)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고, 그 후 그의 아들 김범문金梵文(?~825)이 도적들을 규합하여 또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고 죽었다.
헌덕왕은 10년간 재위하고 죽었는데, 상대등上大等으로 시중侍中을 지낸 그의 동생 김수종金秀宗이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제42대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이다.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에게는 후사가 없었다고 되어 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헌덕왕에게는 15세에 출가한 아들이 있었고, 그가 832년에 동화사를 창건한 심지心地(?~?) 화상이라고 한다. 유식법상唯識法相을 이었다고 한다. 당나라 현장법사가 645년 인도에서 귀국하여 불경을 번역하고 유식론을 중심으로 하는 법상종이 형성된 지 200여년이 지난 때이다. 팔공산 높은 곳에 있는 묘봉암妙峰庵과 중암암中巖庵도 심지화상이 세웠다는 말도 전해 온다.
해안사가 창건된 후 어느 때 은해사로 개칭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려시대 관리를 지낸 영천 출신의 이탄지李坦之(1085~1152)의 「이탄지묘지명李坦之墓誌銘」에 관직을 마친 후 낙향하여 ‘은해사’에서 생을 마쳤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도 이미 은해사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오면 승통僧統이던 홍진국사弘眞國師혜영惠永(1228~1294) 화상이 1270년(원종 11년)에 은해사를 중창하고, 1275년에 원참元旵화상이 중창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은해사 백흥암百興庵에 있는 홍진국사의 진영에 ‘고려국사高麗國師 본사창주本寺創主 홍진영弘眞影’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은해사를 새로 짓는 수준의 중창이 있은 것으로 보인다(사진 3).
은빛 바다가 펼쳐지는 고찰
은해사라는 절 이름에 대해서는 1879년에 영천군수 이학래李鶴來(?~1883)가 지은 「은해사연혁변銀海寺沿革辨」에도 분명하지 않다고 되어 있고, 그 지역의 옛 지명인 은소銀所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은해사는 운해사雲海寺, 은해사恩海寺, 공산본사公山本寺로 불렸다고도 한다. 아무튼 은해가 ‘은빛 바다’라면 시적인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산사의 풍광이 떠올라 사람으로 하여금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게 한다.
여름날 산안개가 가득 피어오르는 때 은해사로 발걸음을 옮긴 사람은 이 광경을 만날 수 있으리라. 산 속으로 들어가면 구름 속에 잠기어 내가 구름인지 구름이 나인지 알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공산 가득한 운해 속에 운부암雲浮庵도 있지 않은가. 그 가없는 바다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진리의 바다라면 진정 가슴 벅차오르는 환희歡喜의 순간을 맞이하리라. 그야말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의 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은해사는 조선시대 1521년(중종 16)에 인종仁宗(1544~1545)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을 은해사 뒷산에 묻고 태실을 건립하면서 백흥암百興庵과 은해사가 태실 수호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지원을 받기에 이르렀다. 1545년(인종 원년)에는 큰 화재로 사찰이 소실되었지만 천교天敎 화상이 왕실의 지원을 바탕으로 아예 해안평에서 2.8km정도 떨어진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짓고, 절의 이름도 그대로 은해사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은해사의 본찰 가람은 인종~명종시대의 출범과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가 어린 아들 명종明宗(1545~1567)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불교 진흥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갔을 때는 그간 억압을 받아 왔던 불교로서는 부흥할 수 있는 큰 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사대부나 유생들이 사찰에 대해 횡포나 행패를 부릴 수 없었다. 대왕대비 문정왕후가 사망하기 2년 전에 은해사에는 법당이 중건되기도 했다.
인종은 아버지인 중종中宗(재위 1506~1544)과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1491~1515) 윤씨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었다. 중종은 첫째 왕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1487~1557)와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두 번째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7일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문정왕후 윤씨가 세 번째 왕비로 되면서 왕위계승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인종은 이런 외척세력들 간의 권력투쟁 속에서 어려서부터 신산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중종은 결국 인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리하여 인종은 30세에 왕으로 즉위하였고,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폐지되었던 현량과賢良科도 부활시키고, 그때 희생된 조광조趙光祖(1482~1519) 선생도 신원伸寃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개혁정치도 시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재위 9개월 만에 후사後嗣가 없이 사망하고 말았다. 조선시대에 재위기간이 제일 짧은 왕이 되었다.
인종을 이어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친모인 문정왕후가 남동생인 윤원형尹元衡(1503~1565)을 국가권력의 중심에 앉히고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윤임尹任(1487~1545) 일파를 제거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였다. 중종의 둘째 비인 장경왕후와 그 오빠인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大尹세력’과 셋째 비인 문정왕후와 그 남동생을 중심으로 한 ‘소윤小尹세력’ 간에 벌어진 권력투쟁이었는데, 명종의 외삼촌 세력이 인종의 외삼촌 세력을 제거한 싸움이었다.
이런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유학자들과 인물들이 또 사라져 갔다. 대유학자이자 조선 성리학의 선구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선생도 이런 와중에 윤원형 세력들이 조작한 ‘양제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엮여 평안도 강계江界로 귀양 가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언적 선생이 살았던 곳은 현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양동良洞 마을이고, 그를 배향한 대표적인 서원이 옥산서원玉山書院이다(사진 4).
조선왕조 개창 후부터 왕권과 이를 둘러싼 사대부와 유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정치투쟁을 보아 온 문정왕후는 왕권이 유교의 늪에 다시 빠져들어 국정의 혼란을 겪기보다는 불교를 중흥시켜 이 혼란의 소용돌이를 잠재우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불교와 유교에 모두 능통한 당대의 대덕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1506?~1565) 대사를 국사國師로 삼아 불교를 중흥시키는 일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갔다.
이런 국면에서 유생들이 격렬한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결국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바로 각지의 유생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보우화상을 죽이라는 상소도 빗발쳤다. 명종은 그를 제주도로 유배시키는 것으로 결정하고 이런 상소들을 물리쳤으나 보우화상은 제주도에서 목사인 변협邊協(1528~1590)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무과 출신으로 한때 왜적을 진압하며 승승장구하던 변협은 이 사건으로 벼슬을 그만두었지만, 보우화상 장살사건의 내막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법영대사의 중창과 사세 확장
1563년에 은해사가 화재로 다시 소실되자 1589년(선조 22년)에 법영法暎 대사가 현재의 자리에 대대적으로 당우들을 중창하고 법당을 극락전極樂殿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도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1712년(숙종 38)에 와서 은해사가 종친부宗親府에 소속되면서 사세가 전격적으로 커지게 된다. 왕실의 후광으로 세금이나 부역, 공납 등이 경감되었고 사찰 인근의 땅도 매입하여 소나무도 심었다.
은해사가 종친부에 속한 이상 이제 유생들이 승려들을 마음대로 부리거나 수탈하기 어려웠다. 이후 은해사에는 불사가 계속되었다. 1750년에 가장 큰 불사가 이루어졌는데, 은해사와 백흥암 등에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가 조성되었고, 그 이후에도 기기암과 운부암, 중암암 등에 아미타회상도阿彌陀會上圖를 모셨다. 미타도량으로서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갖추어갔다.
당연히 염불신앙도 중요시되었다. 『염불환향곡念佛還鄕曲』을 쓴 기성쾌선箕城快善(1693~1764) 대사가 기기암을 중심으로 염불결사를 만들고 교학의 통섭도 추진하였다. 팔공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미타신앙은 17세기 후반부터 동화사가 그 중심지였는데, 18세기에 오면서 은해사 등으로 확산되었다.
요즘 주차장이 있는 사역의 초입에 신축한 우람스러운 일주문一柱門을 지나(사진 5) 보화루寶華樓 쪽으로 걸어가면 풍광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그 길을 걷는 운치는 다르다. 산사로의 길을 걷는 시간은 명상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길을 지나다 보면 양옆으로 잘 생긴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종친부에 소속되면서 조성된 소나무들이 후손들까지 번식시키며 이곳을 지키고 있다(사진 6).
아름다운 소나무길 사이로 들어가는 사역寺域
예나 지금이나 소나무들은 말없이 묵묵히 서 있지만, 그 사이 인간세人間世에서 일어난 온갖 일들을 다 보았으리라. 백흥암百興庵과 운부암으로 가는 산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또 다른 적막의 희열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인간이란 눈 깜짝할 시간 동안 한 번 살다가 가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은해교銀海橋 위를 지나다 보면 물소리만 적막을 깬다. 다리를 건너오면 바로 앞에 보화루가 눈앞에 서 있다. 오늘날 은해사의 가람은 그간에 확장공사 등으로 옛 건물이 헐리고 새 건물들을 지으면서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바뀌었다. 1920년대 사진을 보면 많은 당우들이 짜임새 있게 들어선 대찰의 모습을 띠고 있는데(사진 7) 요즘은 공간을 넓히는 데 치중하고 옛 당우들을 많이 헐어낸 결과 사역 전체의 구조는 엉성하고 다소 혼란스런 느낌을 준다.
원래는 개울을 건너 사역으로 들어서면 천왕문天王門이 서 있고 천왕문으로부터는 담장이 사역을 둘러싸고 있었다. 1847년 대화재 이후 옹호문擁護門으로 지은 것이다. 그 이전에 1737년에 천왕문에 단청도 새로 입히고, 1761년에 다시 천왕문을 세웠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면, 천왕문은 그간에 소실과 중건을 반복한 것 같다. 은해사가 종친부에 귀속되면서 사세가 확장되어 가던 시절의 모습이기도 하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이 쓴 「은해사銀海寺」라는 현판은 이 천왕문에 오래 걸려 있었다. 천왕문에는 사천왕탱이 두 폭 있었고, 안쪽 문미에는 「옹호문擁護門」이라는 현판도 걸려 있었다. 이 천왕문을 들어서면 종각이 옆에 따로 있었고, 앞에는 보화루가 서 있었는데, 이를 지나면 좌우에 심검당尋劒堂과 열선당說禪堂이 서 있는 대웅전의 중정中庭으로 들어서게 된다(사진 8).
옛날의 이러한 가람 배치가 가람배치방식에도 맞고 품격도 훨씬 높다. 지금은 천왕문은 온데간데없고, 개울을 건너면 갑자기 사람 앞에 떡하니 서 있는 보화루를 직면하게 된다. 1980년대 경내를 넓히면서 보화루를 원래의 자리에서 옛 천왕문 자리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건물을 새로 신축을 하는 경우에는 구 사역은 최대한 수리 보존하는 방향으로 하고 신 사역에 새 건물을 짓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보화루에는 추사선생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골기를 죽이고 육기를 강조하되 기교를 최소화한 글씨인데 붓을 천천히 움직여 쓴 것이다. ‘문자향文字香’을 크게 내세우지 않은 담담하고 육중한 글씨다. 그 당시의 추사선생의 삶과 심경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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