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경성제대에서 루뱅대학까지 동서양을 망라한 학문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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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3 년 7 월 [통권 제123호] / / 작성일23-07-04 09:43 / 조회2,241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31 | 이기영
불연不然 이기영李箕永(1922∼1996)은 경성제대 사학과 출신으로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원효 연구에 일생을 바친 학자이다. 그는 고려와 조선, 현대 불교에 관한 글도 남겼지만 주된 학문적 관심은 원효의 사상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신라불교의 특성에도 주목했고 불교 해석학의 새로운 시각에서 원효와 한국불교를 바라보았다. 또한 한국불교연구원을 설립하여 활동하는 등 불교 대중화와 재가운동의 성행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루벵대학 라모뜨 문하에서 공부
이기영은 1922년 2월 20일 황해도 봉산군 만천면 유정리에서 광주 이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1년 국내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한 후 법문학부 사학과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했다. 1944년에는 학병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끌려갔다가 1945년 해방이 되어 귀국했다. 이후 극렬한 좌우 대립을 거쳐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황해도의 지주 가문이었던 그의 가족은 토지를 몰수당했고,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와서 대구로 내려갔다. 1951년에는 국방부 부편수관이 되어 전사 편찬 작업을 주관했고, 1952년부터는 대구 효성여고의 역사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다 가톨릭 재단인 효성여대 학장 전석재 신부의 도움으로 외국 유학의 기회를 얻어 1954년 프랑스로 갔다가 벨기에의 루뱅(Louvain)대학 역사학과에 들어갔다. 그는 비용을 아끼려고 수도원에 기거하며 열심히 공부했지만, 라틴어 등 언어 능력과 고전 및 사료 이해도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는 유럽 학생들에게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학과를 철학과로 옮겼는데 당시 루뱅대학에는 라모트(Lamotte)라는 유명한 불교학자가 있었다. 라모트는 산스크리트에 정통한 불교 문헌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그에게 배우게 된 이기영은 6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불교의 참회에 관한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1960년 3월에 귀국한 그는 동국대를 비롯해 서울대, 서강대 등에서 불교학과 인도철학, 종교학 등을 강의했다. 강의는 당시 불교에 관심 있던 대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에게 배우고 불교 연구의 길을 택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기영은 1964년 백성욱 총장의 주선으로 동국대 교수가 되었고, 다음해에 신설된 인도철학과의 학과장을 맡았다.
1968년에는 동국대 불교대학장이 되었으나 그가 천주교도라고 반대하는 일부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나 그만두었다. 이기영은 자신이 청담스님에게 계를 받은 불자임을 자부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얼마 뒤 영남대로 자리를 옮겼다. 3년 뒤에는 국민대로 이직하여 학장을 맡았고, 1974년에 다시 동국대로 복직하여 1986년 퇴직 때까지 재직했다. 또한 1978년에 신설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연구부장,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펴내는 편찬부장을 겸직하기도 했다.
한국불교연구원 창립과 원효학당 설립
이기영은 불교 원전의 번역과 현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원효를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고, 원효학의 국제적 확산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1961년과 1964년에는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여했고, 1970년에는 미국 국무성 후원으로 교환교수로 가서 원효사상을 강의했다. 또 하와이대 국제학술회의와 한일불교교류협의회 주최의 심포지엄에서 한국불교의 역사와 사상을 발표했다. 1976년에는 동국대 창립 70주년 기념 세계불교학술회의를 주관했고, 1987년 인도에서 열린 세계불교학술회의에서는 기조연설을 담당했다.
그는 국제화뿐 아니라 불교 대중화와 현대화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1963년에 조직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활동에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고, 1974년 한국불교연구원을 창설했다. 한국불교연구원은 대중강의와 출판 등을 통해 불교를 사회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불국사』와 『석굴암』 등 ‘한국의 사찰’ 시리즈는 전통 사찰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낸 스테디셀러였다.
또 연구원의 산하단체로 불교신행 조직인 구도회가 조직되었고, 서울을 시작으로 대구, 부산, 광주, 대전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여기서 그는 재가불교, 구도불교를 내세우며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1988년에는 한국불교연구원의 부설 교육기관으로 2년제 과정의 원효학당을 설립하여 여래장 사상, 『대승기신론』 등에 관한 대중 강좌를 개최했다.
1989년 전국교사불자회, 1991년 재가불교회의 설립 등 만년에도 그는 재가불교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1996년 11월 9일 ‘종교와 국가’를 주제로 하여 한국불교연구원에서 주최하고 동국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강연을 마친 뒤 학회장에서 돌연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원효연구와 불교대중화, 둘이 아닌 하나의 길
이기영은 대표작인 『원효사상』(1967)과 기존 논문을 집성한 『한국불교연구』(1982), 유작으로 나온 『불교와 사회』(1999), 『원효사상연구』(2001)를 비롯하여 단독 저서만 40권 가까이 된다. 또 역서도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필두로 『화엄경의 세계』 등 10여 권이 있다. 원효사상의 현대적 해석을 추구한 『원효 사상』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와 『별기』를 대상으로 분석한 책으로 1970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선정한 해방 후 25년 한국의 10대 명저로 뽑히기도 했다.
70여 편에 달하는 논문 가운데 원효의 사상을 검토한 것으로는 「원효의 보살계관」(1967), 「교판사상에서 본 원효의 위치」(1974), 「경전 인용에 나타난 원효의 독창성」(1975), 「원효의 실상반야관」(1980), 「원효의 여래장사상」(1987) 등이 있고, 「세계의 문화적 현실과 한국불교의 이상- 원효사상은 21세기 세계를 향해 무엇을 줄 수 있는가?」(1988)도 원효사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성과이다. 원효는 당시 신라에 전해진 경론과 유행하던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했는데, 이기영은 그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조명하고 현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는 원효가 중관과 유식의 토대 위에 법화와 화엄을 접목하고 궁극적으로는 여래장을 중시했다고 보았다. 원효사상의 이러한 특징은 일찍부터 회통과 융섭이라는 통불교의 전형으로 인식되었다. 이기영은 원효가 사상적으로 대승불교를 제대로 파악했고, 그렇기에 자파의 우월성만 강조하는 학파 및 종파불교의 편협한 교판과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갈 것과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을 촉구한 원효야말로 일승의 대승적 불교를 제대로 체화했다고 평한 것이다. 또 다양한 사상과 논의를 궁극적으로 수렴하고 귀결시키는 원융무애의 논리는 원효사상의 독창성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기영은 원효 외에도 신라불교 전체로 연구의 지평을 넓혔는데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사상」(1972), 「신라불교의 철학적 전개」(1977), 일본 및 중국불교와 신라불교를 대비시킨 「7·8세기 신라 및 일본의 불국토사상: 산악숭배와 사방불」(1973), 「중국 고대불교와 신라불교- 원효의 불교 이해를 중심으로」(1981) 등도 중요한 성과이다. 또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불교적 관점과 교학을 다룬 「불신佛身에 관한 연구」(1966), 「A Buddhist's View on Ultimate Reality(근원적 실체에 대한 불교의 관점」(1982), 「Hua-yen Philosophy and Bodhisattva Ethics(화엄철학과 보살 윤리)」(1986), 「경전 사상에 나타난 미륵 사상」(1990), 「현대에 있어서의 종교의 진리성」(1991) 등도 주목할 만하다.
불교연구에 유럽의 해석학 적용
이기영은 유럽에서 익힌 불교 해석학 방법론을 연구에 그대로 적용했는데, 이는 해방 후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한국 불교학계에서는 보기 드문 선구적 학문 경향이었다. 불교 해석학은 연구 대상을 텍스트에 한정하지 않고 역사학적 접근을 통해 당대의 시대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원효를 예로 들면, 7세기 신라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원효가 어떤 사상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또 원효가 당대 중국불교의 사상가들과 무엇이 다르고 어떤 철학적 상호 작용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원효사상의 전모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외에도 이기영은 불교를 중심에 두고 다른 종교나 철학과의 비교사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역사를 불교의 연기緣起로 해석하여 가변적인 흐름으로 파악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불교는 교학뿐 아니라 수행과 신행이라는 포괄적 영역을 아울러왔고 현재에도 대중불교와 실천불교로 역사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래의 다종교 사회에서 불교의 진로는 무엇인가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중생구제의 보살행의 현전화, 불교의 특색인 관용의 실천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그는 불교와 사회 문제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그렇기에 불교 대중화와 종교적 실천이 지상의 과제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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