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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4년 만의 노마스크 연등축제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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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3 년 7 월 [통권 제123호]  /     /  작성일23-07-04 13:39  /   조회3,11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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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부처님오신날을 즈음하여 한 달 전부터 산사는 물론 시내 곳곳에 연등이 걸리고 주요 거리나 광장에도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하는 장엄등이 어둠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코로나19로 불교계 각종 행사가 취소되거나 간소화됐는데, 4년 만에 마스크 없이 연등축제를 개최한다는 기대감에 불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부처님오신날을 준비하였을 겁니다. 

 

불기 2567년 봉축장엄등, 수마노탑등

 

소납에겐 무엇보다 올해 봉축장엄등이 뿌듯하게 다가왔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등 불교계 종단으로 구성된 연등보존위원회는 강원도 정선의 국보 정암사 수마노탑을 본떠 만든 ‘수마노탑등’을 불기 2567년 봉축장엄등으로 광화문광장에 우뚝 세웠습니다. 정암사 수마노탑은 정암사 적멸보궁 뒤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높이 9m로 벽돌처럼 돌을 다듬어 올린 고려시대 모전석탑입니다. 196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20년 6월 25일 국보로 승격된 귀중한 불교문화재입니다.

 

사진 1. 장애인, 외국인, 동물 등 다양성을 담고 있는 장엄등.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봉축장엄등 ‘수마노탑등’은 가로 11m, 세로 11m, 높이 20m 크기의 거대한 탑입니다. 전통등 제작 기법으로 화려한 색감과 은은한 한지의 멋을 살려 벽돌을 쌓듯 한 층 한 층 쌓아 올렸고, 그 둘레에는 국적, 인종, 나이, 남녀노소 차별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탑돌이를 하는 형상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멋진 탑을 어떻게 세우게 되었는지 연유가 궁금해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연등축제가 유네스코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고 난 이후 부처님오신날 행사에 예산이 지원되어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책임을 맡고 여럿이 힘을 합해 3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사진 2. 불기 2567년 봉축장엄등인 수마노탑등.

 

그동안 봉축장엄등은 40여 년 넘게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삼층석탑·오층석탑이 주로 세워졌는데, 연등회의 위상이 올라가고 참여 규모가 늘면서 2013년부터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하여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석탑형이 아닌 정선의 수마노 모전탑으로 형태를 바꾸고 시대에 걸맞게 디지털 조명을 이용하여 탑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니, 그 웅장함은 물론 밝고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가난한 여인, 난타의 등 공양

 

등燈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 중의 하나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가난한 여인 난타의 등 이야기’는 『현우경賢愚經』 빈녀난타품에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 그 마을에 ‘난타’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매우 가난하여 늘 구걸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어느 날 국왕과 백성들이 등을 밝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걸 보고 자신도 등 공양을 올리고 싶었습니다. 하루 종일 구걸하여 겨우 약간의 기름을 사서 등불을 밝히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등불은 저의 모든 재산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이 인연공덕으로 지혜광명을 얻어 모든 생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없애도록 하여 주옵소서.”

 

사진 3. 난타의 등불 공양 장엄등.

 

다음 날 아침, 다른 등은 다 꺼졌지만 난타의 등만은 여전히 빛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 그 연유를 여쭈니, 온 정성을 다하여 보리심으로 밝힌 등이라서 꺼지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빈자일등貧者一燈’, 즉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등을 밝힌 게 아니라 일체중생을 위해 공양을 올렸기에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등을 밝히는 이유는 무명 번뇌로 인한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라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과 형식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그 의미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억 속 고단했던 제등행렬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행하고 있는 제등행렬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조계종행사기획단이 발행한 역사자료집 『초파일행사 100년-연등축제를 중심으로, 1907~2007』에 의하면 “오늘날 제등행렬은 1955년 조계사에서 시작되었다.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에는 신행단체들의 증가로 제등행렬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여 조계사와 동국대 인근에서 제등행렬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진 4. 동국대 운동장에서 진행되는 어울림마당. 사진: 연등회.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제정된 첫해인 1975년에 제등행렬이 대폭 확대되어 1976년부터 서울 여의도광장으로 자리를 옮겨 연등축제와 제등행렬이 진행되었으며, 이후 1995년까지 20년 동안 이어져 왔다. 여의도광장이 도로와 공원으로 조성된 1996년에는 동대문운동장으로 또다시 자리를 옮겨 연등축제가 이어져 왔으며, 2008년부터 처음 제등행렬이 시작된 동국대와 조계사로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사자료집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등행렬이 지금처럼 전통문화 성격이 가미된 연등축제로 자리 잡은 것은 1996년부터입니다. 동대문운동장 – 조계사에 이르는 제등행렬뿐만 아니라 전통문화마당, 어울림마당(연등법회), 회향한마당(대동한마당) 등으로 진행되어 전국적인 국민축제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2012년 4월에는 연등회의 무형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20년 12월에는 자발적인 공동체의 가치와 개개인의 창의성이 담긴 세대 전승, 다양한 사람들의 참여, 배려, 평등의 가치 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진 5. 1977년 여의도 광장 연등법회.

 

그렇지만 소납의 기억 속에 가물거리는 제등행렬의 풍경은 여전히 어둡고 고단하기만 합니다. 딱히 몇 년도 초파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의도광장에서 제등행렬이 출발할 때입니다. 여의도광장에 모여 식을 마치고 한강 다리를 건너 마포로 해서 서대문을 지나 조계사까지 가는 먼 길이었습니다. 한 손에 등을 들고 한참을 걷다 보니 행렬도 흩어지고 띄엄띄엄 등을 들고 가는 몇몇 사람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해는 져서 점점 어두워지고 애오개 고개를 지나 종근당 앞을 지나는데 저 앞에 한 노스님께서 혼자 등을 들고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소납도 이미 지쳐 있었지만 송구스러운 마음에 등이라도 들어 드릴까 하고 다가갔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 노스님은 뜻밖에도 모든 종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신 석주 큰스님이셨습니다. 무안한 마음에 머리를 크게 숙여 “해인사 백련암의 원택입니다.” 하고 인사를 올리니, 큰스님께서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생각이 나셨는지 “아! 그렇군! 멀리서 제등행렬에 참가하러 왔구먼.” 하며 반가워하셨습니다.

 

사진 6. 석주 큰스님.

 

뒤에서 모시며 서대문 로터리 쪽으로 내려오니 “내 혼자 천천히 갈 테니 먼저 조계사 가서 행사를 잘 마치시게. 어서 가 어서.” 하며 독촉을 하셨습니다. 몇 번을 “모시고 가겠다.”고 말씀드려도 “빨리 가라.”는 당부만 하셔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며 제등행렬을 마쳤던 기억입니다.

 

조계종 총무부장 시절, 연등축제와의 인연

 

세월이 흘러 1998년 12월 29일 고산 큰스님께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9대 총무원장에 당선되시고 소납을 총무부장에 임명하여 총무원에서 소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절의 소임이라곤 1990년 2월부터 1993년 12월까지 해인사 총무국장을 경험한 게 전부라서 총무원의 수석부장이라는 직함의 막중한 무게감에 걱정만 가득했습니다. 직무에 적응하기에도 정신이 없던 차인 어느 날, 낯선 직원들이 찾아왔습니다.

 

“저희들은 연등봉축위원회 소속 직원들입니다. 곧 4월 초파일 봉축행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시간이 바쁩니다. 총무부장 스님께서 당연직으로 연등봉축위원회장에 취임하셔서 봉축행사를 지휘해 주셔야 합니다.”

 

조계종에서 진행하는 최대 행사라서 세 원장스님 가운데 한 분이 맡는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총무부장이 책임자라고 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리가 자리이고 책임도 책임인 만큼 “조만간 연등봉축위원회 사무실에 갈 테니 시간을 잡아 보고할 준비를 해 주시오.” 하고 부탁을 했지만 천근만근 밀려오는 근심은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방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특색 있는 연등 봉축행사를 어떻게 구상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때 문득 성철 종정 예하의 다비식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다비장으로 밀려들고 밀려나가는 인산인해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성철 종정 예하가 서방 극락정토로 떠나시는 길을 환송하던 장엄한 염불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울려퍼졌습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슬퍼하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고, 오직 큰스님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던 거룩한 모습, 장엄하고 아름다웠던 풍경이 만화경처럼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해인사에 도착한 추모객들이 하나같이 고령인터체인지부터 관광버스는 거북이걸음이었다고 하고, 걸어서 온 사람들은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며 기진맥진해 있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또한 당시 참배객들을 안전하게 소통시켜 주던 한 경찰 관계자로부터 “고령부터 해인사까지 100리 가까운 길에 대략 30만~50만 명의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던 듯합니다.”라고 했던 후일담도 떠올랐습니다.

 

“그렇다. 부처님오신날, 불자들이 종로 거리에 10만 명이고 50만 명이고 모여 석가모니불을 합송하며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한다면 그것만큼 수승한 불사가 어디 있으랴.”고 생각하니 가슴이 고동쳤습니다. 한마음으로 결집된 신심의 열기는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임을 체험한 소납으로서는 연등축제가 열리는 연도에 수많은 신도들이 모여 “석가모니불”을 합송한다면 세상에 없는 멋진 봉축행사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책회의 때 직원들에게 “부처님오신날 종로 거리에 신도들이 얼마나 모입니까?”라고 물으니 다들 눈만 끔벅거렸습니다. “노력은 해 보았지만 다 자기 절 행사가 바빠서 협조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은 다가왔고, 저는 눈이 빠지게 종로 거리만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으나 등을 든 행렬만 지나갈 뿐, 축하 군중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며칠 후 평가회의에서도 군중 동원 실패에 대해서 각자 의견을 내고 “내년에는 좀더 잘해 봅시다.”라고 하면서 회의를 마쳤습니다.

 

그 다음해인 2000년 부처님오신날에는 강남 봉은사 신도 500여 분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T자 모양 등을 머리 위까지 높이 들고 연등행렬에 동참했습니다. 전에는 가슴 높이까지 팔을 들어 한 손에 등을 들고 걸으니 불빛이 멀리 가지 못하고 자기 앞만 비춰 어두웠다면 T자등은 등을 높이 들어 올려 등을 든 사람 머리 위 좌우로 등이 하나씩 켜지니 한 사람이 두 개의 등을 높이 들고 걷는 셈이 되어 주위도 환하게 밝아지고 등수도 배가 되어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연도에 모인 신도와 시민들도 박수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사진 7. 진각종에서 만든 황룡, 청룡 장엄등.

 

그러나 T자등을 든 신도님들에게는 말 못할 고생이 있었으니, 등 안에 촛불을 켜고 먼 길을 걷다 보니 촛농이 옷이나 손에 떨어져 행사를 마치고 나서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음해에는 초 대신에 렌턴을 이용하여 T자등을 밝히는 데 성공은 했으나 “허리가 끊어지게 아프다.”는 노보살님들의 눈물 어린 호소에선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려운 숙제는 연도에 대중을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봉축위원회 담당자들이 묘안을 냈습니다. 당시 봉축행사를 위해 동대문운동장에 모이는 인원은 다섯 등단으로 나눈 1만 5천여 명 정도였는데, 출발하기 위해 스탠드에서 지루하게 기다리느니 4,5등단을 먼저 출발시켜 동대문에서 종로5가까지 열을 지어 연도에 서 있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매년 각 종단의 어른 스님들이 1등단으로 출발하는데 4,5등단 동참자들이 먼저 출발하여 거리에 서 있다가 1등단 큰스님들이 도착할 때 꽹과리, 북, 장구 등 풍물을 울리며 대환영을 했습니다. 어른 스님들께서는 전에 없던 일이라며 모두 화들짝 놀라며 즐거워하였고, 4·5등단에 배치된 단체들은 출발할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리던 짜증도 사라지고 1,2,3등단이 준비한 봉축행사까지 차례로 다 볼 수 있다고 하며 모두들 기뻐하였습니다. 그 후론 4,5등단에 참여한 불자들이 ‘우리가 명당 중의 명당을 차지했다’며 매우 흔쾌하게 여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으니 소납도 가슴이 뿌듯할 뿐입니다.

 

이렇게 봉축행사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종로 거리에 풍물 소리가 울리자 주변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일반인들도 박수를 치며 함께 즐거움을 나눴습니다. 이런저런 소문이 퍼지면서 불교계만의 행사였던 연등축제가 모두의 축제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기 3년째인가는 종로 3가에 귀빈석을 마련하여 각 종단의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한 어른 스님들을 모시니, 어른 스님들께서 타 종단이 준비한 봉축 행사를 보고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여 이후에는 봉축 행사의 내용이 더욱 충실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귀빈석에 각국 대사들을 초대하였고, 그 후론 외국인들도 우리의 연등축제를 찾아와 직접 참여해 보고 싶은 축제로 발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소납은 고산 총무원장 큰스님에 이어 제30대 정대 총무원장 스님까지 합하여 4년 여 동안 총무부장을 하며 봉축행사를 진행하는 인연을 맺었습니다.

 

어깨가 들썩들썩, 신나는 연등회

 

코로나19로 인해 연등축제가 중단되거나 축소되어 비대면으로 진행되다가 마스크 제한 없이 연등회가 개최된다고 하니 얼마나 반갑고, 또 올해는 어떤 모습으로 개최가 될지 궁금하여 TV채널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사진 8. 조계사 신도들의 국화장엄등. 사진: 조계사.

 

동국대학교 운동장에서 연등회 식전 행사를 마치고 저녁 7시부터 제등행렬이 시작되었습니다. 화면 가득 흥인지문의 모습이 보이면서 행렬이 환하게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선두에는 국가무형문화재와 유네스코인류무형유산이라는 글이 적인 거대한 연등회 깃발이 서고 그 뒤로 오방번과 인로왕번, 노란색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대취타 행렬이 따랐습니다. 각 종단을 대표하는 봉행위원단 스님들이 연등을 들고 나란히 걷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중앙승가대 스님들이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며 발우등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면서 사천왕등, 육법공양 장엄등, 잉어등, 북등, 탑등 등 멋진 장엄등과 갖가지 행렬등이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데, 진각종 행렬 선두를 장엄한 황금빛 청룡등, 황룡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입에서 불을 뿜으며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거북선등에서도 불이 번쩍번쩍 나오고, 공작등은 푸른색 꼬리를 폈다 오므렸다 하는 등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길가의 시민들도 손을 흔들며 박수 치고 연신 사진을 찍으며 와!! 하는 탄성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었던 봉은사의 T자등이 이번에는 알루미늄 체로 바뀌고 모든 종단에 골고루 보급되어 연등행사가 L.E.D 시대를 맞아 더욱 밝아지고 화려해져서 정말 기뻤습니다.

 

사진 9. 진관사 청년연희단의 연등행렬. 사진: 진관사. 

 

조계사는 4년 만에 등장한 동자스님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연도에 모인 시민들에게 환호를 받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도님들이 머리 위로 국화꽃등과 연꽃등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천태종 장엄등과 행렬등은 무엇을 장엄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멋지고 아름다운 행렬이었습니다. 태국, 네팔, 베트남을 비롯한 여덟 개 불교 국가에서 온 스님들과 외국인 불자들도 나라별로 특색 있는 장엄등과 행렬등을 준비하여 동참하였습니다. 각 사찰과 종단 및 직장 직능 불자연합회 60여 개 단체가 동참하여 흥인지문에서 출발하여 1호선 종각역 사거리를 거쳐 조계사까지 약 2.8km 구간을 이동하는 도심 연등행렬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진 10. 진관사 청년연희단의 연등행렬. 사진: 진관사. 

 

 

도심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장엄등과 행렬등은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마스크를 벗은 채 거리에 모여 있는 시민들도 환한 웃음으로 화답을 하고, 소납의 어깨도 흥에 겨워 저절로 들썩거렸습니다. TV 화면으로 봐도 참으로 좋은 날이로구나 싶어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연도에는 50만은 고사하고 10만의 신도님들이 종로통 큰길 좌우로 도열하여 “석가모니불”을 합송하는 모습은 꿈속의 기대인 듯합니다. 소납은 언제인가 꼭 그런 날이 와서 ‘부처님오신날’이 더욱 풍성해지고 세계인이 함께하는 축제가 되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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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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