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영조의 어제완문과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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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3 년 8 월 [통권 제124호] / / 작성일23-08-04 22:29 / 조회2,312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34|팔공산 은해사 ②
영조 임금은 왕자 시절에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完文을 보낸 일이 있었는데, 임금으로 등극한 후에는 이 공문이 「어제완문御製完文」이 되어 은해사를 외부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도 하였다. 1847년(헌종 13년)에 은해사는 창건된 이래 가장 큰 화재로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당우들이 모두 화마에 사라졌다.
혼허화상과 추사의 인연으로 탄생한 은해사 현판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의 어제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이 이 지경에 처하자 대구감영과 왕실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3년 만에 중창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대웅전, 향실香室, 심검당尋劍堂, 열현당說玄堂, 청풍료淸風寮, 보화루普化樓, 옹호문 擁護門, 안양전安養殿, 동별실東別室, 만월당滿月堂, 향적각香積閣 등을 새로 지었다.
혼허지조混虛智照 화상의 「은해사중건기」(1862)에 의하면, 이 당시에 추사선생이 ‘은해사銀海寺’와 ‘대웅전大雄殿’, ‘불광佛光’과 같은 편액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은해사연혁변」(1879)에는 문액門額의 ‘은해사’ 현판, 종각에 걸린 ‘보화루’ 현판, 불당의 ‘대웅전’ 현판, 노전의 ‘일로향각一露香閣’ 현판은 추사선생이 쓴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글씨들은 추사선생과 오랜 교분을 가지고 있던 혼허화상과의 인연에 기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추사선생은 아버지 김노경金魯敬(1766~1837) 선생이 경상도 관찰사로 경상감영에서 근무하던 1817년에서 1818년의 기간에 경주와 대구 인근의 경상도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1818년에 추사선생이 해인사의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중건할 때 그 상량문을 지은 것은 이런 인연에 기한다.
1848년 12월 헌종憲宗(재위 1834-1849)은 추사선생을 제주도의 유배에서 해제시켰다. 55세에 시작된 8년 3개월간의 기나긴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벌이 끝났다. 추사선생은 해를 넘겨 1849년 2월에 제주를 출발하여 3월에 예산 본가를 들러 용산 본가로 돌아온 후 마포에 집을 구하여 식솔들과 함께 기거를 하고 있었다. 이 당시에 이미 유배생활로 심신이 피폐해진 60 중반의 나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아껴준 헌종이 있었기에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함께 아버지 김노경 선생의 명예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가졌던 시기였다. 은해사 편액들은 이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추사선생은 서울에 머물고 1850년 봄에는 호남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영남지역으로 행보한 기록은 없다. 글씨는 서울에서 써서 은해사로 보낸 것 같다.
마포의 집에서 가족들과 소박하게 지낼 때는 글씨를 쓰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짓는 삶으로 다시 밝은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심경도 있었기에, 집의 이름도 단계 벼루로 글씨를 쓰고 대나무 화로에 차를 끓이는 일상 속에서 시를 지으며 산다는 심경을 담아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이라고 했다. 고예서체古隸書體로 쓴 이 글씨는 현재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추사선생은 원래 한양에서 태어나 노론의 명문 대갓집 자손으로 중앙무대에서 활동기에 영남지역에 그의 글씨가 있을 사연이 희박한데 영남의 은해사에 여러 현액이 남아 있는 것은 혼허화상과의 인연 등과 같은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추사선생은 30세를 전후하여 관음사觀音寺에서 혼허화상을 만났고, 그 인연은 생의 끝자락에서 오늘날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화엄경』을 판각하는 대 프로젝트를 행할 때까지 이어진다.
추사선생과 혼허화상은 유교와 불교를 넘나들며 마음을 주고받아 온 사이인지라 추사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도 혼허화상에게 보냈다. 전고典故가 많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시이지만 그 뜻으로 보면 다음과 같이 읽힌다. 탕씨 성을 가진 이는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의 시승 탕혜휴湯惠休(?~?) 화상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혼허화상을 일컫는 말이고, 천룡일지는 『전등록傳燈錄』에 나오는 천룡일지선天龍一指禪을 뜻한다. 돼지와 죽순을 굽는 일은 북송의 동파東坡 소식蘇軾(1037~1101) 선생의 글에 나오는 일화이다.
탁오산두대립행 卓午山頭戴笠行
성탕인홀희환영 姓湯人忽喜歡迎
유방석입보리계 遊方昔入菩提界
시게금문폭포성 詩偈今聞瀑布聲
은지삼관유원력 銀地三觀由願力
천룡일지계등명 天龍一指繼燈明
소저소순추전몽 燒猪燒筍追前夢
강상추풍묘묘정 江上秋風渺渺情
한낮에 산머리 삿갓 쓰고 걸어가는데
스님이 홀연히 나와 반가이 맞아주네
그 옛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니
시와 게송에는 웅혼한 폭포소리 들리는구려
불도의 삼관을 원력으로 증득하고
천룡의 일지선으로 진리의 등불 이었는네
화상의 설법 듣곤 했던 옛 꿈을 짚어보니
가을 강바람에 속세의 정만 아득해지는구려
어쩌면 두 사람은 세간과 출세간을 넘어 평생의 지기였던 것 같다. 유학자로서 추사선생만큼 불가의 이치를 깊이 통달한 지식인은 드물었다.
추사의 파란만장한 삶과 소박한 꿈
아무튼 추사선생이 이 글씨를 쓴 그 무렵, 그를 아끼던 헌종이 8살에 왕이 된 후 15년간 학문을 좋아하는 문예군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23세의 나이로 갑자기 승하했다. 이어 다시 안동김씨 세력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먼 왕족인 원범元範이 철종哲宗(재위 1849~1863)으로 즉위하면서 헌종의 장례를 마무리하는 조천祧遷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신해예송辛亥禮訟’ 사건에서 철종을 옹립한 세력인 좌의정 김흥근金興根(1796~1870)과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후손이자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아들인 김좌근金左根(1797~1869)이 중심이 된 안동김씨 세력과 헌종 세력 간에 왕위의 정통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하게 된다. 현실의 권력투쟁에서 헌종 세력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 논쟁에서 결국 헌종 세력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던 추사선생은 그간 그를 보호해 주던 영의정 권돈인權敦仁과 함께 탄핵을 받아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다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때가 1851년이다.
이제는 신산한 삶을 뒤로 묻고 새로이 바른 길을 다시 가보겠거니 했는데 또 다시 북쪽 땅끝으로 유배를 갔다 왔으니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나는 추사선생의 글씨 가운데 당시의 심경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여손高會夫妻兒女孫’이라는 대련이라고 본다. 즉 ‘두부, 오이, 생강, 야채를 보글보글 끓이고, 부부, 아들딸, 손자 손녀들과 다함께 둘러앉아 즐겁게 먹는 것’이라는 내용인데, 세상에서 이보다 더 행복한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중국의 오영잠吳榮潛(1604~1686)이 중추가절中秋佳節에 집안 잔치를 하며 읊은 글에서 차용하여 쓴 것인데, 그는 이 대련의 협서脇書에 아래와 같이 썼다.
차위촌부자제일락상락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수요간두대황금인 雖腰間斗大黃金印
식전방장시첩수백 食前方丈侍妾數百
능향유차미자기인 能享有此味者幾人
이것은 촌에 사는 늙은이의 제일 최상의 즐거움이다
허리에 큰 황금인을 한 말이나 차고
음식을 사방 한길로 가득 차리고 시첩을 수백 명 거느리며 산다고 한들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부대끼는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소박하고 자유로운 삶에서 인생의 진미를 느끼는 달관達觀의 경지에 든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이 고관대작高官大爵을 하며 고대광실高臺廣室에서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는 것이 최고인 줄 여기지만 그것은 백로가 까마귀들이 모인 곳에 가 심신을 수고롭게 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남의 남인세력은 아예 권력에서 배제되어 그들이 받은 피해는 이루 말할 것이 없지만, 국가권력을 장악한 노론세력들도 그 내부에서 다시 권력투쟁을 벌여 서로 죽이는 일을 반복하였는데, 김정희 선생의 제주도 유배나 북청유배 사건도 이런 권력투쟁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노론세력의 국정농단은 안동김씨 세도정치라는 막장 드라마로 치닫다가 결국에는 조선을 멸망시키는 길로까지 치닫게 되지만 말이다. 백성을 위한 나라의 권력을 자기들의 권력이라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권세를 휘둘렀다. 공公과 사私의 구별은 없어진 지 오래다. 도대체 백성들의 행복한 삶과 권리라는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던 시절이다.
공자와 맹자는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것을 가르침의 중심에 놓았고, 공맹孔孟을 앞세우던 유자儒者들은 ‘오로지 백성만이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안녕해진다[民惟邦本 本固邦寧]’라는 『서경書經』의 말도 입만 열면 내세웠는데 실제에서는 그런 말과는 정반대로 행동하였다. 그러면 공자와 맹자 그리고 더 나아가 주자까지 기치로 내세워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동안에 세상에 내뱉은 말들은 모두 백성과 세상을 속이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말이었다는 말인가?
공자와 맹자가 조선시대에 다시 살아나와 이 땅에 벌어지는 모습들을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인간의 삶과 국가, 권력, 제도 등에 대해 연구해 온 헌법학자인데, 헌법원리에 의하면 국가든 권력이든 제도든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면 어떤 경우에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조선시대의 일도 과거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기준에서 정당한가 아닌가를 판별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규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땅에서 그러한 일들이 전개되던 시절에 서구의 강대국들은 세계를 식민지화하는 식민전쟁에 열을 올리며 동양세계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고, 미국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 1811~1896) 부인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 Uncle Yom’s Cabin』을 발표하여 인간의 존엄(human dignity)을 깨닫게 하고,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가속도로 전개되었다. 시대의 천재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이 『정치경제학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자유론On Liberty』와 『대의정부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 등을 세상에 내놓았다.
하기야 이 땅에는 지금도 대의정부代議政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너도 나도 국회의원을 해보겠다고 날뛰는 세상이니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일본에서는 미국의 페리함대가 나라를 개방하라고 한 후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치닫는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나가사키長崎가 개항이 되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이미 300년 전의 일이고, 네덜란드의 학문을 접하고 ‘난학蘭學’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이미 100년이 지나면서 지식과 학문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은해사 보화루에 걸린 추사선생의 현판을 쳐다보다가 생겨난 온갖 번뇌가 여기까지 가버렸다. 팔공산에 와 있는 시간에도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역사의 장면들이 떠올라 또 가슴이 답답해졌다. 진리의 향기가 온 산을 감싸고 있는 이곳 난야蘭若에서 이런 속세의 일을 생각하고 있으니 어리석은 중생이 구제되기는 틀렸지만, 그렇다고 헌법학자인 내가 이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붓다에게 매달릴 수는 없다. 이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내가 씨름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보화루의 아래 계단으로 나 있는 문 양쪽에는 앞뒤로 사천왕四天王이 그려져 있어 이 문이 천왕문의 역할도 하는 셈인데, 누樓가 천왕문의 역할을 할 수는 없고, 원래 천왕문을 통과한 다음에 붓다의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으로 금당과 마주보고 있는 것이기에 안양문, 안양루 또는 해탈문이나 불이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작합하다고 보인다.
앞마당으로 들어서면 앞으로 본전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서 있다. 과거에는 여기에 추사선생이 쓴 ‘대웅전大雄殿’의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서예가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1947~2020) 선생이 쓴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는 현판으로 교체되어 있다. 육조시대六朝時代 위비魏碑의 풍을 잘 구사한 글씨다. 북위北魏 시기의 ‘장맹룡비張猛龍碑’의 강한 서풍을 기본으로 하고 ‘정희비鄭羲碑’의 부드러움을 가미한 풍으로 썼다. ‘정희비’는 효문제孝文帝때 청주자사靑州刺史를 지낸 사대부인 정도소鄭道昭(?~516)가 써서 세운 부친 정희(426~492)의 비이다. 이렇게 현판을 교체한 것은 금당에 봉안한 불상이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이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완원의 북비남첩론과 추사의 금석문
극락보전에 걸린 현판의 글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육조풍의 서법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렇다. 청淸나라 대학자 완원阮元(1764~1849) 선생이 서법론에서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제시했는데, 여기서 북조北朝 특히 북위시대의 비석을 북비라고 한다. 완원선생이 이 문제를 제시할 때까지 사람들은 주로 남조南朝의 왕희지王羲之 이래 진당晉唐 시대의 서첩으로 전해 오는 글씨를 서법의 전범으로 삼았는데, 그는 이런 흐름을 첩파帖派라고 하고 석비에 남아 있는 북조사람들의 글씨를 공부해야 서법의 진미를 터득할 수 있다고 하는 유파를 비파碑派라고 구분했다. 그런 결과 비파의 서법론이 중요해지면서 서법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고대 청동그릇에 새겨진 글씨(금문金文)나 석비에 새겨진 글씨(석문石文), 즉 금석문金石文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부각되었다. 여기서 금석학이 본격적으로 학문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완원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호까지 ‘완당阮堂’으로 정한 추사선생이 금석문을 중요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예의 진정한 법을 탐구해 간 것은 그의 학문방법론인 실증주의적 방법에도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당시 청조 학단의 이러한 담론에도 근거를 두고 있다. 추사선생이 한반도의 고대시대의 비를 찾아 탐구한 것도 그러한 연유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와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도 찾아내었고,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䥐藏寺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의 파편도 발견하게 되었다.
추사선생은 북한산에 직접 올라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고 글자를 세밀히 살펴본 후 그 내력을 비석의 옆면에 새겨 두기도 했다. 무장사비 파편과 북한산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근래에 와서는 서예가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1927~2007) 선생이 북비의 서풍이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널리 확산시켰다.
은해사에는 오래전부터 산령각山靈閣이 있었는데, 산신을 모시는 것은 원래 불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인도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에도 없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에서 민간의 산신신앙을 흡수하여 산신각을 세우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불교사찰에는 이런 건물이 없었다. 은해사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산신탱화山神幀畵와 ‘산령각山靈閣’이라고 쓴 현판이 있다. 은해사가 중악에 위치하여 이런 건물을 세운 것은 아닌 것 같고, 요즘은 산신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유지하는 것 같다. 산신기도라는 것도 불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성철스님 같았으면 이런 것들은 모두 철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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