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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성철스님의 출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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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3 년 9 월 [통권 제125호]  /     /  작성일23-09-04 23:00  /   조회3,30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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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랜 친분이 있는 모 일간지 기자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두 번에 걸쳐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스님은 어쩌다 출가를 하셨습니까?”, “어떻게 성철 큰스님과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게 되셨습니까?”, “성철 큰스님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진실은?” 등등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늘 들어오던 질문이고 늘 해오던 대답이었지만 이번에는 인터뷰에 응하는 소납의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올 11월 3일은 성철 종정 예하의 열반 30주년이 되는 날이고, 소납이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성철 종정 예하가 열반에 드실 때까지 곁에서 모신 20여 년의 세월 속에 각인된 성철 종정 예하의 일거수일투족과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소납의 입을 통해 발현될 때마다 역사가 되고 기록이 되어 그동안 자연스럽게 성철 종정 예하의 증언자 역할을 해 오고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사진 1. 휴심정 TV, 성철스님 열반 30주기를 맞아 성철스님의 ‘영원한 시자’ 원택스님 인터뷰 화면 중 일부.

 

그리고 2012년 탄신 100주년 때 발행한 성철 종정 예하의 행장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재정리한 개정 증보판용 원고의 초고를 살펴보면서, 훗날 성철 종정 예하가 되는 청년 이영주가 오로지 깨침을 향한 한마음[一心]으로 ‘마침내 해인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게 된 인연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930년대 항일비밀결사단체 만당과 해인사

 

성철 종정 예하는 1926년 산청군 단성보통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중학교 입학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신체검사에서 탈락합니다. 서당에서 공부를 이어가며 요양차 대원사를 드나들었는데 처음엔 불교와는 거리가 없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대원사를 드나들며 불교 잡지와 불서들을 접하면서 스스로 ‘화두참선만이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대원사 탑전에서 정진하여 42일 만에 동정일여에 들게 됩니다.

 

사진 2. 범산 김법린(1899∼1964). 사진 3. 금봉(효당) 최범술(1904∼1979).

 

그렇다면 1930년대 초 해인사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청년 이영주가 해인사를 방문할 당시 해인사는 고경스님이 주지를, 범산 김법린이 강주를, 효당 최범술이 총무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원사로 청년 이영주를 만나러 갔던 효당 최범술(1904~1979)은 동경 유학 중에 범산 김법린 등과 함께 불교계의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의 주동인물로 항일투쟁을 했습니다. 귀국해서는 다솔사 주지 소임을 맡으니, 다솔사는 경남 일대의 독립운동 본거지로서 만해 한용운, 범산梵山 김법린(1899~1964) 스님 등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다솔사의 불교 강원은 1935년 9월에 해인사 강원과 통합되어 개량된 형태로 유지되고 만당 당원들이 공식적으로 생활하고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였습니다. 

 

사진 4. 다솔사 안심료.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요사. 1919년 3·1독립선언에 참여했던 한용운 스님이 이곳에 2년간 은거하며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을 조직해 한국불교의 법맥을 이은 유서 깊은 장소이다. 

 

만당의 주요 활동은 1930년대 불교계의 핵심 현안인 정교분리와 교정확립 및 불교 대중화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불교개혁 운동을 확대하는 항일불교비밀조직이었습니다. 그러나 1938년 김법린·최범술 등이 체포되면서 만당의 조직이 드러났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은 종료되었습니다.

 

오로지 마음 깨치는 데만 전념할 뿐

 

대원사 탑전에서 묵묵히 화두 참선에 정진하는 청년 이영주를 지켜보던 대원사 주지는 마침내 해인사 주지 고경 큰스님 앞으로 편지를 쓰게 됩니다.

“훤훤장부인 청년이 탑전에서 용맹정진하고 있습니다. 대원사에는 큰 선지식이 없으니 이 청년을 해인사로 인도하여 큰 도인이 되게 지도해 주십시오.” 

 

해인사 주지 고경스님께서는 말사에서 보낸 간곡한 편지를 무시하지 않고 마침내 총무부장 효당스님을 대원사로 보내 ‘청년 이영주’를 해인사로 인도할 책임을 내립니다. 대원사를 찾은 효당스님이 청년 이영주에게 “대원사 주지스님이 본사 해인사 주지 고경스님에게 신심 있는 청년이 탑전에서 용맹정진하고 있으니 해인사로 가서 빨리 도를 깨치도록 지도해 주시기 바란다고 서신을 보냈네. 고경 주지스님께서 산중의 어른스님들과 의논하여 청년과 함께 해인사에 가려고 내가 왔네.”라고 하였습니다.

 

사진 5. 대원사 탑전. 성철스님은 42일 만에 동정일여의 경지에 들었다.

 

“총무부장스님! 소인을 위해 이렇게 먼 길을 찾아주시다니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절에 와서 지내다 보니 살생을 금하는 게 불교의 근본인데, 경찰서장이 온다고 하니까 큰 돼지를 잡고 술 몇 통을 메고 개천에 나가 천렵이나 하고 합니다. 저기 보십시오. 빨랫줄에 기저귀가 널려 있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는 승려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사상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불경을 보니까 불교가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그래서 참선을 하려고 찾아왔는데 절이 이 모양입니다. 저는 오로지 마음 깨치는 데만 전념할 뿐 스님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절 분위기가 이렇게 된 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때문이지 우리의 전통은 아니지 않은가? 해인사에는 용성 큰스님, 만공 큰스님이 계시는데 내가 자네를 데리고 오리라 기대하고 계신다네. 참선 공부는 선지식을 잘 만나서 정진해야지 젊은이 혼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니 잘 생각해 보시게.”

 

이렇게 설왕설래하다가 효당스님은 “젊은이 잘 생각해 보시게!”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혼자 가셨습니다. 청년 이영주는 효당스님과 호기롭게 대화를 하고 헤어지긴 했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면서 “과연 내가 대원사에서 혼자서 마음을 깨칠 수 있을까? 해인사로 가서 큰스님들의 지도를 받는 게 옳은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침내 혼자 해인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진 6. 윤고경(1882~1943) 스님. 1942년 해인사 삼층석탑 앞에서.

 

며칠 동안 120㎞ 300리 길을 걸어 마침내 해인사에 당도하였습니다. 지객의 안내를 받아 고경 주지스님을 찾아뵙고 삼배의 인사를 올렸습니다. 

“주지 큰스님! 저는 오로지 부처님처럼 마음을 깨치려 해인사에 왔습니다. 소인을 잘 지도해 주십시오.”

“청년이 홀로 이 산중을 찾아주니 고맙기 그지없소. 우리 마음을 터놓고 얘기나 해 봅시다.”

이렇게 하여 청년 이영주는 주지 스님인 고경스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다시 시작하여 밤이 새도록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미 동정일여의 경지를 증득한 청년 이영주가 주지스님을 감동시켰던 듯합니다. 새벽이 되자 고경스님께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고 하셨습니다. 

 

“혼자 공부하였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밤새도록 대화를 나눌 수가 있는가? 어떻게 공부하였는지 참으로 대단하오. 아침 먹고 원주에게 일러둘 터이니 퇴설당 선방에서 정진할 수 있도록 조처하리다.”

청년 이영주의 해인사 퇴설당 선방 첫 인상기입니다. 성철 종정 예하께서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주스님에게 안내되어 선방에 들어서니, 먼저 원주스님이 입승스님에게 주지스님의 뜻을 전한 듯 10여 명 대중 스님들의 기세가 잠잠하였제. 대중에게 삼배를 올리고 마련된 끝자리에 좌정을 하고 둘러보니 분위기가 풀어져 있는 모습들이어서 실망천만이었지. 해인사 선방에 들면 정진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분기탱천한 모습을 볼 줄 알았는데 말이다. 며칠 지나면서 처음의 어색함이 좀 사라지길래 고참 수좌 스님에게 ‘지금 무슨 화두를 들고 정진하십니까?’라고 물으니, ‘화두? 조주라 카든가 개라 카든가 아마 그렇지?’라고 대답하는 말을 듣고 기절할 뻔했제. 그렇게 분위기를 두루 살펴보니 화두를 들고 열심히 정진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냥 막말로 화두고 뭐도 없이 흔들거리며 앉아 있기만 한 모습이었지.”

 

동산스님께서 성철이라는 법명을 내리시다

 

대중은 그런 수준이었고, 며칠 지나자 산중의 노스님들께서 “똑똑한 젊은 수좌가 새로 입방했다면서…. 내 상좌가 될랑가 싶어 와 봤어!” 하며 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강주 소임을 맡은 범산 김법린 스님이 찾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청년, 곧 삭발하고 스님이 되겠구먼. 내 고경 주지스님에게서 자네에 대한 자세한 소식은 다 들었네. 지금 선방에 앉아 있자니 만감이 교차하겠지. 스님이 되면 강당으로 가서 한문도 익히고 5년이고 10년이고 여러 대승경전들을 공부하는 것이 학인스님의 본분 아니겠나. 지금 흔들거리고 앉아 있는 수좌들은 경 한 줄도 모르고 무식하기 짝이 없어! 선방에 앉아만 있지 말고 내가 곧 일본으로 가려고 하는데 나하고 일본 가서 학문적으로 불교를 공부하여 대 석학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야말로 자네에게 옳은 길이라 믿네. 나하고 같이 일본 유학을 가세.”

범산 김법린 스님이 올 때마다 일본으로 유학 가자고 졸라대서 마침내 한 말씀 드렸다고 합니다.

 

사진 7. 동산혜일(1890~1965) 스님.

 

“강주스님, 저는 화두를 깨쳐 견성성불하려고 해인사 선방에 왔습니더. 불학을 익혀 학승이 될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유학을 가는데 왜 절 돈으로 갑니까? 고향 부친께서 부농이시니 유학을 간다면 그 돈으로 가지 절 돈으로는 유학 갈 생각이 없습니다.”

강주 김법린 스님과 유학 문제로 입씨름을 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 가고 있던 어느 날, “나는 백련암에 있는 스님이다. 마음을 깨치기 위해서라면 장발로 선방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이것이 너에게 주는 법명이니 잘 간직해라.” 하고는 한 스님께서 표연히 뒤돌아가시는데 지금까지 다녀가신 스님들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느껴졌습니다. 그 스님께서 던져 놓고 가신 종이를 펼치니 ‘성철性徹’이라는 법명이 쓰여 있었습니다. 

 

사진 8. 성철 사미의 모습.

 

며칠 뒤 방선시간에 물어 두었던 백련암을 찾아 올라갔습니다. 일주문도 없는 암자로 입구에 원통전과 좌선실, 천태전과 영자당(당시 산신각)의 소박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객스님에게 “선방에서 청년이 어른스님을 찾아뵈려 왔다.”고 전해 주십사 하니, 큰스님이 나오시더니만 “올라오기는 왔구먼.” 하시더니 시자에게 “이 청년에게 오늘 오계를 줄 터이니 삭발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이영주는 스님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올라왔는데 졸지에 큰스님의 명령에 따라 스님들에게 이끌려 삭발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뭐라 항변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오계를 받고 입고 있던 속복을 벗고 백련암에서 새 먹물 옷으로 갈아입으니 천생 스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산 큰스님은 그 자리에서 사미계를 주시며 성철이라 부르며 “도를 이루는 것은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지금보다 더욱 열심히 정진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셨습니다. 

 

청년 이영주에게 성철이라는 법명을 주신 큰스님은 바로 용성진종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신 동산혜일東山慧日(1890~1965) 스님이셨습니다. 동산스님은 범어사가 본사였는데 그때 마침 해인사 조실로 오셔서 백련암에 주석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청년 이영주는 이렇게 순식간에 1936년 1월에 백련암에서 삭발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삭발하고 먹물 옷을 입고 선방에 내려오니 모든 대중들이 눈을 휘둥그레 굴리며 “중은 안 된다고 고집 부리더니 무슨 일이고?” 하며 웅성거렸습니다. 청년 이영주, 아니 사미 성철은 밤새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마음을 깨치는 길은 스님이 되는 길뿐이다.”라고 마음을 정하고 출가시를 읊었습니다.

 

미천대업홍로설 彌天大業紅爐雪

과해웅기혁일로 跨海雄基赫日路

수인감사편시몽 誰人甘死片時夢

초연독보만고진 超然獨步萬古眞

 

하늘에 넘친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 속 세상에서 꿈을 꾸며 살다 죽어가라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나 홀로 걸어가노라.

 

용성스님의 입적과 성철스님의 오도송

 

동산스님은 3월에 성철 사미와 함께 해인사를 떠나 범어사에 주석하셨습니다. 1936년 동산스님께서 47세 되던 해 11월 18일 용성 큰스님으로부터 동국계맥으로 유명한 칠불계맥을 전수받아 전계사가 되는 큰 법요식이 펼쳐졌습니다. 성철 사미는 그 장엄한 장면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됩니다. 성철 사미는 1937년 3월 24일 범어사에서 운봉화상으로부터 비구계를 수지하였고, 다음해 내원암에서 노스님이신 용성 대종사를 시봉하면서 하안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사진 9. 용성진종(1864~1940) 스님.

 

용성 대종사께서는 일제강점기에는 스님들을 스님이라 부르지 않고 일본말로 센세이[先生]라고 호칭하였는데, 손자인 성철스님을 부를 때는 ‘성철수좌’ 또는 ‘성철스님’이라고 늘 부르셨다고 합니다. 손상좌 성철 비구가 용성 큰스님께 “저를 스님이라 부르시니 사숙님들께 무안해 못 견디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아니다. 그들은 센세이라고 불러도 너는 스님이라 불러야겠다. 괘념치 말아라.”라고 하셨다 합니다. 

용성 대종사께서는 “나와 함께 서울 대각사로 가서 나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고 합니다.

 

“노스님께서 서울에 함께 가자고 하도 간곡하게 말씀하셔서 부산역까지 모시고 가서 짐을 실어드리고 나는 도망쳤지. 그런데 범어사는 동산스님이 무서워 못 가고,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를 났지.”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면 독립선언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 등에 매진하던 용성스님이 성철스님을 시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 챈 성철스님이 사회활동보다는 견성성물이라는 초심의 길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1937년 가을에 용성 대종사 노스님과 헤어지고 통도사 백련암, 범어사 내원암, 은해사 운부암, 금강산 마하연선원, 동화사 금당 등 제방선원에서 동안거·하안거를 나며 용맹정진을 하였습니다. 

 

사진 10. 성철 종정 예하의 친필 오도송.

 

그런데 용성 대종사께서는 1940년 (음) 2월 24일 대각사에서 세수 77세, 법랍 62세로 원적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성철스님은 1940년 마하연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은해사 운부암에 잠시 머무르다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동안거 용맹정진을 하던 중에 마침내 칠통을 타파하고 오도송을 읊으셨습니다. 한국불교 역사에 새 장이 열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철 종정 예하께서 출가를 한 1936년은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의 속국이 되어 있던 시기로 민족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험난한 시절인연 속에서도 성철 종정 예하의 “오직 마음을 깨친다.”는 강건한 원력이 있었고, 용성·동산 당대의 큰 스승을 모시는 행운이 있었기에 성철 종정 예하의 인생도 더 빛이 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철 종정 예하의 열반 30주기를 한 달여 앞두고 출가 인연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성철 종정 예하의 투철한 불심을 우리들 마음에 옮겨심기를 바랍니다.

 

노트 : 금봉(효당, 최범술) 스님은 해방 이후 환속하여 1948년 사천, 삼천포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셨으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습니다. 범산(김법린) 스님도 해방 이후 환속하여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였습니다. 1952년 문교부 장관, 1963년 동국대 총장을 역임하였고,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두 분은 일제강점기에는 승려로서 변질된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셨고, 광복 후에는 국가발전을 위해 정치가로서, 교육자로서, 학자로서 헌신한 불교계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활동가들입니다. 국가와 불교발전을 위한 그분들의 헌신을 추모하며, 성철 큰스님의 출가에 얽힌 인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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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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