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다종교 시대 불교의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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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3 년 12 월 [통권 제128호] / / 작성일23-12-04 14:27 / 조회1,910회 / 댓글0건본문
제가 지난 1년 동안 <심층종교와 불교>라는 제목으로 연재해 오던 글을 이번 달로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심층종교로서의 불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종교 분야의 거장 두 분을 떠올리게 되고, 이 분들을 통해 불교가 오늘 같은 다종교 시대에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소개하고 싶습니다.
동방으로부터의 선물
첫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입니다. 머튼은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사상가 중 한 분입니다. 가톨릭 트라피스트 봉쇄수도원의 수도사였던 그는 신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작가, 시인, 사회운동가, 비교종교학자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는 타일랜드에서 있은 학회에 참석했다가 아까운 나이에 감전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쓴 수많은 책 중에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는 20세기 최고의 비소설 분야 100권에 속할 정도로 유명한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이라는 자서전이 있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Mystics and Zen Masters, Zen and the Birds of Appetite, 『장자의 길(The Way of Chuang)』 등 동양종교에 대한 책들입니다. 그의 절친 에드워드 라이스(Edward Rice)가 쓴 머튼 평전 The Man In the Sycamore Tree에 의하면, 머튼이 그의 생애 후반에는 ‘날이 새고 날이 저물 때’까지 선불교와 동양 사상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그가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에서 찾아온 동방박사와 관련하여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그의 별을 보고 이스라엘로 찾아와 헤롯 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을 불러 문의한 결과, 그곳이 베들레헴일 것이라 일러주고, 가서 아기를 찾거든 돌아와 자기에게 말해 주면 자기도 가서 경배하겠다고 했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동방박사들은 아기가 있는 집에 들어가 아기를 보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한편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해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줄로 알고 베들레헴에 태어난 갓난아기들을 모두 죽이라고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돌아간 후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하여 다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그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살았다고 합니다.(마2:13~15) 저는 올해 2월 이집트를 방문해서 아기 예수가 피난 와서 살았다고 하는 곳과 그 위에 세워진 ‘아기 예수 피란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머튼은 이 이야기를 확대하여 이 세 식구가 이집트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물어봅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일까 하는 문제가 있겠으나, 문맥상으로만 보면 분명 동방박사들이 갖다 준 그 값비싼 선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을 것이라 봅니다. 이번 이집트 방문에서 알게 된 것은 황금도 비싸지만 특히 몰약이 미라를 만들 때 미라의 부패를 막는 항균제로 쓰이는 값비싼 재료라는 것입니다.
머튼은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에서 온 선물이 그리스도교 발생에 도움을 주었던 것처럼, 20세기가 지난 오늘 그리스도교가 새롭게 활기를 되찾으려면 다시 동방으로부터 선물이 와야 하는데, 그것이 선禪 불교와 노장老莊 사상 같은 동양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간과 그 문명 자체를 위협하는 비극을 촉진시키는” 일을 늦추기 위해서라도 동양의 정신적 유산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양의 정신적 유산이란 역사적 불교나 도교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역사적 종교를 배출하게 된 인류의 보편적 영적 바탕인 “명상과 침묵과 신비적 체험 속에서 만나는 ‘신 넘어의 신’에 대한 체험” 같은 종교 심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환골탈태하는 길
둘째, 라이먼 파니카(Raimon Panikkar, 1918~2010)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학자 파니카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힌두 아버지와 가톨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28세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철학박사 학위, 40세에 화학박사 학위, 43세에 로마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저도 1974년 스코틀랜드 랑카스터에서 열린 세계종교사학회(IAHR)에서 그분을 만나 뵌 적이 있는데, 몸 어디에 무슨 스윗치가 있는가 할 정도로 스위치를 트는 족족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등이 술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파니카 교수는 1946년 로마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고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가 되었고, 1966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방문 교수로 왔다가 1972년부터 산타바바라의 캘리포니아(UC Santa Barbara) 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취임, 정년퇴직까지 그 직에 머물면서 저술과 강연과 제자 양성으로 크게 공헌했습니다. 저의 절친 중 한 분인 미국 George Mason 대학 노영찬 교수도 파니카 교수 밑에서 학위를 받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과 함께 스페인을 방문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노영찬 교수 주최로 금년 10월 11일부터 국제 파니카 학회가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서 열렸습니다.
파니카는 현재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가 기진맥진한 상태라고 진단합니다.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한국에서도 교인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그의 진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까 하는 문제를 두고 다음과 같은 제안을 제시했습니다.
“거의 자명한 사실은 서방 그리스도교 전통이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이 시대를 위해 의미 있는 방법으로 표현하려 노력하지만, 탈진한 것처럼, 심지어는 기진맥진한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종교배(cross-fertilization)와 수정(fecundation)을 통해서만이 현 상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고, 오로지 현재의 문화적·철학적 경계를 넘어설 때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다시 창조적이고 역동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종교배’, ‘수정’, ‘문화적·철학적 경계를 넘다’라는 말은 결국 기독교가 구미 중심에서 벗어나 동양과의 대화를 촉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1954년 가톨릭 사제의 자격으로 인도에 갔는데, 인도에서의 경험을 두고 그는 “내가 유럽을 떠날 때는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인도로 가서는 내가 힌두교인임을 발견하고, 돌아올 때는 불교인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임을 그만둔 적은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혼자서 그리스도인, 힌두교인, 불교인이라는 ‘삼중 교적(triple membership)’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종교배’, ‘수정’, ‘문화적, 철학적 경계를 넘다’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입니다.
나가면서
이런 생각이 이 두 분 거장의 생각만은 아닙니다.1) 지금 그리스도교가 불교와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은 그리스도교에서 생각 깊은 이들이라면 공유하는 생각입니다. 문제는 이런 시점에 한국불교가 그리스도교와 진지한 대화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복 일변도로서의 불교는 서양에 공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보다 주로 믿음을 강조하는 서양 종교를 위해 깨달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데 공헌할 수 있는 것이 불교가 서양에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물이 되고, 이로 인한 ‘이종 교배’로 피차간에 아름다운 새싹이 돋아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각주>
1)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로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2001) 등 여러 책을 지은 성공회 주교 쉘비 스퐁 신부와 ‘새롭게 등장하는 기독교’를 밝혀주는 『기독교의 심장』(2009) 등 많은 책을 저술한 마커스 보그 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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