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새 장경각 건물과 환희심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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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4 년 1 월 [통권 제129호] / / 작성일24-01-05 13:42 / 조회2,399회 / 댓글0건본문
원택스님 발행인
1972년 1월에 백련암으로 출가하려고 산비탈길을 올라와 서니 일주문도 없고 삼 칸 기와집과 원통전으로 연결되는 담 사이에 평범한 두 쪽문이 있었는데, 인기척을 듣고 행자님이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좌선실이라는 현판을 단 큰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있고, 그 앞에 사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경각藏經閣이라는 현판이 걸린 10여 평 크기의 콘크리트 사각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고심원을 짓게 된 인연
출가하여 백련암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에서야 장경각은 큰스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불서들이 만여 권 가까이 보관되어 있고, 책이 필요하실 때마다 직접 장경각의 쇠문을 여시고 들락날락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장경각의 열쇠는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시고 손수 보관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납이 출가해서 20여 년 큰스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장경각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 제대로 설명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기억입니다.
출가해서 한 15년쯤 지났을 때인가 봅니다. 그 시절부터는 어쩌다 한 번씩 열쇠를 건네주시며 “어디 어디에 있는 책장 몇 단의 앞에서 열두 번째 책을 가져오너라.”는 식으로 책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그 위치를 기억하기 위해 몇 번이고 입으로 되뇌고 되뇌이면서 장경각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책장 앞에만 서면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몇 단 몇째 줄에 대한 기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서 기억의 끝단을 잡고 어렵사리 책을 찾아 올리면 그중 서너 번은 대체로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때도 큰스님께서는 책 이름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또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 하루는 큰스님께서 “내 나이가 이제 팔십이 되어 가니 책을 보관하는 저 나무 궤짝의 문틀이 이리저리 틀어져 문을 열기가 힘들다. 그러니 장경각을 새로 짓되 개가식으로 만들어 마음대로 책을 꺼내 볼 수 있도록 도서관을 세워 보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장소를 정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니 지금 고심원古心院이 들어선 자리를 정해 주셨습니다.
큰스님의 하명은 받았으나 누구와 의논할 상대도 없고 한데 그래도 불사에 경험이 많으신 불필스님을 찾아가 의논을 하였습니다.
“제가 출가하여 사찰의 건축에 대한 아무 지식이 없어서 목수에게만 맡기고 법당으로 적광전을 잘 지어 달라고 했는데 비용 문제로 입궁집을 짓고 말았습니다. 큰스님께서 책 보기 편하게 장경각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혹시 나중에 큰스님 추모기념관이 될 수도 있을 터인데, 어떻게 하면 잘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인홍스님을 모시고 석남사 불사를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장경각을 잘 지을 수 있도록 좋은 목수와 논의 해보겠습니다.”
“스님, 저는 절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 큰스님께서 편하게 책을 보시고 또 차후에 기념관이 될 수 있도록 애써 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고심원 불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층은 일반 대중실로 하고, 2층은 장경각 도서관으로 쓰도록 35평형 외外 5포집 법당형으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심원의 벽채를 다 바르고 막 문을 달려고 하는데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고심원을 다 짓고 나니 고민이 생겼습니다. 장경각의 책을 고심원으로 옮기자니 책을 볼 주인은 열반에 드셨고, 게다가 개가식으로 진열했다가는 귀하게 간직해 온 책들을 잘못하면 한꺼번에 도둑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뭔가 다른 방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1층 대중실 방 안쪽 1/3을 서고로 만들어 장경각에 있던 책들과 틀어진 책장 등을 옮겨오고, 그 후에 서가를 현대식으로 바꿔 지금까지 보관해 오기에 이르렀습니다.
『성철스님의 책』으로 정리된 장경각 고문헌들
그렇게 1층 일반 대중실 안쪽 구석진 곳에 장경각 서책들을 안전하게 모시긴 했지만 항온·항습은 거의 제로인 상태로 30여 년을 보관해 왔으니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소납의 걱정은 태산처럼 커지기만 하였습니다.
큰스님 계실 때에는 가을 어느 날, 한지로 된 책들을 모두 꺼내 햇볕에 쬐고 바람에 말리는 포쇄 운력을 하루 종일 했는데, 살면서 그런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세월만 보냈으니 큰스님께 무슨 말씀을 올릴 수 있을지 감당이 안 되는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사업단(ABC사업) 집성팀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2017년 8월부터 2020년 9월까지 3년간에 걸쳐 ‘해인사 백련암 성철스님 소장 고문헌’이라는 프로젝트로 장경각에 소장되어 있던 서책 중에서 고문헌들을 조사하고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학술원 집성팀은 큰스님께서 작성하신 <수다라총목록修多羅總目錄>을 참조하며 고문헌들을 촬영하고 책마다 첨지에 서지 사항을 기록하고 번호를 붙여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조사한 결과를 2021년 『성철스님의 책』으로 발간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신집성문헌 소장자에 올려 큰스님께서 장경각에 소장하고 있었던 서책 중 고문헌들을 누구나가 손쉽게 인터넷(https://kabc.dongguk.edu/index)으로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사차 내려온 연구원들은 서책이 보관되어 있는 곳을 보고는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처음엔 아무런 보호 시스템 없이 눅눅한 곳에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소납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30년 동안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 변명할 수도 없고 그저 부끄럽고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소납은 어떻게 책을 조사하는지 도대체 무슨 책들이 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그저 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일주일쯤 지나서 한 연구원이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원택스님, 처음에는 큰스님이 남기신 이 귀한 문화유산을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보관해 오시다니 하고 백련암 스님들에게 무척 서운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쯤 고서들을 정리하다가 저희들은 ‘스님들이 정성을 들이지 않은 게 오히려 참 다행이다’라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한지로 만든 책들은 일정한 습기가 있어야지 바스러지지 않고 잘 유지가 되는데, 이곳은 습기가 있어 좀 눅눅하기는 하지만 책에 해를 끼칠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잘 간수하신다고 무식하게 부지런을 떠신 것보다는 손 타지 않는 곳에 이대로 두셨던 것이 다행 중 다행입니다. 큰스님의 덕화가 여기까지 미친 듯합니다.”
그 연구원의 말을 들으면서 성철 종정 예하께서 상좌들에게 장경각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던 의미를 제 나름대로 깊이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상좌들에게 소장하고 계신 장서들의 가치를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으셨기에 상좌들도 무심히 지나치며 장경각 책들은 큰스님만 보시는 거라고만 생각하고 살아왔다. 만일 그 책들의 귀중함을 자주 자랑하셨다면 이 30년의 세월 동안 지금처럼 잘 보관해 올 수 있었을까? 상좌들을 무식하게 만들어 놓으셨으니까 오늘날까지 한 권도 누락 없이 보관되어 온 게 아닐까? 역시 큰스님의 큰 지혜로움이시구나.’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사업단(ABC사업)집성팀의 조사와 연구로 백련암 소장 고문헌들이 『성철스님의 책』으로 발간되고,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게 되고, 백련암 불서 조사 완료 학술세미나가 개최되는 등, 80여 년 큰스님의 그늘에 가려 있던 장경각의 고문헌들이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날이 온 것입니다. 그러한 일로 인해 2021년 가을에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30여 평의 새로운 장경각을 짓기 시작하여 2023년 11월에는 단청까지 마무리하였습니다. 2024년 6월까지 항온·항습 장치까지 완비하면 고심원 1층에 있는 고서들 가운데 중요한 서책들을 새 장경각으로 이운할 예정입니다.
되살아나는 초보스님 시절의 에피소드
이렇게 장경각 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보니 백련암 가람의 전체 배치가 뜻하지 않게 정리되었습니다. 적광전에서 시작하여 관음전, 천태전, 영자전, 고심원, 좌선실, 원통전, 장경각, 정념당으로 흐르는 건축선이 백련암의 위엄을 충분히 살려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소납은 단청을 마친 장경각을 들러보며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50여 년을 살면서 장경각이 이렇게 우뚝 선 걸 보니 이제 마음이 놓이네’ 하며 혼자 슬며시 미소를 지었습니다. 또 한편 장경각을 이 자리에 짓고 보니 소납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살아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출가하여 행자 시절과 초보스님 시절을 보낼 때입니다. 겨울 지나 삼월이 오면 나무들에 물이 오르기 전에 ‘물구리’라고 하는 가는 나무들을 꺾어 아궁이의 불쏘시개를 만들려고 산으로 나섭니다. 물구리는 절에서 쓰는 말인데, 갓난아기 팔뚝 굵기만 한 나뭇가지를 일컫습니다. 보통 50단쯤 부엌 근처에 쌓아 두고 봄부터 가을까지 사용합니다. 절 근처에는 그런 나무가 없으니 산에 올라 골짜기를 다니며 물구리를 찾아 한 짐씩 지고 오는 울력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도시에만 살다가 온 저에게는 농촌 일 모든 것이 서툴러서 주위의 스님들에게 핀잔도 다반사로 듣고 지내던 때였습니다. 그날도 단단히 주의를 듣고 지게를 지고 산을 올랐습니다. 산을 다 올라와서는 선임 스님으로 당부가 있었습니다.
“지게를 지고 올라올 때보다 짐을 지고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 반드시 몸을 돌려 산에 붙이고 지게발은 허공으로 가게 하여 조심조심 내려가야 한다.”
앞선 스님들은 지게에 물구리를 한 짐씩 지고 잘도 내려갔습니다. 끝 차례가 되어 다른 스님들의 반이나 될까 말까 하는 양의 물구리를 지게에 묶고 산을 내려가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성큼성큼 내려가는 스님들의 모습에 정신이 홀려 몸을 돌려 지게발을 허공으로 가게 하고 내려오라는 당부를 깜빡 잊고 지게발이 뒤로 인 채로 지게를 지고 한 계단 발을 내딛을까 말까 하는 순간에 뒷 지게발이 뒤에 있던 바위를 치며 순식간에 몸이 붕 뜨더니 20~30m나 되는 허공을 날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주위의 도움으로 깨어 일어나보니 지게는 지게대로, 물구리단은 물구리단대로, 안경은 안경대로 어디론가 다 날아가 버리고 소납은 산골짜기에 거꾸로 박혀 있었습니다. 다행히 깊은 산속인데도 바위는 피하고 두껍게 쌓이고 쌓인 낙엽 더미 위에 떨어져 큰 사고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그 소식을 늦게 들으시고는 방문을 벌컥 여시고 한 말씀 하셨습니다.
“굼벵이도 꿈틀거리는 재주는 있다카더니 니놈도 그 순간에 어찌 지게 벗을 생각을 했노. 니가 지게를 벗었으니 살았제 지게하고 같이 굴렀더라면 지금 백련암은 초상 치른다고 시끄러울 뻔했제!”
이제 그 자리에 큰스님께서 아끼시던 장서들을 잘 모실 수 있는 장경각을 새로 지으니 감회가 새롭기만 합니다. 게다가 새 장경각 앞뜰에서 가야산 서북쪽을 바라보는 경관은 백련암의 새로운 명소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화두 참구, 환희심의 세계로
지난해는 성철 종정 예하의 열반 30주년을 맞이하여 나름 분주하게 한 해를 보냈습니다. 열반 30주년을 기념한다는 게 불교계에선 드문 일이기도 하고, 또 한 세대가 지나고 보니 특히 젊은 MZ 세대들로부터 “성철스님이 누구야?”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역시 큰스님의 법력과 영향력은 곳곳에 그 자취가 남아 있어서 언론에서도 크게 관심을 가져 주었습니다. 조선일보는 뉴스Q <나의 현대사 보물>이라는 코너에 원택스님의 현대사 보물 중 두 번째 보물로 ‘책 보지 말라던 성철스님의 1만여 권 장서’를 소개해 주었고, 동아일보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만나도 만나지 못한 것 같아’라는 제목으로 큰스님과 소납의 사진을 실어 추모를 해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문화일보의 M인터뷰는 ‘성철스님 받들다 보니 어느덧 50년’이라는 제목으로 전면 인터뷰를 실어 주었습니다. 그 기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한국 현대불교의 가장 유명한 고승이 남긴 무거운 이름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삶이 원택스님의 참선이고 수행인 셈이다.”
소납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 글을 쓴 기자님에게 마치 장군죽비로 경책을 받은 듯 충격에 빠졌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평소에 “늘 지성으로 화두를 간직하여 성불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가르침을 따르기는커녕 상기병과 심한 디스크를 피난처로 삼으며 백일법문, 성철스님법어집, 선림고경총서 발간, 성철스님기념사업 등 성철사상의 전법을 제 소임으로 여기고 비구 반평생을 살아온 죄가 하늘에 차고 넘치는 것을 어찌 알았을꼬!! 싶었습니다. 큰스님을 처음 뵙고 3천배를 마치고 받은 첫 말씀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하는 ‘불기자심不欺自心’이었건만 스스로를 속이고 살아온 것이 탄로난 듯, 큰스님께 참회하고 또 참회를 했습니다. 이제는 상기병도 사라지고 디스크도 잦아들었으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화두 참구와 정진으로 돌아와 남은 시간을 환희심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2024년 새해를 맞이하는 『고경』 독자 여러분들도 긍정적인 자세로 자기와의 대화를 하면서 환희심으로 가득 찬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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