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본분사를 넘어 대승정신을 실천했던 백일법문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백일법문 해설]
선의 본분사를 넘어 대승정신을 실천했던 백일법문


페이지 정보

서재영  /  2013 년 6 월 [통권 제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9,187회  /   댓글0건

본문

선가의 생명선 본분사

 

“나는 여기서 본분사로서 사람들을 대한다. 만약 근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면 삼승 십이분교가 있게 되느니라.” <백일법문>의 첫머리를 장식한 이 구절은 조주(趙州) 선사의 말씀이다. 성철 스님은 조주 선사의 서릿발 같은 이 말씀을 통해 선의 근본정신을 밝히고 백일법문이 지향할 방향을 제시한다. 조사선의 기본 입장은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이미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모든 중생은 그 자체로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이므로 달마대사는 범부중생과 부처님이 근본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번뇌의 먹구름에 가려 자신의 본래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열등한 존재라고 비하한다. 위대한 성인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중생이라는 속박에 갇혀 옹색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선은 그와 같은 거짓 인식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바로 통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여래와 견주어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자신의 본래 성품을 확고히 깨닫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번뇌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자신의 본래 성품을 바로 볼 때 인식의 속박과 중생이라는 한계는 모두 사라지고 무량한 공덕의 삶을 살게 된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버리고,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조주 선사는 본분사(本分事)라고 했다.

 

본분사란 감각의 대상을 따라 밖으로 질주하는 욕망을 멈추는 것이며, 온갖 번뇌를 따라 방황하는 유랑의 삶을 멈추고 본성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이야말로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진정한 고향이므로 옛 조사들은 그 세계를 ‘본분가향(本分家鄕)’이라고 했다. 중생이 돌아가야 할 고향은 자신에게 내재된 거룩한 자성을 완전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그와 같은 고향집으로 돌아 간 중생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거룩한 존재이다.

 

선지식과 스승의 역할은 제자들을 바르게 지도하여 본래 자신의 자리, 중생의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옛 스승들은 ‘몽둥이[榜]’로 학인들을 다스리기도 했으며, 정신이 번쩍 들도록 ‘큰 소리[喝]’를 버럭 지르기도 했다. 조사들의 성품이 괴팍해서가 아니라 깨침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었음으로 그와 같은 가르침을 ‘본분초료(本分草料)’라고 했다. 먼 길을 가는 우마(牛馬)에게 사료가 필요하듯이 본분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자양분이 되는 양식이라는 것이다.

 

결국 조사들은 제자들을 본분의 세계로 이끄는 분들이며, 조사선은 본분가향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스승들의 지도는 본분의 고향으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밑거름과 같은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본래 모습을 깨달은 사람을 본분인(本分人) 또는 본분종사(本分宗師)라고 하니,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

 

이렇게 보면 선의 핵심은 복잡한 논리와 장황한 달변이 아니라 중생들을 본분의 고향으로 즉시에 돌아가게 하는데 있다. 밤길을 헤매면서 지친 나그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즉시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지 자리에 앉혀놓고 어둠은 무엇이고 빛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성철 스님은 본분사에 충실하는 것이야말로 선의 생명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본분의 고향으로 단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생의 근본은 모두 같지만 각자의 그릇에 따라서 빠르게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더디게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근기가 예리한 사람은 한 송이 꽃으로도 충분한 것이 선이다. 다만 더디게 깨닫는 사람들을 위해 논리를 동원하고, 자세히 설명하다 보면 자연히 말이 많아지고, 논리가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말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바로 전하는 것이 선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말과 논리에 의지하지 않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가섭에게 여래의 마음을 전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그 뜻을 단박에 알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그들의 근기를 따라서 평생에 걸쳐 설법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여래가 일생에 걸쳐 설법한 것이 바로 여래의 말씀이며 십이분교로 확장된 가르침이니 이를 교(敎)라고 한다.

 

선의 길은 근기 낮은 중생들을 위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말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바로 핵심으로 들어가고, 가장 빠른 지름길을 지향한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교(敎)의 길을 ‘활[弓]’로 비유했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활 모양처럼 교학의 길은 근기를 따라 빙빙 돌아감을 비유한 것이다. 반면 선(禪)의 길은 ‘활의 시위[弦]’로 비유했다. 이런 저런 복잡한 것을 딱 잘라서 핵심으로 바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의 길은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로 표현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자신의 본래 성품을 깨닫게 하여 마침내 부처를 이루게 하는 길이 선이기 때문이다. 선을 일러 경절문(徑截門)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돌아가지 않고 깨달음으로 바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자비와 대승의 법문

 

선사들은 오직 자성을 깨닫게 하는 본분사로만 사람들을 대할 뿐 근기에 따라 설명하지 않는 것이 선가의 생명선이다. 선의 세계는 말을 세우지 않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고 조사선의 돈오정맥을 주창하는 대표적인 선승이었다. 그렇다면 성철 스님은 빙빙 돌아가는 교학의 길과 언어의 길을 멀리하고 본분사만을 논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백일법문>은 방대한 경전을 하나하나 인용하고, 불교사상의 정수를 두루 섭렵하고 있다.

 

초기불교에서 시작하여 중관, 유식, 천태, 화엄을 거쳐 선종에 이르는 불교사상의 준령들을 세심하게 섭렵하여 백일법문이라는 장광설을 쏟아내고 있다. 이는 스님께서 그렇게 강조하던 조사선의 길도 아니고, 선의 생명선도 아니다. 그렇다면 스님은 왜 선가의 본분사를 버리고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을까? 스님은 <백일법문> 서두에서 “이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닌 줄 알고 들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서 불교의 근본 뜻을 말해 보고자 합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스스로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서 불교의 근본을 밝히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백일법문은 직지(直指)의 길을 버리고 중생의 근기를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을 의도적으로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성철 스님은 일생에 걸쳐 철저한 수행으로 일관하고 수좌들에게 책보지 말 것을 강조하며 오직 간화선을 통한 경절의 한 길만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지름길 대신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으며, 본분사라는 선의 핵심 대신 중생의 근기를 따라가는 언어와 교학의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야말로 백일법문의 진정한 매력이며, 선승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진 성철 스님의 또 다른 진면목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법력 높은 선승이었기에 높은 법상에 올라 난해한 상당법문만 설법해도 누구 하나 탓할 사람이 없었지만 스님은 굳이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백일법문이 자비정신에 입각한 법문이며, 대승의 정신을 실천하는 법문임을 의미한다. 성철 스님은 소수의 상상근기 중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중생을 독려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뛰어난 제자들만 데리고 지름길로 바로 가는 대신 돌아가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중생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승은 수승한 중생들만 가는 길이 아니라 수많은 중생들과 더불어 가는 길이다. 그래서 대승의 정신을 설명할 때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라는 말을 곧잘 한다. 설사 자신은 피안으로 건너가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중생들을 먼저 건너가게 하겠다는 것이 대승의 길이고 보살의 정신이다.

 

성철 스님은 철두철미한 본분종사였지만 백일법문은 본분사의 길 대신 언어와 교학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대승정신을 실천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없는 것이 선의 길임에도 수많은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백일에 걸쳐 광대한 설법을 이어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서재영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