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이력서도 없이, 자소서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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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3 년 6 월 [통권 제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8,471회 / 댓글0건본문
취업이 어렵다보니 요즘 젊은이들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이하 자소서) 쓰는 데 전문가가 되어간다. 저마다 생긴 대로, 배운 대로 개성 있게 써 가지고 면접관을 향해 무한도전을 한다. 이들의 이력서와 자소서에는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잘 담겨 있을 것이다. 고로, 이것만 잘 써도 철학자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부터 쌓아온 화려한 스펙과 간지 나는 ‘자소서’에도 불구하고 간택이 되지 못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무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시절 탓이라 대한민국의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안쓰럽고 미안하다.
고전 명작 중에 기억에 남는 자소서가 하나 있다. 인도문화의 세례를 흠뻑 받은 작가 헤르만 헷세의 소설 『싯다르타』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학문과 명상으로 세월을 보내던 주인공 싯다르타가 어느 날 세상 밖으로 나온다. 박을 들고 무애춤을 추며 거리로 나선 원효처럼. 지금껏 닦아왔던 도를 점검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취업을 위해 당대 최고의 CEO를 만나서 면접을 한다.
재가자들에게 법문하고 있는 성철 스님
EO가 묻는다. “그래, 넌 할 수 있는 게 무어냐?” 주인공이 답한다. “굶을 수 있습니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랬다. 단 세 마디 자기소개로 CEO의 마음을 움직여 취직에 성공하고 그때부터 한동안 잘 나가는 사업가가 된다. 이 ‘겁나는’ 젊은이를 우리나라 갑이었으면 과연 뽑아주었을까 모르겠다. ‘~할 수 있다’로 끝나는 이 젊은이의 말은 어떤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 자기 정체를 확실하게 탄로 낸 모범적인 사례라 하겠다.
중국의 전등사서에는 학인과 종장이 만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들의 만남은 싯다르타보다 한술 더 뜬다. 대개 학인 쪽에서 종장을 찾아가는데 한 산문을 호령할 정도면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스타급’ 종장이라, 학인은 그분이 얼마나 겁나는 인물인지 이미 알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학인도 겁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력서도 없이, 자소서도 없이 ‘주인공’ 하나 달랑 들고 가서는 쫄지 않고 부딪친다. 우선 육조혜능과 남악회양이 만나는 장면을 보자. 회양이 절을 하자 육조가 묻는다.
“어디서 왔는가?”
회양이 답한다.
“숭산이요.”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한 물건이라 표현해도 2% 부족합니다.”
이렇게 액면가 대 액면가로 만나는 것이 그들의 절차와 형식이다.
혜능을 만났을 때 회양은 이미 성숙한 수행자였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나이에 율사 밑에 출가해서 단련을 받을 대로 받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공부에 회의를 느끼고 하루는 탄식을 한다. “뭔가 너무 유위(有爲)스럽지 않은가. 출가자라면 무위법을 닦아야지, 이건 아닌데…” 비구계 250 항목을 다 기억해야 하며 실제 상황에 적용하는 개차지범(開遮持犯)까지 일일이 따져보아야 했을 것이니 그것을 유위적인 수행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린 도반이 그를 숭산 안 국사(安 國師)에게 인도한다.
국사는 딱 알아보고 육조에게 보낸다. 이렇게 딱딱 알아봐주는 사람들, 딱딱 맞는 시절인연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혜능을 만나게 된 것이다. 어디서 왔느냐, 무엇이 이렇게 왔느냐는 혜능의 질문은 매우 간명하다.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은 회양이라는 주인공뿐. 그것이 온 곳을 따져 묻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기에 혜능이 궁여지책으로 ‘어떤 물건’이라고 했을 터인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회양이 꼬투리를 잡은 것이다. 이 뒤로 몇 마디 더 나눈다.
혜능이 이어서 묻는다.
“닦아서 증득할 수 있겠나?”
“닦고 증득하는 일이 없다할 수는 없으나 번뇌에 물드는 일은 없습니다.”
“물들 수 없는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이 보호하시는 것이다. 네가 이미 그러하고 나 역시 그러하다.”
닦고 증득할 것이 없다고 한 본분(本分)의 자리, 누구나 가지고 있는 주인공. 이것이 육조혜능의 가풍이다. 이렇게 혜능이 회양을 긍정하면서 이 에피소드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다음, 조주와 엄양 존자가 만나는 장면이다. 엄양 존자는 항상 뱀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손으로 밥을 먹였다는 전설로 유명한 분이다. 그가 조주를 찾아와서는 대뜸 이렇게 묻는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요,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내려 놔.”
“한 물건도 안 가져왔는데 뭘 내려놓으라는 겁니까?”
“거봐, 내려놓지 못하고 있으면서…”
엄양 존자, 여기서 받은 충격이 심했나 보다. 드디어 대오(大悟)했다고 한다.
당나라 선사들이 살았던 시절은 스펙 쌓아서 취직하는 사회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사람 대 사람으로, 전기(全機) 대 전기(全機)로 만나는 세계였다. 이들의 관계는 갑을이 아니라 빈주의 관계다. 스승만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제자가 주인이 될 때 스승은 기꺼이 객이 된다. 이런 환상적인 만남이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좋겠다. 면접관과 취업준비생 사이에, 선생과 학생 사이에 형식적인 이력서와 자소서는 잠시 제쳐두고 철학적인 문답을 통해 상대방 간을 보고 그리하여 눈이 맞으면 서로가 서로를 호념(護念)하고 키워가는 사이가 될 수 있기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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