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세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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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3 년 7 월 [통권 제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897회 / 댓글0건본문
『보림전』은 혜능-마조선사로 이어지는 조계종의 원류를 밝힌 최초의 전등록이다. 전등록의 고형(古形)인 동시에 원형인 까닭에 그 서지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책의 안팎과 주변을 씨줄과 날줄로 엮으면서 동시에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는 연재물로 ‘보림별어’가 기획되었다.- 편집자
좋은 공구가 품질을 좌우한다
고전을 이해하려면 필수적인 책이 사전류이다. 엄청난 스케일과 방대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역사소설인 『삼국지』도 소화하려면 사전이 필요한 까닭에 몇 년 전에 『삼국지사전』이 나왔다. 고전 중에 고전인 선어록도 제대로 읽으려면 갖가지 사전류가 동원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전류를 통칭하여 ‘공구(工具) 서적’이라고 부른다. 좋은 공구가 일을 속도와 품질을 결정하는 까닭이다. 사전을 이용할 때마다 좋은 사전을 만든 저자의 공력에 감사하게 된다. 번역자의 다양하고 많은 사전류 이용능력은 완성도의 또 다른 경쟁력이다. 그래서 서재에 어떤 책을 소장했는지도 중요하지만, 질 좋은 사전류를 얼마나 갖추었는가 하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다양하고 질 좋은 사전의 출판역량이 그 나라의 진정한 국격이기도 하다.
삶 자체가 편집이다
사전류는 특정한 목적 하에 편집된 책이다. 범주를 정해놓고 그것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 우선이다. 얼마나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느냐에 따라 그 사전의 부피가 결정된다. 그리고 수집된 자료의 일관성이 품질을 결정한다. 사전은 성실성과 하나로 꿰뚫는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편집안목이 합해진 결과물인 것이다. 어디 사전뿐이겠는가? 우리의 삶 자체가 편집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것을 중심으로 내 생각은 편집되기 마련이다. 이성 영역이라는 저술도 알고 보면 자기편집일 수밖에 없다. 논문도 내가 원하는 편집이고 저서도 내가 필요로 하는 편집이다. 어떤 목적의 큰 틀 속에 감추어진 ‘의도된 전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갖가지 자료가 인위적으로 동원된다. 그것은 성인과 범부, 왕과 사대부 역시 차이가 없다. 무엇이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려는 이기식(利己識)인 제7말나식(末那識)의 작용은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는 까닭이다. 불성(佛性)도 남북이 없지만 말나식도 동서가 없다.
용비어천가를 부르다
세종은 조선 최고의 임금이다. 당신 역시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사관들의 평가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관람불가”를 외치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실록을 들추었다. 총서(叢書) 부분을 읽다말고 기록의 부실성에 혀를 끌끌 찼다. 객관성에 바탕을 둔 사관의 안목과 인정이 우선하는 손자의 눈높이가 같을 수는 없었다. 고치지도 못할 것을 보았으니 속으로 끙끙 앓을 뿐이었다. 성질대로 하면 손 좀 봐주고(?) 싶었지만 ‘성군답게’ 꾹 참다가 결국 묘안을 냈다. 아버지 태종 이방원,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증조부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 고조부 익조 이행리(翼祖 李行里), 그 윗대 도조 이춘(度祖 李椿), 환조 이자춘(桓祖 李子春) 등 6명의 행적을 다시 보완한 역사서를 편찬케 한 것이다. “해동의 여섯용이 나시어(海東六龍飛) 하시는 일마다 하늘의 복이시니라(莫非天所扶)”로 시작되는 『용비어천가』(1447년)는 이렇게 탄생된다. 조선시대판 ‘6조설’인 것이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다
함경도 변방의 이씨 가문이 조선을 개국한 것처럼, 나무꾼 출신 혜능 스님과 방앗간 집 둘째 아들 마조 스님도 새로운 가풍(家風)의 선종산문(禪宗山門)을 개창했다. 두 기라성 같은 스님의 문하생으로 중국 종교사상계의 주류가 된 ‘새끼 용’들은 절대로 가만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세종처럼’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혈맥(血脈)이 아니라 법맥(法脈)의 정통성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기존 모든 법맥의 족보를 뒤지고 수집하고 또 편집했다. 그 결정판이 『보림전』이다. 그리하여 세종처럼 6대조에 그친 것이 아니라 28대조까지 소급해 올라갔다. 그 끝은 부처님 즉 고타마 선사였다. 법왕인 동시에 전륜성왕인 ‘카필라 석씨’의 28대 ‘정통후손’임을 만천하에 과시한 것이다. 더불어 기존의 제종파(諸宗派) 역사서는 변방의 비주류 역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중원천하에 주지시켰다. 어쨌거나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다. 동시에 기록하는 자의 승리이기도 하다.
역사서인 동시에 인명사전인 『보림전』을 편집하다
『보림전』은 혜능-마조계의 역사서인 동시에 인명사전이다. 편집자는 혜능-마조 법맥의 정통과 방계를 분명히 했다. 주변 법맥 역시 서얼(庶孼)을 확실하게 나누었다. 이는 종통(宗統) 확립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과거사가 된 윗대의 역사는 비교적 관대하게 처리했다. 용수, 마명, 세친보살까지도 법맥에 포함시켰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이 황제의 도서관에서 보았다는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의 ‘염화미소’ 사건은 마하가섭을 선종초조로 모시는 근거로 끌어왔다.
유가도 마찬가지다. 성리학을 완성한 주희(朱熹)도 공자, 맹자, 그리고 북송의 오현(五賢)과 자신에게 이어지는 도학계보를 만들었다. 조선 사림파는 유학적 진리의 계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도학계보사(朝鮮道學系譜史)’를 편찬했다. 그 법맥은 정몽주-길재-김숙지-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졌다. 이 도학계보의 형성에 실제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은 조광조 한 사람 뿐이다. 이 역시 거꾸로 올린 역사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업은 왕조사회에서 왕통(王統)에 대한 도통(道統)의 위상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왕 역시 사대부의 일원일 뿐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형적인 신념의 정치가들이었다.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대부분 왕조사 및 종교사상사 역시 정통성 확립을 위한 인위적인 편집과정을 거쳤다. 이는 당시의 보편적인 역사편집 서술방식이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보림전』은 사실의 역사와 신념의 역사가 합해진 책이다. 육조혜능 이전의 역사는 신념의 역사요, 마조 이후의 역사는 사실의 역사이다. 사실의 역사 위에 신념의 역사가 더해진 탓에 시비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또 그것으로 인하여 이념적 완성도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신념의 역사는 모르고 보면 허구이지만 알고 보면 또 다른 깊은 뜻을 내포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될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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