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깨달음과 언어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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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3 년 8 월 [통권 제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8,152회 / 댓글0건본문
깨달음으로 가는 여행 가이드북
모든 경전의 서두를 장식하는 것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구절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아난이 들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그것을 언어로 정리한 것이 바로 경전이다. 그래서 언어로 된 경전 속에 거룩한 불법(佛法)이 있고, 길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으로 대변되는 부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이해하면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까?
만약 성전 속에 종교의 본질이 있다면 성전을 공부하는 것이 곧 종교의 궁극적 경지로 가는 바른 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에서 말과 글, 교리와 이론만을 가지고는 결코 성불(成佛)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대학자라도 언어와 문자에 대한 탐구를 통해 부처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방대한 경전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성철 스님은 경전에 대해 깨달음이라는 고원한 산으로 우리들을 인도하는 노정기(路程記)에 비유했다. 궁극적 깨달음을 향한 여행을 떠날 때 어느 길로 가야하며, 무엇을 준비해야 하며, 위험은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여행 가이드북이 경전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금강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산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루는 것이 경전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경전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경전이라는 노정기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대해 깨닫게 되고, “우리도 금강산 구경을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든다. 따라서 경전이란 깨달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깨달음을 이룩한 여래가 얼마나 거룩한 성인인지에 대해 알려주고, 우리도 발심(發心)하여 붓다가 가신 그 위대한 길로 나서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전의 내용은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지만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고, 마침내 부처를 완성하는 성불의 길라잡이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경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지시하는 가이드북이라는 성질을 분명하게 이해한다면 경전은 깨달음으로 가는 여행에서 중요한 지침이 되고, 궁극적 목적지로 우리들을 인도한다. 이런 이유로 성철 스님은 “언어문자인 팔만대장경이 성불하는 노정기인 줄만 분명히 알면 그것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역대 선사들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말하며 언어문자의 위험성과 무가치함에 대해 누누이 강조했다. 그것은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고 그것을 곧 목적지로 잘못 알고 문자에 집착하는 중생의 병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경전을 목적지로 안다면 우리는 문자에 속박되고 말겠지만 그것이 이정표임을 깨닫는다면 경전은 깨달음으로 가는 훌륭한 지도가 되는 법이다.
여행기는 직접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탄생한 것이다. 여행기만 열심히 읽고 직접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면 여행기가 오히려 독이 되는 법이다. 아무리 여행기를 열심히 탐독할지라도 몸은 그 자리에 있을 뿐 한 발자국도 진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팔만대장경이라는 노정기에 안주하지 말고 그것을 참조하되 실제로 여행을 떠나서 마침내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학의 궁극적 목표도 깨달음
불교를 크게 나누면 교(敎)와 선(禪)으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고승 서산 대사는 부처님께서 평생에 걸쳐 설법하신 내용을 교라고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을 선이라고 설명했다. 교는 부처님의 말씀인데 아난을 통해 전해졌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인데 가섭을 통해 전해졌다는 것이 선종의 설명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여래의 마음을 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교종에서는 여래의 말씀인 경전을 연구하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이런 이유로 선가에서는 언어와 문자를 배격하며 교가에서는 언어와 문자를 숭상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선은 깨달음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 것으로 알지만 부처님의 말씀에 해당하는 교학은 언어적 이해, 학문적인 탐구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선사들만의 일이며, 교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깨달음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깨달음의 추구는 수행자들의 몫이지 교학자나 학자들과는 무관한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교학의 본질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교학으로 대표되는 경전도 결국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외도(外道)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학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면 마땅히 교학이 추구하는 핵심도 부처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다른 것일 수 없듯이 선과 교의 근본도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은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 선과 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깨달음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 성철 스님의 가르침이다.
경전의 말씀은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깨달음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언어 문자만을 탐구하는 교학자라면 불교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교학의 근본도 깨달음이라는 것은 선종의 주장이 아니라 교가의 주장이다. 당나라 때 화엄학을 집대성한 화엄종의 종조 현수법장 스님은 깨달아야만 교학의 심오한 이치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엄연기법은 일체 만법이 구족하니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그것을 깨칠 것이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말로써 해석한다면 연기법을 보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해석을 끊고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정견(正見)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마음으로 해석하여 얻으려고 한다면 평생을 헛일만 하는 것이다.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들어갈 것이요, 만약 입으로는 말하나 마음에 깨침이 없는 사람은 곧 미친 사람과 같은 것이다.”
교학 중에서 가장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화엄사상이며, 그 화엄의 최고 권위자인 현수 스님은 언어적 이해만으로는 화엄의 핵심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오직 ‘증지(證智)’라는 깨달은 마음에 이르러야만 그 심오한 이치를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현수 스님은 깨닫지 못하고 말과 논리만으로 화엄연기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미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불법이란 오직 자성 또는 법성을 깨닫는데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를 이해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림의 떡으로 허기를 채울 수 없다
솔거가 그렸다는 황룡사의 벽화는 너무도 생동감이 넘쳐서 날아가던 새들이 나무로 착각하고 부딪쳤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솔거를 칭송하는 전설일 뿐 그림 속의 나무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선의 입장에서 볼 때 언어와 문자로 구성된 경전은 마치 그림 속의 나무와 같고 초상화 속의 사람과 같다. 아무리 뛰어난 언어와 논리로 설명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을 표상한 그림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달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언어와 교리를 통해서 불법의 핵심을 알고자 하는 것은 마치 그림 속의 떡으로 배를 채우려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역대 조사는 물론 교가의 대가들도 불교를 바로 알려면 마음을 깨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어와 논리로 설명된 불교는 그림 속의 떡과 같고, 초상화 속의 사람과 같아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으며 불러도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를 극명하게 설명하는 것이 바로 신라화엄의 종조 의상 스님이다. 의상 스님은 그의 대표적인 저술 ‘법성게(法性偈)’에서 화엄의 심오한 이치는 오직 깨친 마음으로만 알 수 있다고 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法性圓融無二相)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네(諸法不動本來寂).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無名無相絶一切)
깨친 지혜로서 알 바요, 다른 경계에서는 알 수 없네(證智所知非餘境).
의상 스님은 법성의 심오한 이치는 깨달은 지혜로써만 알 수 있다고 강조한다. 만법의 법성을 깨치는 것은 언어문자를 통해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교한 교리와 설명을 덧붙여도 언어를 통해 법성의 실상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상으로써의 법성은 언어 이전의 세계이기에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정해진 모양도 없다.
이처럼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친 법성은 깊고 미묘해서 언어의 길이 모두 끊어지고 사량분별이 멈춘 세계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이 세계를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했고, 몰종적(沒蹤跡)이라고 했다. 말과 논리로는 갈 수 없음으로 언어와 사유가 단절된 세계이며, 하늘을 나는 새가 자취를 남기지 않듯이 깨침으로 가는 길 또한 이론만으로 찾을 수는 없다.
강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인스님들
그래서 언어와 교리에 대한 연구를 근본으로 삼는 교가에서도 반드시 깨달아야만 법성의 심오한 이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경전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가이드북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글자에 얽매여 논쟁과 번뇌를 일삼지 말고 단 한 구절을 배우더라도 실천을 위한 지침으로 삼고 깨달음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는 슬기로움이 필요하다.
사진 설명 - 강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인스님들의 모습.
사진 설명 - 해인사에 모셔져 있는 팔만대장경판의 모습. 사진=하지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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