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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속이지 마라’며 양심을 강조하셨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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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3 년 8 월 [통권 제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8,00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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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 인월암 원순 스님 / 유철주







 

장맛비가 쉴 새 없이 내리던 7월 초 어느 날, 빗속을 뚫고 순천 송광사로 향했다. 도착할 시간 즈음에는 그칠 거라는 예보와 달리 비는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쉬어갈까 했던 계획과 달리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곧바로 송광사 종무소로 갔다. 원순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인월암 위치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다.
“화엄전을 지나 천자암쪽으로 가다 오른쪽에 있는 밭 사잇길로 20분쯤 올라가면 인월암이 보일 것입니다.”

 

우중(雨中) 20분이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지만 조계산의 풍경들을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시원하게 뻗은 소나무와 편백나무, 대나무를 보니 그나마 마음이 시원해진다. 여러 나무가 어울려 곧게 살아가는 조계산이야말로 진짜 총림(叢林)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인월암 전경

 

막 땀이 쏟아지기 시작할 즈음에 멀리 인월암이 보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종무소 직원이 안내해 준 것보다는 가까운 곳에 인월암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올라간 인월암은 인법당 겸 선실과 방 하나, 부엌 하나가 전부였다. 사실상 토굴에 가까운 암자다. 원순 스님은 늦은 점심공양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객을 위해 스님은 직접 만든 죽순 요리도 내주었다. 빗줄기가 점차 가늘어지기 시작할 즈음 스님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련암에서 일으킨 오해

 

“세속 생활이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제가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욕망에 끄달리는 삶을 살고 있었어요. 1만원을 가진 사람은 10만원을, 10만원을 가진 사람은 100만원을 갖고 싶어 했어요. 또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쉬지 못하면서 끝없는 욕망을 토해냈습니다. 결국에는 욕망에 놀아난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출가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원순 스님은 그 당시 알고 지내던 스님에게 원명 스님(前 연등국제선원장)을 소개받아 곧바로 백련암에 갔다.

 

“출가하려고 백련암에 갔는데 한 3일 동안 대중들이 말도 안 붙이고 절도 시키지 않았어요. 원통전 뒷방에 그냥 가만히 있었죠. 그렇게 며칠 있으니 몸이 근질근질하고 너무 찝찝해요. 그래서 같이 있던 행자들에게 ‘마을에 가서 목욕을 하고 오겠다’고 말하니, 백련암 대중들이 너무 어처구니 없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말했지요. ‘출가하러 왔는데 가타부타 말도 안 해주고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여기서 안 된다면 봉암사로 가겠다.’ 그러자 그 당시 시자 소임을 보던 원영 스님이 급하게 큰스님 방에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방에서 나오더니 바로 삭발해 줘 백련암 행자가 되었지요. 하하.”

 


구산 스님이 쓴 인월정사 현판

 

원순 스님은 “당시 백련암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출가하겠다는 사람들이 왔었다. 아마도 백련암에서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출가할 마음을 가지고 찾아 왔는지 살펴보았던 것 같다.”고 전했다.

 

행자가 되고 며칠 후 스님은 좌선실(坐禪室)에서 다른 대중들 틈에 끼어 공부시간에 참선만 했다. 스님의 애초 출가 목적이 “참선해 도인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을 지켜만 보던 성철 스님이 원순 스님을 불러 호통을 쳤다. “야 이놈아! 참선이 그렇게 쉬운 건 줄 알아? 큰 절에 가서 14시간씩 앉아 볼래?” 원순 스님은 처음에는 속으로 “보내만 주면 잘 할 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큰스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실 때는 이유가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성철 스님 말씀을 따르게 되었다. 성철 스님이 호통을 친 까닭은 먼저 경전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의 근본 사상을 이해하고 나서야 올바른 정진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원순 스님은 다른 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능엄주’부터 외웠다. 그리고 일본어를 공부해 경전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되지만 즐거운(?)” 행자생활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절하랴, 소임보랴, 공부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자투리 시간도 아껴 경전 한 구절이라도 더 외우려 하고 밥 한 톨이라도 흘리지 않게 정신 바짝 차리며 살다 보니 코피 쏟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원순 스님도 공양주를 거쳐 성철 스님 시봉을 했다. 사형(師兄)스님들이 시봉하는 모습을 보면서 원순 스님도 시봉에 대한 ‘개념’을 잡아갔다.
“지금 정심사에 계시는 원영 스님이 큰스님 공양을 지을 때 정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처럼 정성을 다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원영 스님은 깨진 쌀알은 다 걸러 내고 온전한 쌀알로만 밥을 지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지요. 저도 정성껏 시봉한다고 해인사 선방에서 14시간씩 정진할 때에도 점심공양을 마친 뒤에는 큰 주전자를 가지고 가야산 정상에 올라가 ‘장군수’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철 내내 떠다 큰스님께 드린 적이 있습니다. 큰스님 목욕물의 온도를 정확하게 맞추느라 온도계를 구해 애쓰던 일도 생각납니다. 하하.”

 

원순 스님은 시자를 하면서도 성철 스님의 호랑이 같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늘 편안하게 생각하고 모셨다.”고 한다.
이런 원순 스님도 백련암에서 오해(?)한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먼저, 신도들이 성철 스님을 만나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삼배를 올리는 모습이었다. 

 

“신도님들은 길가든 마당이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큰스님만 보면 삼배를 올렸습니다. 젖은 땅에서 흙투성이가 되면서도 절을 하는 겁니다. 반면 큰스님께서는 이런 신도들의 공경에 무덤덤해 하시며 당신의 일과대로 사셨습니다. 처음에는 ‘이 무슨 우상숭배인가?’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땅바닥에서 절을 하는 신도님들의 마음을 봤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지요. 신도님들이 정말로 신심을 내서 큰스님께 예배를 올리는 그 마음 말입니다. 하심(下心) 하는 그 마음이 공부의 시작이자 끝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큰스님께서도 신도들을 맞이하실 때는 차별 없이 늘 자비심으로 대하셨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성철 스님이 팔을 다쳤을 때의 일이다.
“큰스님께서는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하루는 꼬마가 큰스님께서 앉으려는 찰나 뒤에서 몰래 의자를 빼버렸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화단 밑으로 떨어져 팔을 크게 다치셨지요. 그때부터 큰스님은 ‘아이고, 아야!’ 하시며 아프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놀란 시자 스님들이 큰스님을 병원으로 모시려고 동분서주하는데 저는 한쪽으로 비켜 서 있었어요. ‘나라면 꾹 참을 텐데 도인이라는 분이 너무하지 않나?’라고 못마땅한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 제 심보를 보셨는지 큰스님께서는 ‘야 이놈아, 내가 아파서 아프다고 하는데 뭐가 잘못됐냐?’라고 크게 호통을 치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 제 몸이 후끈거리면서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뜨거운 기운이 관통했지요.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그 뒤로 큰스님에 대한 의구심이 싹 끊어졌습니다.” 

 

선교겸수(禪敎兼修)의 길에서

 

원순 스님은 그렇게 2년여를 백련암에서 보낸 뒤 본격적인 운수납자(雲水衲子)의 길을 시작했다. 스님이 처음 방부를 들인 곳은 법주사 복천암 선원이다. 그 후에는 송광사 선원에서 정진했다. 그러던 중 해인사로 갔다 다시 송광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송광사에 돌아온 김에 현재의 율원 자리에 있던 비전(碑殿)에서 정진을 했지요. 10여 명의 도반 스님들과 결사(結社)하는 마음가짐으로 한 철 열심히 정진했던 기억이 납니다.”

 

원순 스님이 비전에서 정진할 때 송광사 선원에 방부를 들였던 한 사형(師兄) 스님은 “비전에 사는 사람들이 선방에 있는 수좌들보다 더 공부에 비중을 두고 정진하는 것 같아 보인다.”며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1996년 인월암에 오기 전부터 경전번역을 하고 있었다. 『종경록』 요점을 세 권으로 추린 『명추회요』를 번역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던 원택 스님과의 인연으로 1995년 실상사 서진암에서 『명추회요』 하권을 공부삼아 번역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경전 불사는 지금까지 『원각경』, 『법화경』, 『기신론』, 『돈오입도요문론』, 『육조단경』, 『선가귀감』 등 30권의 책으로 그 결실을 맺어 세상에 나와 있다.

 

특히 최근에는 3년여 동안 번역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6권을 완간하기도 했다. 『금강경오가해설의』는 1417년 함허득통 스님이 자신의 견해로 『금강경』 뜻풀이를 해나가면서 5명의 선지식들의 해설에 당신의 견해를 덧붙여 놓은 것이다.

 

“『금강경』은 역사적으로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고전’입니다. 규봉종밀부터 육조혜능, 부대사, 야부도천, 예찬종경, 함허득통까지 여섯 분 모두 『금강경』의 근본에 통달한 대선사들이죠.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생긴 의문이 여섯 선사의 해설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보면 『금강경』의 본래 뜻을 알게 됨은 물론, 선사들의 막힘없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10년 10월쯤 『금강경』 한글 번역을 마치고 난 원순 스님은 맏사형인 천제 스님에게 “큰스님께서는 사상(四相)을 ‘주관’, ‘객관’, ‘공간’, ‘시간’으로 풀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아상은 주관, 인상은 객관, 중생상은 공간, 수자상은 시간으로 큰스님께서 풀이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제가 번역한 한글 『금강경』에 이 내용을 다시 대비해 보니, ‘주관은 나라는 모습에 집착하는 것[我相]’이고, ‘객관은 나를 떠나 상대방의 모습에 집착하는 것[人相]’이며, ‘공간은 나와 남이 어울려 만들어낸 우리 중생이라는 모습에 집착하는 것[衆生相]’이고, ‘시간은 이들 모두의 생명이 영원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壽者相]’으로 번역되어 내용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에요.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뒷날 똑같은 내용이 규봉 스님의 『금강경』에도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 나름대로 『금강경』 번역에 저만의 자긍심을 갖게 되었지요.”

 

스님은 불자들이 경전과 어록을 볼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밝혔다. 

“경전이나 어록을 볼 때는 부처님 뜻을 생각하면서 봐야 하고 또 그것을 통해 부처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경전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경전을 볼 이유가 없어요. 생활과 분리되면 부처님 말씀도 공허한 소리일 뿐입니다. 부처님 뜻을 알고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부처님 삶을 실천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인월암 가는 길

 

원순 스님은 앞으로도 정진 삼아 경전 번역을 계속 해 나갈 것이라고 한다.
“저는 주어진 인연에 최선을 다하고 살 뿐입니다. 번역을 하면서 경전이나 어록을 정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 제 공부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공부삼아 번역한 글들이 혹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책으로 내는 것뿐이지요. 승가대학 교재 가운데 아직 번역하지 못한 『능엄경』, 『사미율의』, 『절요』 등을 시간이 나면 더 공부해 출간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재에 무엇보다 관심을 두는 것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후학들의 전통교육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그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화엄경』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 볼 생각입니다.”

 

원순 스님은 은사 성철 스님에 대해 “양심을 가르쳤던 스승”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씀 한마디에 모든 가르침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원순 스님은 “큰스님처럼 납자(衲子)의 본분을 지키며 수행 정진하는 산승(山僧)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비는 그치고 낮은 구름이 조계산을 감싸기 시작했다. ‘조계산승(曹溪山僧)’ 원순 스님은 오늘도 이렇게 인월암에서 묵직한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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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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