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마당]
“브라이언 배리! 쑥 들어갑시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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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6 년 9 월 [통권 제4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8,594회 / 댓글0건본문
푸른 눈의 수행자 브라이언 배리(Brian Barry) 49재 봉행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수행자 브라이언 배리(Brian Barry, 법명 道海)의 49재가 8월 20일 하남 정심사에서 봉행됐다.
이날 49재에는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 스님과 창원 정인사 주지 원행 스님, 해인사 청량사 주지 원타 스님, 정심사 주지 원영 스님을 비롯 브라이언 배리의 유족과 불자 100여명이 함께 했다.
이날 49재에서 원택 스님은 법문을 통해 브라이언 배리와의 인연을 소개했다.
“제 사형인 원명 스님을 통해 처음 브라이언 배리 선생을 알게 됐습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해박한 불교 지식과 열정, 신심(信心)은 여느 외국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힘이었습니다. 어느 날 배리가 저한테 와서 인천 용화선원 송담 큰스님을 친견한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송담 큰스님께서 배리 일행에게 ‘이뭣고’ 화두를 들고 정진하라고 하셨나 봅니다. 그랬더니 배리가 불쑥 손을 들고 ‘이뭣고’는 경상도 말이니 전라도 식으로 풀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송담 큰스님께서 주저하시자 배리가 ‘이뭣고’를 전라도 말로 하면 ‘뭐시여 시방’이라고 해 큰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이 함께 웃었다고 했습니다.

원택 스님이 법문을 하고 있다
배리 같은 불자는 앞으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리가 더 그리울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쯤 원명 스님을 만나 함께 성철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그곳에서 유쾌하게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족을 대표한 브리이언 배리의 한국 형님 조각석 씨의 인사말은 자리를 함께 한 대중들의 가슴을 울렸다.
“삼복염천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저희 막내 동생 브라이언 배리의 49재에 참석하여 베리가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을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유족과 지인을 대표하여 두 손 모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배리는 평소에 자신을 ‘부안 부씨’라고 부를 만큼 부안을 사랑하고 좋아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런 배리를 ‘부처님이 보내준 아들이다’라고 하시며 말은 물론 먹는 것, 씻는 것 등등 하나에서 열 가지 모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배리가 평소에 하는 말을 들어보면 마치 돌아가신 어머니를 마주하고 있는 듯합니다.

브라이언 배리의 한국 형님 조각석 씨가 분향하고 있다.
입만 열면‘겁나게’, ‘징하게’, ‘매겁시’, ‘긍께’가 툭툭 튀어나오고 ‘거시기’는 완전히 입에 배서 1999년 태국 왕실 사원에서 단청을 그리는 모습이 CNN 뉴스에 방송되었을 때는 영어 인터뷰를 하는데도 툭툭 튀어나올 정도였습니다.
톡 쏘는 홍어도 잘 먹고, 얼큰한 김치도 잘 먹고, 형수들이 음식을 해다 주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꼬리를 올리며 즐거워했습니다. 상모도 잘 돌리고, 불화도 잘 그리고, 염불도 잘 하고, 영어 번역도 잘 하고, 가만히 보니 배리는 참으로 재주가 뛰어난 동생이었습니다.
물론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40여 년 넘게 살아온 이 땅에서 불화를 그리며,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며 더 오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오랜 시간 혼자 감내해야 했던 병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편안하게 또 다른 세상에서 신나게 잘 살고 있을 거라 믿으니 마음이 놓이고 한편 홀가분하기도 합니다.

브라이언 배리 영단
저는 믿습니다. 분명 부처님 영산회상에서 ‘거시기’, ‘매겁시’하며 불화를 그리고 지인들에게 노루궁뎅이 버섯차를 정성껏 따라 올리고 있을 겁니다. 내 동생 브라이언 배리! 쑥 들어갑시데이~~~”
미국 코네티컷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배리 법사는 23세였던 1967년 평화봉사단으로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를 찾았다. 당시 2년 계획으로 활동한 봉사단원들은 변변한 화장실 하나 없던 환경에 경악했지만 그는 “바다 냄새, 꽹과리 소리를 잊지 못하겠다.”며 대학 졸업 후 돌아와 아예 한국에 터를 잡았다. 스스로를 ‘부안 부씨’라고 칭한 건 이때부터였다. 지인들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를 ‘부형’이라고 불렀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발길을 재촉한 건 처음부터 불교의 영향이 컸다. 1979~98년 대우그룹에 근무하며 틈틈이 대원정사 불교대학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1985년 불광사에서 광덕 스님으로부터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기르라’는 뜻의 법명 도해(道海)를 받았다. 1986년 한 미국 건축가의 통역을 위해 간 서울 봉원사에서 조화로운 단청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문득 전율을 느꼈고, 그 길로 봉원사 만봉 스님에게 청해 탱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분향하는 원영 스님의 모습
만봉 스님 문하에서 밑그림만 수천 장을 그리던 그는 2년 만에 정식 제자가 됐고, 1985년 제11회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전 입선, 1990년 같은 대회 특선 등에 올라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태국 왕실사원의 부탁으로 탱화를 그려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명실공히 불모(佛母)가 된 그는 온종일 방바닥에 무릎 꿇고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수행으로 삼았고, 2006년 만봉 스님이 입적하자 유족들이 가족회의를 통해 “완성을 부형에게 맡기자”고 할 정도로 그의 실력과 열정은 유명했다.
성철 스님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 『이뭣고』를 영어로 번역해 『Echos from Mt.Kaya(가야산의 메아리)』를 출간했으며 법정 스님 수필 중 65편을 가려 뽑아 『물소리, 바람 소리(The sound of water, The sound of wind)』란 책을 엮어내기도 했다. 한국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9년 정부로부터 화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49재를 지낸 정심사 주지 원영 스님은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브라이언 배리 법사가 실현하고자 했던 것들을 우리들이 잘 받아 안아서 더욱 정진하자.”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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