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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고통의 바다 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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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3 년 11 월 [통권 제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55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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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여덟 가지 고통

 

부처님은 중생들이 사는 세상을 고해라고 하셨다. 고해(苦海)란‘고통으로 넘실대는 바다’라는 말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무명(無明)의 어둠 속에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에게 이 세상은 수많은 고통으로 넘실대는 헤어날 수 없는 바다이다. 광활한 바다에 비유되는 고통을 유형화하면 ‘네 가지 고통〔四苦〕’과 ‘여덟 가지 고통〔八苦〕’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단지 고통이라고만 하면 추상적이므로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팔고설이다.

 

나고 죽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되풀이하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生〕이 첫 번째 고통이다. 싱그러운 젊음을 한결같이 유지하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래 오래 살고 싶지만 날마다 노쇠하고 늙어가는 것〔老〕이 두 번째 고통이다. 건강한 육신으로 날마다 활기차고 생기 넘치게 살고 싶지만 누구나 병들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病〕이 세 번째 고통이다. 마지막으로 힘들게 모은 재산과 명예를 마음껏 누리면서 잘 살고 싶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았던 죽음이 닥쳐오는 것〔死〕이 네 번째 고통이다.

 


 

 

이상과 같은 네 가지 고통은 육신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적인 한계이자 실상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고통은 비단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가 다 같이 겪게 되는 고통이다. 따라서 생로병사라는 네 가지 고통은 육신을 가진 모든 존재의 보편적 고통에 해당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고통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생로병사가 몸을 지닌 존재가 겪는 고통이라면 마음으로 겪는 고통도 존재하는데 그것 또한 네 가지로 유형화 된다.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겪게 되는 네 가지 고통과 마음을 가진 존재로서 겪게 되는 네 가지 고통을 합치면 여덟 가지가 됨으로 이를 팔고(八苦), 즉 여덟 가지 고통이라고 한다.

 

팔고를 이루는 네 가지 고통의 내용은 이렇다. 첫째 원수나 미운 사람과 만나야 하고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둘째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지만 그들과 기어코 헤어지거나 사별(死別)해야 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셋째 갖고 싶은 욕심은 가득하지만 만족할 만큼 가질 수 없는 구부득고(求不得苦), 넷째 인간을 구성하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들이 하나 같이 탐욕과 집착이 번성하여 끝없이 고통을 유발하는 오음성고(五陰盛苦)가 그것이다.

 

고통으로 넘실대는 바다

 

고에 대한 여덟 가지 유형이 말하는 것은 중생의 삶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온갖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살다보면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꿈같은 순간이 오기도 하고, 밉고 싫어하던 사람이 내 곁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나아가 자신이 간절히 원하던 것을 갖게 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몸과 마음이 풍요롭고 삶의 성취와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주는 기쁨은 종국에는 빛이 바래고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빨리 죽음이 닥쳐오기 때문이다. 인간은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고, 촉감 좋은 비단 옷을 지어 입고, 온갖 희생을 감내하며 평생 육신의 종노릇을 하며 산다. 하지만 결국 그 몸은 허망하게 죽어버림으로써 일생에 걸친 우리들의 노고를 배반하고 만다. 육신은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어 없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고된 노동으로 열심히 모은 재산과 일생을 바쳐 성취한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영원한 이별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가족도, 애지중지하던 재산도 죽음 앞에서 의미를 잃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버리고 떠나야할 그 허망한 것을 얻기 위해 평생을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

 

끝내 헤어질 사람과 사랑하기 위해 온갖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결국은 한 줌의 재로 사라질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죽는 순간까지 갖은 고통을 감내하며 허우적거린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삶에서 즐거움과 행복은 매우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반면 고통과 이별은 삶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고 우리들의 삶에서 영원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들이 살아가는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三界火宅) 사생이 고통의 바다(四生苦海)’라고 하셨다. 삼계(三界), 즉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가 불타는 집과 같이 고통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불난 집이 비유하는 것은 우리의 삶은 매우 한시적인 것이며, 한 순간이라도 빨리 피하지 않으면 재앙이 닥쳐옴을 암시하는 것이다. 고통의 바다라는 것은 벗어나고자 해도 고통의 넓이와 깊이가 너무 광활해서 헤어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으로 태어난 모든 것이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불타는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 중생들의 삶이다.

 

인간은 육신을 유지하고, 욕망하는 바를 얻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최후에 직면하는 것은 늙고 병드는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사랑하던 사람들과 이별하고, 아끼던 물건들을 내려놓고 허망하게 죽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작은 기쁨과 성취에 도취되어 바다같이 넒은 고통의 실상을 알아채지 못하고, 불난 집같이 화급한 상황을 외면한 채 무상(無常)의 불길 속에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물질에 집착하며 살고 있다.

 

이고득락의 종교

 

모든 종교와 철학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직시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한 결과가 이별이고,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저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시하고 살기에 시간의 화살은 너무도 빠르게 날아온다.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짧은 삶 뒤에 찾아올 영원한 죽음, 사랑하던 가족과 아끼던 소유물과의 영원한 단절을 받아들이기에 우리들의 삶은 너무도 부질없는 놀음이 아닐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철학적 고뇌가 시작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종교적 기원이 출발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세속적 행복은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과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을 던져 돈을 벌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가 완전한 절멸이라는 데 참을 수 없는 허무와 고통이 밀려온다. 죽음의 불길 앞에 꺼져가는 유한한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길이다.

 

부처님께서 인간이 처한 고통에 대해 적나라하게 설명하시는 것도 바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는 가르침이 단지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찼으며, 모든 것은 부질없으니 집착을 내려놓고 떠나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일까? 더러 이렇게 불교를 이해한 사람들은 불교를 염세적인 종교라고 말한다. 사바세계는 고통의 바다라고 말하고,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가르침 속에서 염세적 특성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고를 직시하라는 가르침에 대해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다. 불교에서 고의 실상을 낱낱이 밝히고 인간의 삶과 세상의 뿌리가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고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설명하고 그것에 굴복하라고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반대로 고통의 실상을 낱낱이 깨닫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유한하고 순간적인 행복에 도취되어 영원한 고통의 파도에 휩쓸려 가는 운명을 일깨우기 위함이며, 그와 같은 고통에서 벗어난 완전한 기쁨,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고통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딛고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교리가 방대하고 난해해도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이고득락(離苦得樂)으로 요약할 수 있다. 범람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기신론』에서도 “모든 고통을 버리고(離一切苦) 구경의 행복을 얻음(得究竟樂).”이 불교의 목표라고 했다. 모든 고통을 다 버리고 최후의 행복,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樂〕을 얻는 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그것은 곧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에 매몰된 삶을 초극하여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이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밝히는 것이며, 고해의 바다 저 편으로 가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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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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