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하늘 아래 새것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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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3 년 11 월 [통권 제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905회 / 댓글0건본문
보현성지 아미산을 참배하다
2006년 ‘한중 불교교류’의 일원으로 보현 보살의 성지인 아미산을 찾게 되었다. 올라갈 때는 꼭대기 금정(金頂)까지 케이블카를 탔지만 내려올 때는 세상지(洗象池), 선봉사(仙峯寺), 홍춘평(洪椿坪), 청음각(淸音閣) 길을 따라 걸었다. 중간에 이틀 밤을 절에서 신세를 져야할 만큼 긴 여정이었다. 진짜 오지에 있는 물 귀한 절이 어떤 곳인가를 보여주었다.
더운물 한 세숫대야로 피로 회복을 위해 족욕을 하고 손발을 씻고 세수까지 마친 후 양말까지 빨았다. 뜨거운 물 한 바가지의 위력과 고마움을 새삼 일깨워 준다. 덕분에 지장성지 구화산, 문수성지 오대산, 관음성지 보타낙가산 등 사대성지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례지가 되었다. 차를 이용하여 다닐 때는 몸은 편안하지만 걸을 때의 감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역시 뭐든 몸으로 때워야 자기 것이 되는 법이다. 업은 식(識)에도 저장되지만 몸에도 저장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사천성 성도에서 전쟁의 역사를 만나다
돌아오는 길에 사천(四川, 쓰촨)성 성도(成都, 청뚜)에서 제갈공명을 모신 무후사(武候祠)를 참배했다. 삼국지 소설의 무대인 촉(蜀)땅임을 실감케 한다. 이후 이 지역은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인하여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의 피신지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난이 평정된 이후에도 지역의 군사적 실력자들은 여전히 그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특히 현지 최대군벌인 최녕(崔寧. 崔旰이라고도 함)은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부인 임(任)씨도 용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 최녕이 입궐할 때 아우 최관(崔寬)으로 하여금 성도를 지키게 하였다. 하지만 노주(瀘州) 양자림(楊子淋)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정예병력 수천 명으로 성도를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씨는 재산 10만 냥을 풀어 이틀 만에 장정 일천 명을 모았다. 그녀는 여장부였으며 몸도 크고 용맹한데다가 과감하기까지 했다. 용병의 대장으로 앞장서서 성을 다시 탈환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그런 집안이었다.
두홍점과 최녕이 만나다
중앙정부는 재상인 두홍점(杜鴻漸 709~769)을 파견했다. 현장에서 최녕의 세력을 확인한 두홍점은 진압책이 아니라 화친책으로 급선회했다. 이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참선을 매개체로 서로 ‘느낌을 아는’ 말이 되는 사이임을 확인한 까닭이다. 잠애관(蠶崖關, 사천성 灌縣 서북쪽) 백애산(白崖山)에 머물고 있던 대선지식인 무주(無住 714~774) 선사를 성도시내로 모시기로 의기투합했다.
지역유지인 최녕을 앞장 세우고 중앙의 실력자인 두홍점이 뒤에서 펌프질을 했다. 그 정성에 무주 선사는 거처를 옮기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공혜사(空惠寺)에 주석하다가 뒷날 보당사(保唐寺)로 옮겼다. 두 사람은 함께 열심히 법을 묻고 정진하고 또 물질적 후원까지 아끼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승속의 수많은 공부인들이 모여들면서 수행공동체를 이루었다. 뒷날 보당종(保唐宗)으로 불린다.
하늘아래 새것은 없다
보당종의 계보정리는 774년 무렵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란 이름으로 비장방(費長房)에 의해 완성된다. 그 이전에 두비(杜朏)에 의하여 최초의 전등역사서인 『전법보기(傳法寶記)』가 나왔다. 초기 북종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이후 정각(淨覺)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를 정리했다. 『능가경』에 의지하며 수행하던 조사와 고승들과 그 제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왼쪽부터 이조 혜가, 삼조 승찬, 사조 도신, 오조 홍인 대사상
둘 다 특정 교단의 단편적이고 사적인 기록에 머물렀다는 한계는 있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뒷날 간행된 『역대법보기』는 보당종의 부분적 역사에 머물지 않고 선종 전체 역사 속에서 보당종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기존의 전등역사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최초로 선종통사를 지향한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 서천 29조설과 동토 6조설을 전반부에 도입하는 탁월한 안목을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측천무후에 의해 보관되고 있던 혜능 스님의 가사가 지선(智詵) 스님에게 전달되었다고 하여 정통성까지 확립했다. 이후 처적(處寂)-무상(無相)-무주(無住)로 이어지는 이른 바 보당종의 법계를 확립한 것이다. 초기전등사의 형식적 완성판이라고 하겠다. 이런 선행 작업을 이어받아 혜능-마조계는 남종의 시각으로 801년 『보림전』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다시 쓴 선종사인 셈이다. 하늘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절대로 없는 법이다.
그래도 일등만 기억하지 말라
『역대법보기』에는 달마 대사가 혜가에게 법을 전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제자라고는 한 명 밖에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까닭에 일방적으로 1:1로 법을 전한 것이 아니라 4:1의 경쟁력을 물리친 ‘혜가’임을 돋보이도록 구성했다. 4대 제자는 도부(道副), 총지니(摠持尼,尼는 비구니), 도육(道育), 혜가였다. 이들을 앞에 두고 달마대사는 그동안 수행한 내면세계의 살림살이를 점검했다. 답변을 듣고는 각각 “피(皮, 피부), 육(肉, 살), 골(骨, 뼈), 수(髓, 골수)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그리하여 골수를 얻은 혜가 대사에게 법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보림전』은 4:1이 아니라 5:1의 경쟁률이었다고 한 술 더 떴다. 앞의 4인에 편두부(徧頭副)를 더해 “너는 나의 혈(血피)을 얻었다.”고 추가한 것이다. 유정물(有情物)이 제구실을 하기 위해선 피부와 살과 뼈가 있다면 당연히 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중요한 피가 없다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굳이 이것을 추가해야 할 깊은 뜻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엑스트라 한 명이 더해져도 전체 흐름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다만 뭔가 의도적으로 앞의 책과는 다른 차별성을 두고자 하는 유치함까지 읽히는지라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1:1이건 4:1이건 5:1이건 결국 마지막에는 주인공 1인만 남기 마련이다. 그래도 일등만 기억하지 말고 2등, 3등, 4등, 5등도 챙겨주려는 자비심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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