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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곁에서 좀 더 모셨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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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3 년 12 월 [통권 제8호]  /     /  작성일20-05-29 14:09  /   조회7,23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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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前 부산 정수사 주지 원해 스님

  


 

 

해인사의 가을은 눈부시다. 온 산을 물들인 가을단풍만 보아도 눈이 시원해진다. 또 가야산 내 여러 암자들을 참배하는 것도 몸과 마음이 함께 청정해지는 것은 물론 쏠쏠한 재미까지 느낄 수 있는 일이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있던 늦은 가을날 가야산을 찾았다. 단풍을 보러 온 사람들, 대장경 세계문화축전을 즐기러 온 사람들, 12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가야산 마애불을 친견하러 온 사람들이 한데 뒤엉켜 해인사 주변은 북새통이었다. 각자 다른 목적으로 해인사에 왔겠지만 상기된 표정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철 스님 사리탑을 참배하고 백련암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백련암이 가까워질수록 큰 절의 번잡함은 저 멀리 계곡 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마당에 들어서니 백련암은 그저 산중의 조용한 암자일 뿐이었다.

 

좌선실로 향했다. 백련암에 여러 차례 다녀갔지만 좌선실 안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좌선실은 성철 스님의 수많은 제자들이 ‘합숙’을 하며 출가 초기 신심(信心)을 다졌던 곳이기도 하다. 다시 발걸음을 좌선실 옆의 작은 방으로 돌렸다. 성철 스님의 제자 원해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백련암 일주문 앞에 선 원해 스님

 

원해 스님은 최근 부산 정수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 만행 중이었다. 인터뷰 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민 중일 때 떠오른 곳이 바로 백련암이었다. 원해 스님도 백련암에서의 만남을 흔쾌히 수락했다.

스님은 꼿꼿한 모습이었다. 또한 성철 스님의 다른 제자들과 달리 조금은 차가워보였다. 그러나 스님은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따뜻하고 열정적인 수행자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친구 따라 절에 가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전쟁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녔습니다. 고3때 전학을 해 학교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을 무렵 한 명의 친구가 전학을 왔습니다. 전학생끼리 친해져 좀 어울렸는데 그 친구는 이미 불교학생회에 나가고 있었어요. 어느 날 제가 물었습니다. ‘너는 왜 절에 가냐?’ ‘궁금하면 따라와 봐.’결국 그 친구 따라 불교학생회에 몇 번 나갔는데 거기서 제 인생의 길을 찾았습니다.”

 

원해 스님은 “꿈에서 깨어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을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흠뻑 빠져 순식간에 출가를 생각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원각회 활동을 시작했다. 원각회는 재가불자들의 신행모임이다. 해인총림 수좌이자 원해 스님의 사형(師兄)인 원융 스님도 원각회 출신이다.

 

원해 스님은 매주 토요일마다 서울 도선사 석불전에서 삼천배를 했다. 한겨울 추위가 와도 삼천배는 멈추지 않았다. 평일에는 조계사에서 매일 천배를 했다. 그렇게 공부를 하던 도중 출가 인연이 찾아왔다.

 


출가 초기 원타, 원해, 원행 스님(왼쪽부터)이 백련암 좌선실에서 자리를 함께 한 모습 

 

“원각회 도반 중에 아버지가 스님인 보살님이 있었습니다. 그 보살님을 통해 불교 관련 책도 받아 보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보살님이 출가를 한다고 합니다. 생각만 하고 있지 ‘결행’을 못하고 있던 저는 그 보살님에게 ‘한 방’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저도 일주일 뒤에 출가를 위해 해인사 백련암으로 내려갔습니다.

어머님께는 원각회 수련대회에 간다고 말씀드리고 집을 나왔습니다.”

 

스님이 출가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쓰러졌다.

스님의 친구가 백련암까지 찾아 왔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며 설득했지만 스님은 백련암을 떠나지 않았다. 부처님이 살펴 주셨는지 스님의 어머니는 최근까지 장수하셨다고 한다.

 

원해 스님은 원각회 활동을 하면서 백련암에서 칠천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삼서근(麻三斤)’화두를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의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스님은 다시 백련암으로 간 것이었다.

“원각회 시절 만난 성철 큰스님은 정말 눈에서 빛이 났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안광(眼光)이었습니다. 큰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 분이야말로 나의 스승이 되실 분이구나’는 생각이 들었었죠. 화두를 받아 간 뒤에도 한동안 큰스님께서 저의 꿈에 여러 번 나타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백련암으로 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죠.”

 

출가하기 위해 백련암에 왔지만 원해 스님은 3일간 성철 스님을 만나지 못했다. “답답하고 좀이 쑤셨지만”원해 스님은 기다렸다. 드디어 성철 스님의 호출이 있다는 전갈이 왔다.

“왜 왔노?”성철 스님은 대뜸 물었다. “출가하러 왔습니다.” “왜 출가하노?” “부처님 되려고요.” “부처님은 왜 돼노?” “생사(生死)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성철 스님은 시자스님들을 향해 “머리 깎아주라.”고 말했다. 원해 스님은 “고맙습니다.”고 꾸벅 절을 올린 뒤 방을 나왔다.

 

“머리를 깎는데 원융 스님이 자꾸‘후회 안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저는 기분이 너무 좋은데 스님이 자꾸 물으니 조금은 언짢았습니다. ‘빨리 깎아주세요’라고 제가 재촉했습니다. 하하.”

1973년 봄 그렇게 원해 스님은 수행자의 길을 시작했다.

 

스님은 행자생활을 시작하면서 새벽예불을 마치고 매일 오전 천태전에서 500배를 했다. 오후에는 울력, 저녁에는 공부를 하는 일정이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백련암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바로 초하루와 보름법회 때다. 성철 스님이 해인사에 법문하러 갈 때면 백련암에서 생활하던 제자들 역시 스님을 따라 큰절에 갔다. 행자였던 원해 스님은 말석에 앉아 성철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원해 스님은 여느 사형사제스님들과 마찬가지로 능엄주와 108참회문을 외우고 한문 공부에 일본어를 숙지하느라 정신없는 일과를 보냈다. 한문과 일본어에 익숙해지자 『불교성전』을 비롯한 경전들을 보기 시작했다.

 

“큰스님께서 내려 주신 책을 다 보면 원주스님을 통해 다른 책을 또 받아 공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책을 보다가 이해 안 되는 것이 있어 찾아가면 큰스님께서는 너무도 자상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출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해 스님은 채공(菜供) 소임을 맡았다. 하루는 성철 스님이 원해 스님을 불렀다 .

 

“큰스님께서 조그만 저울에 소금 3g을 올리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백련암 대중이 하루에 먹는 소금 양이다. 하루 세 끼 공양을 하니 한 끼마다 1g의 소금만 사용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수행자는 짜게 먹으면 몸이 무겁고 잠이 많이 온다. 짜게 먹으면 해롭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검소하게 살림을 살라는 의미였습니다. 또 무염식(無鹽食)을 하시는 큰스님의 당부이기도 했습니다.”

 

원해 스님은 성철 스님 방의 불을 때는 일도 했다. 방에 불을 지피는 일 역시 채공 못지않은 ‘정확함’을 요했다.

“큰스님 방의 온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워도 추워도 안 됩니다. 소임 인수인계를 할 때 불을 지피기 위해 필요한 나무의 개수와 굵기, 길이 등을 정확히 전달하고 전달 받아야 했습니다. 하하.”

 

이 시대에 더 필요한‘수좌5계’

 

원해 스님은 길지 않은 백련암 생활을 마치고 선방으로 향했다. “하루 빨리 도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 평창 상원사, 예산 향천사, 남원 백장암, 강진 백련사 등에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화두와 씨름했다.

 

“1975년 하안거를 상원사 선원에서 보냈습니다. 그때 입승이 무여 스님이고 청중이 혜국 스님이었습니다. 젊은 수좌 20여 명이 함께 정진했는데 다들 너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강진 백련사 선원에서는 정일 스님과 월인 스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월명암에 살 때는 오후에 방선(放禪)하면 무조건 일을 했습니다. 아침에는 죽, 저녁에는 수제비를 먹었는데 오후에 일까지 해야 해서 배고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

 


성철 스님을 모시고 원융 스님 원택 스님 등과 함께 해인사 인근 남산을 등반할 때의 모습. 맨 오른쪽이 원해 스님이다. 

 

선방 정진 뒤 스님은 경남 함양 안의포교당인 법인사에서 어린이 포교에 나서기도 했다. 철오 스님, 각묵 스님과 의기투합한 스님은 10여 명 안팎이던 어린이법회 참여 숫자를 670명까지 늘려 총무원장상을 받기도 했다. 십수 년간 오로지 어린이 포교에 매진한 결과였다.

 

“저나 철오 스님, 각묵 스님이 선방에 있다 와서 포교를 할 수 있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 명이 돌아가면서 탁발을 했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나중에 법당에서 뛰노는 어린이들을 보며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스님은 어린이 포교 후 건강이 악화 돼 오랜 세월 기도에 전념하기도 했다. 도봉산 천축사에서는 21일간, 운문사 사리암에서는 14일간 ‘용맹 기도’를 했다. 기도 역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했다. 천일기도 횟수만 해도 여러 번이다.

“워낙 건강이 좋지 않아 몸 바꿀 생각까지 했던”스님은 기도 후 건강이 회복되면서 다시금 정진에 진력할 계획들을 세우고 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던 것들 중 지금 이 시대 후학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수좌5계’(首座五戒)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 많이 하고 수행할 때 책보고 많이 먹고 많이 자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는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선원 풍토를 보면 얼마나 잘 먹고 잘 입습니까? 또 지대방에도 스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직업수좌’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원해 스님은 작금의 선방 풍토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수좌5계는 ‘수좌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이란 뜻으로 △간식하지 말라 △돌아다니지 말라 △말하지 말라 △잠을 적게 자라 △책 보지 말라 등의 내용이다.

 

원해 스님은 “수행에서도 기본이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성철 스님이 후학들에게 수좌5계를 강조할 때의 일화 하나. 하루는 선방에서 정진만 했던 한 수좌가 성철 스님을 찾아왔다. 그 스님은 성철 스님에게 공부에 진전이 없다며 공부 방법을 여쭈었다. 성철 스님은 단호하게 물었다. “몇 시간 자노?” “6시간 정도 자는 것 같습니다.” “서울대학에 가려고 하는 학생이나 사법고시에 합격하려고 하는 사람들 본 적 있나? 그 사람들은 하루 2~3시간도 안 잔다. 하물며 생사(生死)를 초월하려는 수행자가 남들 놀 때 다 놀고 또 다 자면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잔소리 말고 빨리 선방으로 돌아가라.”성철 스님은 매몰차게 그 수좌를 내쫓았다고 한다.

 

원해 스님은 성철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큰스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큰스님은 너무 엄하고 무서운 존재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와 관련해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자상하게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행자이던 제가 무엇을 여쭈어도 답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어려서인지 큰스님 곁에서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1년도 안 돼 선방에 가버렸습니다. 지금 화두공부는 진전도 퇴보도 없습니다. 이럴 때 큰스님이 계셨다면 공부에 대한 지침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쉽습니다.”

원해 스님은 ‘철부지 시절’을 후회했다. 특히 성철 스님에 대한 그리움을 표할 때는 눈가가 촉촉해지기도 했다.

 

스님은 성철 스님이 가장 강조한 것은 “꿈을 깨는 것”이었다고 했다.

“말할 것 없이 큰스님께서는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렇기 위해서 참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큰스님께서는 제자들이 절에서 어떤 소임을 맡기보다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원하셨어요. 이왕 사람 몸 받아 태어났으니 죽기 살기로 공부해 본래면목을 찾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점심공양 직후에 시작된 인터뷰는 어느덧 3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이어졌다. 자리를 정리하고 스님은 백련암 곳곳을 둘러봤다. “내 모습이 변한 것처럼 백련암도 많이 변했다.”고 했다.

곧이어 스님은 하루 두 번뿐인 진주행 버스를 타야 한다며 짐을 다시 챙겼다. 큼직한 바랑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서는 스님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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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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