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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속박의 말 해방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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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4 년 1 월 [통권 제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79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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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진실의 분리

 

누군가 말하기를 ‘말은 사상의 옷’이라고 했다. 한 사람이 가진 생각과 가치관은 말과 글이라는 옷을 입혀야만 내면의 생각이 표현되고 남에게 전달된다. 말과 글로 표현되지 않는 생각은 아무리 심오하고 위대한 것일지라도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의 지적유산을 축적하고 서로 공유하며, 인간 상호간의 소통을 위해 말과 문자만큼 소중한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에도 한계와 단점이 있다. 우선 말은 말하는 사람의 진심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손톱만큼의 진실이 없어도 말로는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이라는 언어적 기표는 반드시 진실을 담보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발언되기 때문이다. 말과 언어는 단지 기호화된 기표일 뿐이어서 말과 진실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는 약점을 갖고 있다.

 


 

 

이처럼 말이 진실을 담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에 쉽게 현혹되고, 진실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쉽게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자주 범한다. 그리고 약삭빠른 사람은 사람들이 가진 그런 약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은 말로써 성인들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종교인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성인의 말씀을 빌려 자신을 우상화시키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설법과 강론을 할 때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고, 도덕적인 삶을 말하고, 자비와 연민을 말한다. 그런 말이 곧 그 사람의 인품이나 삶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말과 말하는 사람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셰익스피어는 “좋은 말은 선행의 일종이지만 결코 말이 행위는 아니다.”라고 했다. 좋은 말을 함으로써 좋은 생각을 확산시키고, 좋은 행동을 유도하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말 자체가 진실이나 행위자체가 아니므로 좋은 말을 하고, 거룩한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도(道)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 도인은 아니며, 깨달음에 대해 법문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 깨달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깨달음에 대해 자꾸 말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말 그 자체가 깨달음처럼 군림하곤 한다. 성철 스님 역시 여느 선사들과 같이 말과 문자를 경계했다. 심지어 법상에 올라 설법하는 당신의 법문마저도 독약이라고 했다.

“내가 법상에 앉아서 쓸데없이 부처가 어떻고 선이 어떻고 교리가 어떻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이 법문은 중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생들에게 독약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이 법문이 사람 죽이는 독약 비상인 줄 바로 알 것 같으면 그런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불법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백일법문』, 상)

진정한 깨달음은 말을 초월한 곳에 있다. ‘문자가 없는 것이 곧 해탈’이라는 『유마경』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성철 스님은 자신의 법문을 듣고도 그것이 중생을 죽이는 독약임을 알아차린다면 불법을 좀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물론 스님께서 일부러 거짓을 말하고, 중생을 죽이기 위한 마설(魔說)을 설해서가 아니다. 언어와 문자에 매달려서 본지를 놓치게 되면 아무리 좋은 설법이라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도는 말로 전할 수 없고 단지 도를 형상할 뿐인데 사람들은 말로써 도를 삼고, 말로써 깨달음을 삼으려고 한다. 만약 사람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런 착각에 빠진다면 그 순간 말은 독이 되고 만다. 따라서 법문을 들을 때 말이 지시하는 뜻을 헤아려야지 언어적 기호에 현혹되면 말은 독이 되고 만다.

 

해탈의 말, 속박의 말

 

잘못된 언어문자가 독약이라고 해서 모든 말이 나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 중에 누에고치와 거미의 비유가 있다. 누에고치와 거미는 똑같이 몸에서 실을 뽑아낸다. 하지만 누에고치는 자신의 몸에서 뽑아낸 그 실로 자신을 돌돌 말아 스스로를 속박한다. 반면 거미는 자신이 뽑아낸 실로 허공에 집을 짓고 허공을 오가는 자유를 누린다.

 

사람 역시 자신의 입으로 말을 뱉지만 어떤 이는 말에 속박되고, 어떤 이는 억압을 풀고 자유를 얻는 해탈의 언어로 삼는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말의 논리와 언어에 갇힌다면 그것은 누에고치와 같은 것이다. 반대로 말의 논리와 언어에 속박되지 않고 영혼의 해탈을 위한 자양으로 쓴다면 거미줄과 같은 말이다. 스님께서 자신의 법문을 일러 독약이라고 말한 것도 말에 매이면 스스로를 속박하는 누에고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말에 쉽게 현혹되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겼다.

“일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열반송의 문자가 지시하는 것처럼 스님이 진짜 남녀 무리들을 속인 것은 물론 아니다. 만약 이 내용을 그렇게 받아들여 스님을 공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말에 걸려들어 스스로를 죽이는 꼴이 되고 만다. 일평생 남녀무리를 속였다는 것은 스님이 세상 사람들을 속였다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알음알이로 말에 속박되어 왔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성철 스님 다비식 모습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성철 스님 스스로가 남을 속였다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 스스로가 본지를 놓치고 말에 속고 있음을 경책하는 것이다. 만약 말과 글에 속는다면 스님이 아니라 설사 부처님과 달마 스님의 법문을 듣더라고 속박의 언어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자성을 깨쳐서 모든 집착을 벗어나면 참으로 자유자재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서는 집착을 버리래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 부처님이나 달마조사가 와서 설법을 한다 하여도 귀를 막고 달아나 버려야 합니다.” (『백일법문』, 상)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말이라는 기호놀음이 아니라 자기의 본성을 바로 깨치는 것이다.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설사 부처님이나 달마 조사의 설법에도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부처님과 달마를 피해 달아나라는 것이 아니라 말에 떨어져서 본성을 등지지 말라는 것이다. 서산 스님도 『선가귀감』에서 “진리의 세계를 보는데 있어서는 문자도 악마와 같은 방해물이고, 온갖 사물의 이름과 형상도 악마와 같은 방해물이고, 부처님의 말씀까지도 악마와 같은 방해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스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스님이 내 뱉은 말에 걸려들어 스스로 지혜의 죽음을 자초한다. 어떤 이들은 스님이 평생 남녀무리를 속이고 그 죄가 무거워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말한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도 말에 속지 말고, 말이 지칭하는 뜻을 바로 보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자상함을 베푸셨지만 어리석은 중생은 마지막 말씀까지도 해탈의 언어가 아니라 스스로를 결박하는 속박의 언으로 삼은 셈이다.

 

말과 글자에 속박된 이들은 남의 말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그 말에 의해 스스로도 고통 받는다. 성철 스님은 1987년 부처님오신날 법어에서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부처님입니다.”라는 법어를 내렸다. 이 말씀은 사탄과 부처가 모두 분별 망상이 만들어 낸 거짓이며, 본성에서 보면 사탄도 없고 부처도 없는 적멸(寂滅)의 세계임을 일깨우는 법문이다. 따라서 옳으니 그르니 하니 분별망상으로 스스로 지옥을 자청하지 말고 모든 차별변견을 벗어나 영혼의 안락과 대자유를 누리라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말에 속박당한 이들은 이것은 두고 스님께서 사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고 말한다. 이원화된 가치관, 분별의 세계를 뛰어넘을 것을 가르쳤지만 말과 글에 묶여 스스로 증오심을 일으키고, 영혼의 평화와 마음의 지혜를 죽이는 독약으로 삼은 것이다.

 

우리는 문자주의에 빠져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육신의 부활을 믿고 죽은 송장과 몇 달씩 생활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나아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이 돈다는 천동설을 진실로 믿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을 핍박한 사례도 본다. 이는 말과 문자에 현혹되어 스스로를 속박하고 진실을 왜곡한 사례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박힌 가시를 빼는 말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언어문자를 통해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선에서는 불립문자와 언어도단을 말한다. 그러나 말이 없으면 또 어떻게 무명에 쌓여 있는 중생들을 깨우칠 것인가? 말도 잘 쓰면 무명을 밝히는 도구가 되는 법이다. 마치 손에 박힌 가시를 빼는데 또 다른 가시가 필요하듯이 무명에 쌓인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인도할 지혜로운 말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말에 속박당하지 않고 문자가 지칭하는 본지를 따라간다면 말로 기록된 경전을 아무리 읽어도 상관없다. 그것은 거미와 같은 자유의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서산 스님도 『금강경』을 예로 들면서 “문자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정진할 만한 경전”이라고 했다.

 

말에 대한 이런 가르침은 꼭 법과 진리에 관한 것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도 대화가 안 되고, 온 사회가 불통과 단절의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런 갈등은 말이 가진 의미를 서로 다르게 받아들임으로써 생기는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육조단경』에는 ‘법화전(法華轉) 전법화(轉法華)’라는 가르침이 있다. 말의 속성을 잘 알면 『법화경』의 말씀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사람이 되어 『법화경』을 굴리게 된다. 하지만 말의 논리와 질서에 휘말리게 되면 도리어 말이 사람을 굴리는 역전관계가 되고 만다.

 

현대사회는 정보의 시대다. 세상은 SNS와 같은 소셜 관계망으로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그런 관계망과 정보는 말과 글이라는 언어적 정보로 구성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말을 거미줄처럼 활용하면 그와 같은 관계망 속에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넘쳐나는 말에 휘둘리지만 않는다면 정보는 지혜의 보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말에 속박당한다면 넘쳐나는 정보는 오히려 우리를 속박하는 결박이 되고, 삶의 평화를 깨뜨리는 독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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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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