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영원한 행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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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14 년 1 월 [통권 제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495회 / 댓글0건본문
이번 호부터 ‘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고우 스님께서는 출가 후 줄곧 선원에서 정진해 오셨으며 지금도 참선 대중화를 위해 진력하고 계십니다. 화두 참선의 의미와 방법, 그리고 효과에 이르기까지 고우 스님이 직접 경험한 내용들을 이 지면을 통해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 드릴 예정입니다. -편집자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지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 짜증과 화를 떠나 평화롭고 즐거운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어떤가요?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나요? 아침에 눈 떴을 때 밝은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나요?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람과 일에서 늘 기쁨과 행복이 함께 하나요?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 때 오늘도 보람 찬 하루였다는 생각이 드는지요? 아마도 이렇게 매일매일 행복하게 사는 분은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보여주는 신문 기사가 있더군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통계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이 자살률 1위, 이혼율 1위라고 하더군요. 1년에 1만 5,000명, 하루에 40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답니다. 또, 1년에 11만 5,000쌍이 이혼하고요. 그만큼 우리 국민들의 삶이 힘들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 안타깝고 염려스러운 것은 청소년 자살률도 1위, 청소년 행복지수도 최하위랍니다.
또 다른 자료에는 우리나라 국민의 노동시간과 알코올 소비량도 세계 최고라 하더군요. 삶이 힘드니 자살과 이혼이 늘어나는 것이고, 일은 많지만, 삶이 고달프니 술로 위안을 받고 있는 것이겠지요?
누구나 행복을 바라는데, 왜 우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할까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길일까요?
세속적 행복의 한계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자본 즉 돈이 중심인 사회이니 흔히 ‘돈이 최고’라는 가치가 우리를 지배합니다. 돈이 있어야 좋은 교육을 받고, 더 나은 직장과 결혼, 그리고 집도 구할 수 있지요. 심지어 돈이 있으면, 외모도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자본주의 사회제도에서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좋은 학교와 직장, 그리고, 권력과 지위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돈이나 권력, 지위가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없어 불행하지만, 또 어떤 이는 돈 때문에 불행해지기도 하지요. 가령 우리 주변에 흔히 보듯이 부모의 유산 때문에 가족이 갈등하다 법정 다툼까지 가는 것을 봅니다. 또 어떤 이는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가지려다 감옥까지 가서 더 불행해지는 것을 봅니다.
또 권력도 그렇습니다. 바르게 잘 사용하면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자신도 복을 누리지만, 잘못 사용하면 스스로 불행해지고 남에게도 큰 피해를 주지요. 우리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역대 대통령들도 크고 작은 불행을 겪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돈이나 권력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 또한 이를 증명합니다. 부처님은 2600년 전 인도 석가족 국가의 왕자로 태어났지요. 이름은 싯다르타. 왕자이니만큼 부귀영화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자 싯다르타는 인간이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도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 또 이웃이 행복하지 않고 홀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영원한 행복을 찾아 출가하였습니다. 즉, 세속사회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는 위치에 있더라도 영원히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종교에 대안을 찾아 출가한 것이죠.
영원한 행복을 찾는 방법?
종교란 말 그대로 궁극적인 가르침입니다. 인간에게 으뜸이 되는 근원적인 가르침이 종교지요. 인류 세계의 수많은 철학 사상과 학문이 있지만 가장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가르침이 종교입니다.
싯다르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떠나 영원한 행복을 찾으려 했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떠나 영생과 궁극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스님들의 모습 - 고우 스님 원고
여러 종교의 행복에 대한 표현이 다양하지만,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보편적 행복입니다. 하늘나라 천당, 극락, 영생, 자유, 구원, 열반 등…. 모두 인간의 생로병사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이렇듯, 종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영생과 보편적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방법은 크게 다릅니다. 신이라는 절대자가 인간과 우주를 창조했다고 보는 ‘신(神)’ 중심의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신에게 찾습니다. 신의 이름이 ‘하나님’이든 ‘알라’, ‘브라만’ 이든 이름은 달라도 절대자는 하나라 보지요. 때로는 이 때문에 다투고 전쟁까지 해왔습니다만, 어쨌든 이러한 신의 종교가 대다수이지요.
예부터 인간이 스스로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느낀 이후 어떤 절대자를 상정해서 그로부터 구원과 안녕을 구하는 가르침은 동서고금에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나 회교, 힌두교에서는 이를 체계적으로 정립해서 정교한 종교를 만들었지요. 그래서 ‘믿으라 그러면 구원 받으리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의 종교는 절대자인 신과 피조물인 인간을 나누고,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자 신을 믿어야 구원과 복을 받습니다.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이라 말합니다.
인간 스스로 영원한 행복을 찾은 사람, 부처님
불교도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행복을 내 안에서 찾습니다. 신 중심의 이웃종교는 행복을 자기 밖의 신에서 찾는다면, 불교는 자기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죠. 즉, 불교는 자기 마음을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불교도 이웃 종교와 같이 행복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같으나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다릅니다.
이것이 세계 주요 종교 중 불교만의 특징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인간 스스로 영원한 행복을 찾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도 석가족의 싯다르타가 정립한 종교입니다. 그는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해탈한 깨달음을 성취한 최초의 인간입니다. 깨치기 전에는 싯다르타였지만, 깨닫고 난 다음에는 ‘깨달은 자’라는 뜻의 부처님(붓다)이 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할 때 석가(釋迦)는 인도 샤카(Śākya) 족(族)의 이름이고, 모니(muni)는 성인(聖人)이라는 뜻이며, 부처는 붓다(Buddha)의 우리 말입니다. 석가족의 성인 깨달은 자란 말이죠.
부처님의 고행상
그래서 불교의 교조는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아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고 정립한 종교입니다.
불교는 자기 밖의 절대자(신)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영원한 행복을 성취한 최초의 종교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누구나 찾는 영원한 행복, 즉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해탈하는 길(道)은 바로 자기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이렇게 설법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영원한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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