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경전공부와 화두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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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4 년 3 월 [통권 제1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161회 / 댓글0건본문
허공에 찍은 도장
하늘을 나는 새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광활한 창공에는 어떤 흔적도 없지만 새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철따라 오고 간다. 선(禪) 역시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과정이 아니기에 선사들은 고착화된 길을 고집하지 않는다. 임제의현은 조사선을 일러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印空印]’이라고 했다. 어떤 논리와 이론을 좇아서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입만 벙긋해도 벌써 본지에서 어긋난다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이 나왔다.
강원에서 간경을 하고 있는 학인스님들
그렇다면 선사들은 왜 이토록 문자를 경계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선에서 얻고자하는 깨달음이 언어와 논리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와 논리에 빠지면 다른 사람의 견해를 자신의 견해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것은 모두 귀(耳)라는 문을 통해 들어오는 남의 소식일 뿐이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식이 아님에도 보배처럼 집착하게 된다.
일찍이 무문 선사는 “문으로 들어온 것은 집안의 보배가 아니다(從門入者 不是家珍)”라고 했다. 귀로 들어서 주워섬기고, 남의 견해를 자기 것으로 복제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말과 이론이 아무리 고상하고 심오할지라도 마음을 밝히는 수행에서는 보배가 될 수 없다. 사람 사는 집에만 문이 달린 것은 아니다. 인간이 가진 여섯 가지 감각기관 또한 ‘육문(六門)’이라는 문이다. 그 문을 통해 마음을 혼미케 하고, 번뇌를 일으키는 온갖 정보들이 들어온다. 그래서 대문을 단속하지 못하면 집안에 도둑이 들고, 감각의 문을 단속하지 못하면 마음에 번뇌가 드는 법이다.
성철 스님은 후학들에게 남의 집에 가서 밥 빌어먹는 거지노릇 하지 말고 ‘내 밥 내가 먹어야 한다’고 했다. 언어와 문자를 통해 남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듣지 못한 낯선 소리 하나 얻어 듣고 자신의 견해로 삼는 것은 모두 ‘남의 집에 가서 밥 빌어먹는 짓’이다. 반대로 ‘내 밥 내가 먹는 것’은 자기 체험에서 나오는 내면의 소식을 바로 듣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문으로 들고 나는 것은 보배가 될 수 없고, 선은 허공에 도장을 찍은 것과 같기 때문에 선문에서는 ‘문이 없음[無門]을 진리의 문[法門]’으로 삼는다. 진짜 소식은 감각과 분별의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본성에서 오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그와 같은 소식을 듣는 것을 혜능은 ‘자신의 성품을 봄[見性]’이라고 했다.
문수의 뺨을 때린 무착
성철 스님도 자기 체험에서 나오는 본성의 소식을 누누이 강조했다. 스님은 무착 스님의 일화를 통해 분명한 자기 견해를 갖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옛날 중국의 무착(無着)이란 스님이 문수 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가서 공양주 소임을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큰 가마솥에서 팥죽을 끓이고 있는데 그 팥죽 끓는 솥 위로 문수보살이 현신(現身)했다. 보통 근기였다면 향을 피우고 종을 치고 대중을 운집시키는 등 한바탕 소란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착 스님은 팥죽을 젖던 주걱으로 문수 보살의 뺨을 철썩 때리며 “문수는 네 문수며 무착은 내 무착이로다.”라며 오히려 호통을 쳤다.
언뜻 보면 참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렇게 할 거였다면 무엇 하러 문수 보살을 만나러 갔으며,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의 이야기조차 듣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로부터 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 대목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는 눈앞에 나타난 문수 보살을 수행을 방해하는 경계로 받아들인 것이다. 만약 무착이 문수보살 왔다고 난리를 쳤다면 그는 신비주의에 빠졌거나 미신에 빠진 사람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둘째, 참다운 소식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아는 소식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의 길이 끊어진 자성의 소식을 듣기 위해 씨름하는 것이 선이다. 무착 스님은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를 만났지만 겉으로 나타난 환영과 같은 경계를 고향에서 오는 소식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내 무착”으로 설명되는 본성의 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은 이 고화古話를 들려주고는 “대중 가운데서 ‘성철은 너 성철이고 나는 나다. 긴 소리 짧은 소리 무슨 잠꼬대가 그리 많으냐!’ 하고 달려드는 진정한 공부인이 있다면 내가 참으로 그 사람을 법상 위에 모셔 놓고 한없이 절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문수가 와도 흔들리지 않고 자성의 소식을 기다릴 줄 아는 기개야 말로 출격장부(出格丈夫)라는 것이다. 수행자는 자기 밥으로 상징되는 내면의 소식을 들을 뿐, 남의 집으로 상징되는 경계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경전공부와 화두공부의 병행
불교(佛敎)란 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종교다. 그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 경전이고, 경전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 교학이다. 따라서 불교란 곧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의 지혜를 여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행이 담보되지 않는 경전은 실천이 담보되지 않는 이론처럼 공허한 것이다. 경전의 말씀은 어떻게 해야 내면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 소식은 언어와 문자만으로는 들을 수 없으며, 경전을 많이 외운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우리가 앞으로 공부를 함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경전을 배우면서 참선을 하고, 참선을 하면서 경전을 배우고 조사어록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언어문자는 산 사람이 아닌 종이 위에 그린 사람인 줄 분명히 알아서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 『백일법문』 상
해인사에서 납자들을 지도하고 있는 성철 스님
성철 스님하면 책 보지 말 것을 강조하고, 철저하게 화두 참구만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안거에 동참한 수좌들에게는 책 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에만 몰입할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모든 대중들을 그렇게 지도하지는 않았다. 『백일법문』에서는 경전과 참선을 병행하라고 분명히 타이르고 있다.
경전은 이론과 지도에 비유될 수 있고, 참선은 실천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전이라는 지도를 통해 황금이 묻혀 있는 땅을 찾았다면 그 다음에는 참선을 통해 황금이 있는 곳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성철 스님은 황금을 캐는 실천적 행위가 바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면밀하게 화두를 탐구할 때, 번뇌의 껍질을 뚫고 내면 깊이 파고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본래면목을 만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을 배우면서도 참선이라는 실참을 반드시 해야 하고, 참선을 하면서도 무턱대고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경전이라는 이론을 익히고, 조사어록이라는 지침을 따라야 한다.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제대로 참고하지 않으면 황금이 묻혀 있는 곳도 모른 채 아무 땅이나 파헤치는 헛수고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성철 스님은 경전공부와 참선공부를 통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전과 수행, 조사어록과 화두 참구는 따로 떨어질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지혜를 밝히는 것을 중심으로 통합되어야할 문제이다.
따라서 경전만 보고 불교를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황금이 묻힌 땅위에 서서 부자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교리나 조사어록에 대한 이해 없이 화두만 참구하는 것은 무턱대고 황무지를 굴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둘을 조화롭게 통합할 때 비로소 금맥을 바로 찾고 황금을 손에 쥘 수 있다.
『백일법문』에 따르면 교와 선은 이처럼 서로 보완되어야할 관계다. 다만 화두참구를 통해 듣게 되는 소식은 문으로 드는 소식이 아니라 내면의 소식이며, 남의 집에 가서 언어와 문자를 주워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 밥을 내가 먹는 것이다. 본성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파고드는 실질적인 도구가 필요하다. 스님은 그것이 바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스님은 “그 무엇보다는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성불하는 지름길이라고 조사스님들은 다 말씀합니다. 그러니 이 법회 동안에는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화두를 해야겠습니다.”라고 화두 참구를 제시했다.
경전이라는 지도를 통해 도달한 곳은 황금이 묻혀 있는 지표면이다. 황금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지표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 황금이 있는 곳으로 파고드는 도구가 바로 화두 참구라는 것이다. 물론 도구는 다양할 수 있다. 혹자는 육바라밀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혹자는 위빠사나라고 할 수도 있고, 혹자는 염불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늘 마음속에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을 지어 가야 한다.”며 화두 참구의 길을 강조했다. 그것은 다른 수행을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화두 수행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간화선의 종장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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