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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십이연기, 열두 가지 조건에 따른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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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4 년 9 월 [통권 제1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13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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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과 연기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하나가 ‘인연(因緣)’이다. 무심코 사용하지만 이 말은 불교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단어 중에 하나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그 나름의 원인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해가 뜨는 것은 지구의 자전 때문이고, 가을이 오는 것은 지구의 공전 때문이듯 모든 일에는 원인이 존재한다. ‘나’라는 한 개체도 근원을 따져 들어가면 부모의 인연이 있었고, 그 인연이 맺어지기까지 또 수많은 인연이 개입되어 있다. 이렇게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원인이 있는데 이를 ‘인연’이라고 한다.

 

이 말은 하나의 단어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인연’이란 말은 ‘인’과 ‘연’이라는 두 개념이 조합된 말이다. 인연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존재나 현상을 발생시키는 원인을 의미하지만 그 중에서도 ‘인(因:hetu)’은 직접적인 원인을, ‘연(緣:pratyaya)’은 간접적인 조건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 조건이 결합하여 성립된 ‘인연’에 의해 존재하거나 일어난다.

 

식물을 예로 들면 DNA 정보를 담고 있는 씨앗은 ‘인’에 해당하고, 씨앗이 발아하고 싹을 틔워 식물로 자라날 수 있도록 해주는 환경은 ‘연’에 해당한다. 이렇게 ‘인’과 ‘연’이 결합하면 여기서 하나의 결과가 도출되는데 이것을 ‘과(果:phala)’라고 부른다. 그 과는 또 새로운 인과 연이 되어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 간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현상은 이와 같이 무궁무진한 인연의 작용에 의해 성립되고 움직인다.

 

그런데 ‘인연’과 ‘연기’라는 말을 혼용해 사용하기도 한다. 인연이라는 말은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발생시키는 원인을 형성하는 두 축인 ‘인’과 ‘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말이다. 씨앗이 적당한 토양을 만나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씨앗이라는 ‘인’과 토양이라는 ‘연’이 만나 하나의 현상을 발생시키는 원인과 조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도 “어떤 것을 인연법이라 하는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반면 ‘연기(緣起)’라는 말은 인과 연이 만나서 하나의 현상이 성립되는 ‘작용’에 초점을 맞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인연은 인과 연의 관계성을 밝히는 개념이고, 그 관계성으로부터 과가 발생한다고 했다. 따라서 인연의 기본적인 특징은 어떤 관계 속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그와 같이 관계 속에서 어떤 작용이 발생하는 것을 설명하는 말이 ‘연기’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는 ‘patītya(緣)-samutpāda(起)’라는 연기의 산스크리트 표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의미는 “~때문에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경전에서도 “연기에 수순하는 것을 연생법(緣生法) 이라고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조건을 뜻하는 ‘연’에 의해서 ‘발생’ 또는 ‘성립’하는 법칙이라는 뜻이다.

 

열두 가지 조건 발생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설은 우주적 관계성에 관한 사유로 확장되지만 초기불교의 연기설은 ‘지금 여기’ 인간현실에 대한 문제를 화두로 삼는다. 즉 인간의 삶이 왜 고통스러운가? 그 고통은 어디서 왔는가를 중심주제로 삼는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생로병사라는 네 가지 고통이다. 그 가운데 죽음이야말로 모든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이다. 그렇다면 그 죽음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십이연기설은 늙음과 죽음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열두 가지의 조건 발생관계로 설명한다. 즉,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가 그것이다. 십이연기 각항에 대한 설명은 지면상 생략하고 전체적인 대의에 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설한 녹야원 

 

첫째, 열두 가지 항목의 기준이다. 얼핏 보면 십이연기는 무명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으로 무명이 십이연기의 중심주제 같지만 십이연기의 기준은 ‘지금 여기’ 인간의 현실이다. 그 현실이란 늙고 병듦이라는 고통에 직면해 있는 우리들의 삶이다. 십이연기설은 죽음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에 대해 질문하고 ‘생이 있음으로 죽음이 있다’고 답한다. 그리고 다시 생은 어디서 왔는가? 또 유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형식으로 지속적인 물음을 통해 고통의 근원을 추적해 간다. 이처럼 고를 발생시키는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십이연기설이다.

 

둘째, 고를 발생시키는 근원적 뿌리는 무엇일까? 십이연기설에서는 그것을 ‘무명(無明, avijjā)’이라고 했다. 경전은 “어떤 것을 연생법이라 하는가. 무명이 지어짐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를 발생시키는 열두 가지 고리는 무명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밝음 없음’에서 행(行)이 발생한다. ‘행(行, saṅkhāra)’이란 일체 모든 존재나 과정을 만들어가는 형성력을 말한다. 지혜에 근거하지 않고 무지를 조건으로 만들어지는 형성력이라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무명이 지어가는 열두 고리를 따라가면 인식과 감각이 발생하고, 마침내 ‘유(有)’와 ‘생(生)’이 발생하고 그로부터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늙음과 죽음을 유발하는 고의 근원적 뿌리는 무명이다. 밝음의 결핍이 모든 고통의 근원인 것이다. 여기서 밝음이란 지혜를 상징하는데 여래가 깨달은 연기법이나 무아(無我)나 무상(無常)의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밝음으로 상징되는 지혜를 깨달은 분이다. 깨달음의 지혜는 무명에 의해 전개되는 죽음의 고리를 끊고 생명의 세계를 열어준다. 따라서 무명이 죽음으로 귀결된다면 지혜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그 생명이 바로 ‘지혜의 생명(慧命)’이다. 결국 늙음과 죽음이라는 고통을 끊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처방은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다.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설명방식을 연기에 대한 순관(順觀)이라고 한다. 무명에서 고통이 발생해 가는 과정을 순서대로 밝히고 있음으로 이를 유전연기(流轉緣起) 또는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한다. 순관은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고 맨 마지막에 노사가 있다는 설명방식이다.

 

원인을 알면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길도 나오는데 그것을 역관(逆觀)이라고 한다. 역관이라고 해서 노사에서 무명으로 십이연기를 거꾸로 거슬러 가는 것이 아니라 고를 유발하는 원인을 제거해 가는 방식이다. 즉 무명이 없으면 행이 없고, 행이 없으면 식이 없고 ... 이렇게 하여 마침내 늙음과 죽음이 없어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고의 원인을 제거하고 본래 고요한 곳으로 돌아감으로 환멸연기(還滅緣起) 또는 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한다.

 

연기설의 특징

 

부처님의 최초 법문은 사성제 팔정도 법문이고, 그 법문은 연기설을 바탕으로 설해졌다. 따라서 연기설은 부처님의 법문 중에 가장 앞선 법문이며, 초기불교의 핵심적 교리에 속한다. 연기라는 이름으로 설해진 초기경전은 매우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나 존재의 발생을 열두 개의 항목으로 설명하고 있는 십이연기가 가장 대표적인 교설이다. 십이연기설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십이연기설이 곧 중도라는 것이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인연과 연기는 같은 개념을 다른 관점에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다는 연기법이 곧 인연법이다. 그런데 백일법문은 부처님은 중도를 깨달았다고 했다. 이 말은 연기=인연=중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관사상을 체계화한 용수보살도 ‘인연으로 생겨난 법은 공한 것이며, 그것은 달리 중도’라고 했다. 연기와 공(空)과 중도(中道)를 같은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중도의 내용이 곧 연기법이자 인연법임을 말하는 것이다. 성철스님 역시 “부처님이 발견한 이 연기설, 또는 십이연기설 역시 중도의 궤도를 이탈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의 핵심교리인 이 십이연기설이야말로 참으로 중도를 나타내는 귀중한 진리”라고 했다. 결국 연기법, 인연법, 십이연기설, 중도는 모두 같은 맥락의 교리임을 보여준다.

 

둘째, 법(法)의 확정성이다. 연기법은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는 법[法住]이다. 이 법은 부처님께서 만들어낸 법이 아니라 깨달은 법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도 “여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아도 이것은 정해져서, 법으로 정해져서 법으로 확립되어져 있다.”고 했다. 연기법은 부처님 출생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그대로 있다. 부처님은 그 법을 깨달아서 아는 것이며, 중생들을 위해서 분명하고 명료하게 설법하며 ‘너희들은 보라’고 선포한 것이다.

 

셋째, 법의 진실성이다. 경전은 연기법에 대해 ‘진여성(眞如性)’, ‘불허망성(不虛妄性)’, ‘불이여성(不異如性)’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연기법은 진실하며, 허망하지 않으며, 진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런 법을 깨달았음으로 부처님의 깨달음 또한 그와 같다.

 

넷째, 상의성(相依性)이다. 십이연기의 열두 가지 항목은 무명(無明)에 연(緣)하여 행(行)이 있는 것처럼 원인과 조건이 서로 의지하여 발생하는 상호의존적 관계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서로 의지하여 발생하는 연기법이다. 삶은 죽음에 의지하고 죽음은 삶에 의지하고, 무명은 행을 의지하고 행은 무명을 의지해 있다. 연기설의 이와 같은 상의성은 이후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此起故彼起)’와 같이 정형화된 구절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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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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