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아나카의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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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4 년 11 월 [통권 제1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52회 / 댓글0건본문
아나카의 북과 공, 연기
옛날에 다사라하나(Dasarahana)라는 사람이 아나카(anaka)라는 북을 갖고 있었다. 그의 북은 소리가 매우 훌륭하고, 깊고 아름다워 40리나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아나카의 북은 낡아서 이곳저곳 찢어지기 시작했다. 아나카는 곳곳에 소가족을 덧대어 북을 꿰맸지만 예전처럼 좋은 소리, 아름다운 소리, 깊은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게다가 갈수록 가죽은 낡아서 떨어져 나가고 마침내 나무로 만든 북틀만 앙상하게 남았다.
『잡아함경』에 수록된 <고경(鼓經)>에서 부처님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다. “미래의 비구들도 몸을 닦지 않고, 계율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아서 여래께서 설한 깊고 깊으며 밝게 비치는 공상(空相)의 요체와 연기법에 수순하는 것이 소멸하고 말 것이다. 마치 낡아 부서져 틀만 남은 저 북처럼.”
사진: 대흥사
이 경은 공(空) 사상과 연기법을 아나카의 북에 비유했다. 부처님께서 설한 공사상과 연기의 가르침은 아나카의 북소리처럼 깊고 아름다운 소리가 되어 중생들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틀만 앙상히 남아 더 이상 소리 나지 않는 북처럼 공(空)과 연기에 대한 바른 이해도 사라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남전 상응부 경전에는 공에 대한 바른 이해가 사라지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래가 말한 모든 경전은 매우 깊어서 뜻이 깊고 출세간의 공상응(空相應)의 것이다. 이를 설할 때에 잘 듣지 아니하며, 귀 기울이지 아니하며, 요해(了解)의 마음에 머물지 아니하며, 받아 지니고 잘 알아서 이 법을 사유하려 하지 아니한다.”
공의 이치는 그 의미가 매우 심오해서 잘 듣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고,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명맥이 끊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공에 대한 교설과 연기에 대한 학설은 있지만 교학적 틀만 남고 깊은 이해가 없다면 북틀만 남은 나아카의 북과 다를 바 없다.
근본불교의 무아와 대승불교의 공
<고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공사상과 연기법은 불교의 핵심사상이다. 흔히 공사상하면 반야부경전이나 용수의 중관사상을 떠올린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공사상은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설법하실 때 이미 설한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삼법인이 그 예증이다.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고 인연 따라 변화하고 흘러간다. 그렇게 실체가 없는 모든 존재의 본성을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성철 스님은 대승불교의 ‘공(空)’은 초기불교의 ‘무아(無我)’와 같은 교설이라고 보았다.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공통적 사상은 무아와 공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중도일승(中道一乘)이나 일승원교(一乘圓敎) 같은 대승불교의 교설도 공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불교사상의 근간은 무아(無我)-공(空)-중도(中道)라는 맥락으로 전개된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불교의 핵심사상을 아나카의 북소리로 비유했다. 이 가르침은 훌륭하고, 깊고 아름다
운 북소리처럼 무명에 잠든 중생들을 일깨우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소리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공에 대한 허무주의적 오해
아나카의 아름다운 소리도 세월이 가면 사라지듯 불법의 핵심 가르침도 시간이 흐르면 도식화된 교설만 남게 된다. 무아와 공의 이치를 깊고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본래 의미는 퇴색하고 언어와 논리적 틀만 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아와 공에 대한 이치를 잘못 이해하여 ‘나는 없다’ 거나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눈앞에 분명히 사물이 존재하는데도 부처님이 공이라고 했으니까 사물 자체가 없다고 한다. 공을 이렇게 이해하는 태도를 ‘단멸공(斷滅空)’이라고 한다. 무아와 공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눈앞에 존재하는 현상인 ‘색(色)’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이를 달리 ‘색멸공(色滅空)’ 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현상적 모습과 본질적 성질로 나눠볼 수 있다. 현상적 모습은 분명히 눈앞에 존재하기에 그것은 ‘있음〔有〕’이다. 눈앞에 있는 데도 없다고 하는 것은 공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공하다는 것은 현상적 존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성이 공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는 완전하게 있는‘유(有)’도 아니고, 완전히 없는 ‘무(無)’도 아니다. 그런데 단멸공과 색멸공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있음’과 ‘없음’이라는 긴장관계로 유지되는 존재의 속성을 보지 못하고 공에만 집착하여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다.
세상을 이렇게 이해하면 ‘나’란 존재하지 않음으로 좋은 일도 할 필요도 없고,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공함으로 얻을 것도 없고, 잘 할 것도 없고, 희망도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연히 긍정적 노력도 하지 않으며 선행을 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허무적이고 부정적으로 공을 이해하는 것을 ‘악취공(惡取空)’이라고 한다. 공의 의미를 잘못 취했다는 뜻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가 그대로 실재하며 ‘나’라는 독립된 실체가 있다고 믿는 유론(有論)은 세상을 보는 첫 번째 인식의 오류다. 반대로 ‘나’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어떤 존재도 없다고 보는 무론(無論)은 두 번째 오류다. 둘 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극단적 사유에 치우쳐 본질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공에 대한 바른 안목은 있음과 없음을 중도적으로 보는 눈이다.
공에 대한 연기적 이해
공은 눈앞에 존재하는 현상적 사물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존재의 본성이 비어 있기 때문에 이를 ‘색성공(色性空)’이라고 한다. 개별적 존재인 ‘색(色)’은 그 스스로 실체가 없는 공이므로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 관계 속에서 성립되고, 관계 속에서 유지되고, 관계 속에서 사라져 간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존재와의 관계가 성립되고, 그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송이 꽃은 눈앞에 존재하는 ‘유(有)’이다. 하지만 그 꽃은 스스로 꽃이라는 실체가 없다. 꽃은 빗물, 토양 속의 박테리아, 햇빛, 시간과 같은 무수한 조건들에 의해 새싹이 돋고 꽃으로 피었다. 꽃이 처음부터 꽃으로 완성된 실체라면 빗물, 박테리아, 햇빛, 시간 등이 개입할 수 없다. 만약 그런 것들이 개입되지 않으면 꽃은 존재할 수 없다. 빗물과 햇빛도 자신의 존재를 고집하지 않고 서로 어우러져야 한 송이 꽃을 피울 수 있다. 이처럼 존재는 스스로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이 의존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하며, 개별적 존재의 본질이 텅비어 있기에 ‘공(空)’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개체적 존재의 본성이 텅 비어 있는 것을 ‘자성공(自性空)’이라고 한다. 그 스스로의 성품이 공하다는 뜻이다.
성철 스님은 “모든 색의 자성이 공하지 않으면 연기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개체 존재의 성질은 공이지만 무수한 관계를 통해 성립되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존재의 관계성을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한다. 따라서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개체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함으로 무아이고 공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연기공(緣起空)’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오직 관계 속에서 있을 뿐 그 스스로는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공을 ‘바람’에 비유했다. 바람은 모양도 볼 수 없고 붙잡을 수도 없다. 하지만 바람은 낙엽을 떨어뜨리고, 구름을 모아 비를 내리게 하고, 더위와 추위를 몰고 온다. 공 또한 모양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공이라는 속성으로 인해 모든 사물은 역동적으로 생성하고, 존재하고, 소멸해 간다. 결국 하나의 존재가 연기적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현상적 사물에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선사들은 “비고 비며 고요하고 고요함은 딴 물건이 아니다. 나무들은 푸르고 푸르며 철쭉꽃은 붉다.”라고 노래했다. 붉고 푸른 갖가지 사물을 통해 공이라는 본성이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현상적 존재를 벗어나서 공(空)은 따로 없다. 여기서 색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색이라는 명제가 나온다.
『대공법경』에서는 공이 무가 아니라 관계로 존재하는 연기임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 이 두 변에 마음이 따르지 아니하며 바르게 중도를 향한다.” 여기서 ‘대공(大空)’이란 ‘크게 공한 것’이란 뜻인데 성철 스님은 큰 공이란 ‘중도공(中道空)’이라고 했다. 존재에 내재된 ‘있음〔有〕’과 ‘없음〔無〕’에 치우치지 않고 그 두 속성을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것이 큰 공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공이 곧 연기이고, 중도임을 밝히는 내용은 잡아함 13권에 담긴 『제일의공경』에도 등장한다. 공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뜻하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이란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무아이며, 오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연기설은 공을 설명하는 진술로도 유효하다. 성철 스님은 이런 내용을 근거로 “공의 내용이 곧 연기”라고 파악한다. “연기 밖에 따로 공이 없고 공 밖에 따로 연기가 없으며, 공 이외에 따로 중도가 없고 중도 이외에 따로 연기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공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바라보면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론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작은 먼지조차도 우주적 관계 속에 존재함을 깨닫는 것이 공이다. 공의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장님의 눈이 아니라 작은 먼지를 통해 우주를 보는 대긍정의 안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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