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禪, 禪과 시]
이 한 번의 넘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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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09:41 / 조회2,591회 / 댓글0건본문
동화천을 따라 걸어봅니다. 강바닥에는 사람이 출입하지 않아서 갈대가 무성합니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갈대숲의 색깔이 달라집니다. 참새, 까치, 오리, 백로는 저마다 다른 곡선으로 날아갑니다.
잠시 햇살이 비치자 풍경은 일순 빛이 납니다. 저마다의 색깔은 빛을 받아 살아나고 먼 산 능선은 조용하게 흘러내립니다. 새들이 날아가고 고라니가 숨어서 움직이는 갈대숲 위로 바람이 불고 갑니다. 벌거벗은 대자연 앞에 서면 비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느낌입니다.
갈대숲과 고라니
고양이 한 마리가 갈대숲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사람 소리가 나자 우리를 빤히 쳐다봅니다. 사냥을 나온 걸까요, 자신의 영지를 순찰하러 나온 걸까요. 우리가 어릴 때는 고양이를 ‘살찐이’, ‘고내이’, ‘고냥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고라니 3마리가 갈대숲 사이로 먹이를 찾고 있습니다. 고라니는 노루보다 약간 작아서 보노루라고도 불렀습니다. 몸집이 사슴이나 노루보다 작아서 그렇지 현재 야생 생태계에서는 대형동물입니다. 대체로 갈대숲에서 서식하고 있는데 전 세계 고라니의 90%인 45만~70만 마리가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유해조수로 분류되어 사냥 허가가 나자 매년 16만 마리 이상이 포획됩니다. 로드킬로 죽는 고라니만 하더라도 매년 3만 마리 정도 됩니다.
고라니가 돌아다니자 갈대숲에 활기가 넘칩니다. 아파트촌이 들어서고 외곽 순환도로가 건설되면서 이 풍경이 훼손될까 걱정했는데, 갈대숲과 나무들, 뒷산 스카이라인까지 그대로 살아남아 기쁩니다.
산의 흐름이 끝나는 곳에 연경 도약대라는 유명한 자연 암장이 있습니다.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들의 천국입니다. 암반은 퇴적암인 역암이며 높이는 10~15m, 폭 10~30m, 경사도 85°~100°입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루트가 개척되기 시작해서 현재 50여 개 루트가 있습니다. 시내 어디서든 대략 30분이면 접근 가능해서 인기가 대단합니다. 야간 등반이 가능하도록 조명등이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암벽등반
연경 도약대 암장 입구에 있는 고바위입니다. 오늘 한 사람이 고바위 무명길 암벽에 붙었습니다. 바위가 차가워 올라가기 쉽지 않을 텐데 중앙 크랙까지는 어렵지 않게 올라갑니다. 올라가는 솜씨를 보니 초짜는 아니로군요.
중단부에 가로로 긴 크랙 위에서 좀체 위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크랙 위쪽으로 암질이 달라지는지 각도가 달라지는지 이리저리 손만 뻗어봅니다. 크랙을 딛고 레이백을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포기하고 하강 자일을 걸고 빠르게 하강하는데 하강하는 모습이 매끈하고 맵시가 있습니다.
삶의 질을 높이려면 경험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쾌락은 노력 없이도 느낄 수 있지만, 덧없는 것이어서 자아는 쾌락 경험에 의해서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쾌락과는 달리 즐거움이라는 것은 비범한 주의를 기울여야 느낄 수 있습니다. 즐거움을 가져오는 활동은 바로 즐거움이란 목적 자체를 위해 마련된 활동입니다.
문학, 예술, 스포츠는 인생의 즐거움을 위해 수백, 수천 년에 걸쳐서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암벽등반도 그런 활동 가운데 하나이고, 집중의 정도가 매우 높아서 다른 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고 걱정도 사라집니다. 그 순간에는 자의식이 사라지고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런 경험을 몰입 경험이라고 합니다.(주1)
암벽에 붙을 때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세계에 빠지게 됩니다. 암벽에 붙어보는 건 황금 만 냥에 해당하는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원래 불가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새로운 표현 하나를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 하나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 한 번의 넘어짐!
11세기 후반 송나라 시절, 여산의 동림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못 생기고 문맹이고 동작이 굼떠서 동료 선승들로부터 멸시받던 혜원이라는 승려가 법당 앞마당을 지나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습니다. 마당에서 넘어졌으니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그러나 혜원은 이 한 번의 넘어짐에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문맹이기 때문에 마침 지나가던 한 선객에게 부탁해서 자기가 지은 게송을 벽에 적게 하고 바로 그날 훌쩍 떠났습니다. 동림사에서 소동파에게 무정설법無情說法을 가르쳐 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상총(1025~1091)은 이 게송을 전해 듣고 극찬하였습니다. “선객의 공부가 이와 같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사람을 시켜 혜원을 찾았으나 그가 어디로 갔는지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주2)
혜원이 지은 게송입니다.
이 한 번의 넘어짐, 이 한 번의 넘어짐
만 냥의 황금을 쓴다 해도 괜찮지
머리에는 삿갓, 허리에는 보따리
어깨에 멘 지팡이에는 청풍명월 매달았네(주3)
혜원은 한 번 넘어지면서 바로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요? 무엇을 깨달았기에 그 한 번의 넘어짐에 만 냥의 황금을 쓴다 해도 괜찮다고 했겠습니까? 혜원은 넘어진 순간 자신을 옭아매던 모든 게 거짓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넘어지면 어때! 못 생기고 문맹이고 굼뜨면 어때! 나는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을! 그는 살아 있음의 참맛을 보았던 것입니다. 저항이 사라지고 한없는 자유와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 자유와 행복에 황금 만 냥을 쓴다 해도 전혀 아깝지 않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가 지은 게송은 보석처럼 아름답습니다.
‘이 한 번의 넘어짐, 이 한 번의 넘어짐’이라고 두 번 반복한 기법이나 ‘만 냥 황금을 쓴다 해도 괜찮지’, ‘어깨에 멘 지팡이에는 청풍명월 매달았네’ 같은 구절에서는 깨달은 사람만의 단순하면서도 영적인 터치가 느껴집니다.
만 냥 황금이라는 표현은 임제(?~867)가 처음 사용하였습니다만, 그 뿌리는 『근본설일체유부니다나根本說一切有部尼陁那』에 있는 붓다의 설법에 있습니다.
초기 불교 교단에서는 출가사문은 매일 걸식을 하며 하루의 생활에 필요한 이상의 금전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엄한 계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설일체유부니다나』 제2권에 보면, “진심으로 세속을 떠나 열반을 구하고 청정한 행실을 닦기 위한 것이라면, 여러 필추(비구)들이 입고 있는 옷이 1억 냥의 가치가 있고 거주하는 집과 방이 5백 냥의 가치가 있으며 먹는 음식에 모든 산해진미를 갖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들은 모두 내가 받으라고 허락하노니 너희들은 받아쓰도록 하여라.”라는 붓다의 설법이 적혀 있습니다.
이렇듯 선사들의 말 한마디는 그 뿌리를 경전에 두고 있을 때 종교적 무게가 더해지고 울림은 더욱 깊어집니다. 임제가 말합니다.
함께 도를 닦는 벗들이여!
대장부라면 오늘이야말로 진실한 현재이며 꾸밈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바로 현재가 있을 뿐, 달리 영원과 순간의 구별은 없다.
이것이 진정한 출가이며,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을 쓰는 삶과 같이 가치가 있는 삶이다.(주4)
임제는 매 순간을 음미하며 생생하게 현재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눈부시고 강렬한 것인지 말해 줍니다. 2,000년 전 로마에서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시인 호라티우스(B.C.65~B.C.8)도 비슷한 내용의 시를 남겼습니다.
카르페 디엠
우리의 운명이 무엇인지 묻지 마라, 아는 것은 불경이라네.
생의 마지막이 언제일지 바빌론의 점성술에 묻지 마라,
레우코노에여, 뭐든지 견딘다는 것은 얼마나 좋으냐.
유피테르(로마의 제우스신)가 겨울을 몇 번 더 주든, 혹은 마지막이든
이 순간에도 튀레눔 바다의 파도는 맞은편 해안의 바위를 깎고 있다네.
현명하게 생각하고, 포도주를 걸러라, 인생은 짧으니 욕심을 줄이게.
말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우리를 시기하며 흘러가네.
내일은 믿지 마라, 오늘을 즐겨라.(주5)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한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임제와 호라티우스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이니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순간에 살아야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헤매는 곳은 대개 과거 아니면 미래입니다. 그것을 마음의 방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현재 순간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때 마음의 방황이 멈추며 깊은 평화를 느낍니다. 마음이 현재에 살 때 그 경험은 매우 생생하며 지극한 행복의 느낌입니다.(주6)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호라티우스가 쓴 라틴어 시의 마지막 구절로서 ‘오늘을 즐겨라’, ‘오늘을 붙잡아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존재의 덧없음을 인식하고 때때로 죽음을 응시하거나 죽음의 바다 위를 떠다닐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카르페 디엠 생활방식의 결정적인 요소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든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단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황금 만 냥이라도 내놓지 않겠어요?
산책이든 산행이든 절반은 돌아오는 길입니다. 왜가리나 백로는 거의 꼼짝하지도 않고 물속에 서 있습니다. 댕기 깃이 뚜렷한 왜가리 한 마리가 물결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 위에 서 있습니다. 자연에는 추한 모습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갈대나 시냇물이나 바람이 되어 평범한 것들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각주>
(주1)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Flow』, 한울림, 2004.
(주2) 『續傳燈錄』, 卷第二十 : 慧圓上座開封酸棗干氏子 … 出游廬山至東林 每以己事請問 朋輩見其貌陋擧止乖疎皆戲侮之 一日行殿庭中忽足顚而仆 了然開悟 作偈俾行者書於壁曰 … 卽日離東林 衆傳至照覺 覺大喜曰 衲子參究若此善不可加 令人迹其所往 竟無知者.
(주3) 『續傳燈錄』, 卷第二十 : 這一交這一交 萬兩黃金也合消 頭上笠腰下包 淸風明月杖頭挑.
(주4) 『臨濟錄』, 示衆 : 道流 大丈夫兒 今日方知 本來無事 (…) 直是現今 更無時節 (…) 是眞出家 日消萬兩黃金.
(주5) Quintus Horatius Flaccus, 『The Odes』Ⅰ권.
(주6) 로버트 라이트, 『불교는 왜 진실인가』 , 마음친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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