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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남종선 전래와 나말여초 구산선문의 형성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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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09:36  /   조회1,72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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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선 이야기 3 |

 

신라 하대 821년(헌덕왕 13)에 마조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명적도의明寂道義가 귀국한다. 도의는 784년(선덕왕 5)에 당나라에 들어가 무려 37년 만에 귀국하였는데, 그는 『경덕전등록』과 『조당집』에 수록된 서당으로부터 법을 받은 4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도의에 의하여 마조계의 남종선이 전래 된 이후 한국불교의 지형은 교종 중심에서 선종과 교종이 경쟁하는 구도로 바뀌었으며, 이후 고려 태조의 집권기(918~943년)까지 소위 ‘구산선문’이 형성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피동적으로 남종선이 전래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남종선을 수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말여초 구산선문의 형성

 

포광 김영수는 1937년 『진단학보』 8집에 「오교양종에 대對하야」를 발표하였고, 이듬해 『진단학보』 9집에 「조계선종에 취就하야」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김영수의 일련의 논문을 통하여 ‘오교구산’, ‘오교양종’, ‘선종구산’ 등의 용어가 신라말에서 고려시대까지 선종을 이해하는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였다.

 

종파를 통하여 한국불교사를 이해하고자 한 김영수는 “교종의 종파로 ‘열반·법성·계율·화엄·법상’의 오교가 있고, 선종의 종파로 구산선문이 있어 서로 대립하여 오교구산이라 하였다. 이후 고려 숙종 대에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천태종이 선종의 일파로 개창됨으로써 이전의 구산선문은 조계종(선적종)으로 통합되고 오교양종으로 변모되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오교구산(오교일종)’, ‘오교양종’을 통하여 고려불교를 이해한 김영수의 주장에 대해 1970년대 이후 불교학계에서 이론異論의 목소리가 있긴 하지만, 한국불교에 대해 종파를 통하여 바라볼 수 있는 학문적 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그 가치가 인정된다.

 

‘구산선문’·‘구산문’·‘구산’ 등의 용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선종의 산문이 개별적으로 형성된 이후 어느 시기 이를 ‘구산(선)문’으로 통칭하여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는 구산선문이 모두 형성된 광종 대 이후로 보인다. ‘구산문九山門’이란 명칭이 최초로 보이는 사료로는 『고려사』 「세가」 권10 ‘선종 갑자 원년(1084) 정월 을사조’이다. 여기에는 “보제사 승려 정쌍貞雙 등이 왕에게 구산문의 참학승도參學僧徒들도 진사과의 예에 따라 3년에 한 번씩 선시選試를 치를 수 있도록 청하여 허락받았다.”(주1)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달마구산문達磨九山門’ 혹은 ‘구산선려九山禪侶’ 그리고 ‘구산선九山選’이란 용어도 보인다. 이러한 용례를 통해 ‘구산선문’이 광종 이후 불교 교단의 정비와 승과시험 등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산선문과 그 개산조

 

그렇다면 ‘구선선문’ 즉 아홉 개의 산문은 무엇이고, 그 개산조開山祖와 법맥 계승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쉽지 않다. 우선 나말여초 존재하였던 산문이 구산선문 이외에도 진감혜소의 쌍계산문, 순지의 오관산문 등 4~6개의 산문이 존재하고 있고, 산문의 개조開祖와 실제 개산조開山祖(주2)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신라의 스승으로부터 법을 받은 제자가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을 받아 온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나말여초의 선을 구산선문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학자들마다 이견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진 1. 『선문조사예참의문』(1338). 사진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나말여초 선문이 아홉 개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한 이후 기존의 선종은 구산선문으로 정리되었다는 점에는 학자들의 견해가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예를 들어 허흥식은 10세기 말 모두 14개의 산문이 존재했으나 천태종 개창 당시 5개의 산문이 천태종으로 전향하여 9개의 산문이 남았다고 주장하며, 최연식은 11세기경 구산문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여러 산문이 9개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산선문의 이름과 개조에 대하여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은 『선문조사예참의문禪門祖師禮懺儀文』이다. 이는 선문의 조사들에 대한 예참 의례에 사용하는 의식문으로써 여기에는 예참의 대상으로 석가모니 이래 혜능까지 33조사와 구산선문의 개산조 그리고 보조국사 지눌이 포함되어 있다. 현존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338년(고려 충숙왕 복위 7)에 재차 간행한 범어사 소장본이라고 강호선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13∼14세기 수선사계에서 만들어 유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에는 사굴산조사 범일국사, 가지산조사 도의국사, 성주산조사 무염국사, 사자산조사 철감국사, 희양산조사 도헌국사, 봉림산조사 현욱국사, 수미산조사 이엄존자, 동리산조사 혜철국사, 실상산조사 홍척국사 등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김영수가 제시한 ‘구산선문설’ 또한 조선시대까지 여러 판본이 존재하고 있는 『선문조사예참의문』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만에 달하는 구산선문 수행자들

 

나말여초 구산선문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함에 앞서 그 외연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 그 시기는 도의가 입국한 821년부터 고려 태조 왕건의 재위 시기인 943년까지이고, 그 대상은 이 시기의 구산선문과 기타 산문을 포함한다.

 

이 시기 구산선문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여기에서 선을 닦았던 승려들의 수라 할 수 있다. 여러 비문을 참고해 보면 성주산문의 경우 무염의 문도 2,000명, 현휘의 문도 수백 명, 가지산문의 경우 체징의 문도가 800명, 동리산문의 경우 혜철의 문도 수백 명, 사굴산문의 경우 행적의 문도 500여 명, 개청의 문도 수백 명, 사자산문의 경우 절중의 문도 1,000여 명이었다. 이를 통해 보면 120여 년의 동안 대략 만 명 내외의 선 수행자들이 존재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사진 2. 『선문조사예참의문』(부인사, 1660). 사진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이같이 엄청난 수의 선승이 존재하였고, 또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쉽게도 이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이에 대한 기본자료는 고운 최치원(857~908)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을 비롯한 약간의 금석문 그리고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와 고려말 천책의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및 『선문조사예참의문』 등이 있으며, 이외에 『조당집』, 『경덕전등록』 등에 수록된 단편적인 내용이 전부이다. 천책의 『선문보장록』에 수록된 출전에는 『무염국사행장』, 『해동칠대록』, 『해동무염국사무설토론』 등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저서들 또한 안타깝게도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구산선문의 안내자 최치원

 

구산선문과 나말여초 선사상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최치원이다. 

그 이유는 구산선문에 관한 가장 중요한 1차 자료가 최치원의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이며, 다음이 그의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최치원의 안내가 없이 구산선문의 실체에 접근하는 길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최치원이 처음으로 왕명을 받아 비문을 짓기에 착수한 것은 885년(헌강왕 11)에 시작한 「지증대사비」였지만, 제일 먼저 마친 것은 887년(정강왕 2)에 완성한 「진감선사비」였다. 「낭혜화상비」는 890년(진성여왕 4)에 왕명을 받아 897년 경(?)에 완성하였으며, 「지증대사비」는 893년(진성왕 7)이 되어서야 완성했다. 「지증대사비」와 「낭혜화상비」의 저술 기간이 7~8년에 이르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최치원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의 「낭혜화상비」에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내용이 실려 있다.

 

사진 3. 고운 최치원의 초상. 사진 위키백과.

 

“다시 생각해 보건대, 중국에 들어가 배운 것은 대사나 나나 다 같은데 스승이 된 이는 어떠한 사람이고 그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어찌 심학자心學者는 높다 하고 구학자口學者는 수고로움을 당해야 하는가. 그래서 옛날의 군자들이 배우는 바를 신중히 하였던 것인가. 그러나 심학자는 덕을 세우고 구학자는 말을 남기는 것이므로 그 덕도 말에 의지하고서야 전해질 수 있으며, 이 말은 또한 덕에 의지하여야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전해질 수 있어야 마음을 멀리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없어지지 않아야 말도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때에 하는 것이니, 어찌 다시 감히 실속 없는 글이라고 굳이 사양하기만 하겠는가!”(주3)

 

낭혜무염과 최치원 모두 당대 최고의 천재로 당에 들어가 이름을 크게 떨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선사인 무염국사는 왕의 스승이 되어 추앙받고, 유학자인 최치원은 왕의 신하가 되어 왕명으로 무염의 비문을 짓고 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어찌 심학자는 높다 하고 구학자는 수고로움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말에는 아니꼬운 최치원의 심사가 엿보인다. 그럼에도 최치원은 “덕은 말에 의지해야 전해질 수 있고, 말은 덕에 의지해야 보존될 수 있다.”는 말로써 선사와 유학자가 담당해야 할 역할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지증대사적조탑비」에 나타난 신라말 선문의 지형

 

최치원이 당시 신라말 산문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는 「지증대사비」의 다음의 글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장경長慶(821~824) 초에 도의道義라는 승려가 서쪽으로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서당西堂의 깊은 법력을 보고 지혜의 광명을 지장智藏에게 배워 돌아왔으니, 현계玄契를 처음 말한 사람이다. … 혹 중국에서 득도하고 돌아오지 않거나 혹 득도하고 돌아왔는데, 큰스님이 된 분을 손가락으로 꼽을 만하였다. 

 

서화西化로는 정중사靜衆寺 무상無相, 상산사 常山寺의 혜각慧覺, 익주益州 김화상金和尙, 진주鎭州 김스님 등이요, 신라에 돌아온 이로는 앞에 서술한 북산北山의 도의와 남악의 홍척洪陟, 그리고 시대를 조금 내려와서는 대안사大安寺의 철徹 국사(혜철), 지력사智力寺의 문聞스님, 쌍계사雙溪寺의 소炤(혜소), 신흥사의 언彦(충언), 용암사湧巖寺의 체體(각체), 진구사珍丘寺의 휴休(현욱각휴), 쌍봉사雙峰寺의 운雲(각운), 고산사孤山寺의 일日(범일), 양조 국사였던 성주사의 염染(무염) 등인데, 선종인禪宗人으로 덕이 두터워 중생들의 아버지가 되고, 또한 도가 높아 왕의 스승이 되었으니 예로부터 이른바 ‘이름을 감추려 해도 이름이 나를 따라오고, 명성을 피하지만 명성이 나를 따라온다.’라는 것이었다.”(주4)

 

사진 4.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사진 국가문화유산포털.

 

위의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최치원은 ‘남척북의南陟北義’ 즉 서당지장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온 도의와 홍척이 설악산(북산)과 지리산(남산)에 자리를 잡고서 산문이 시작되었으며, 이어 대안사의 혜철, 지력사의 문, 쌍계사의 혜소, 신흥사의 충언, 용암사의 각체, 진구사의 각휴, 쌍봉사의 각운, 고산사(굴산사)의 범일, 성주사의 무염 등이 산문을 열어 크게 선을 떨쳤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내용 가운데 지력사의 문, (쌍계사의 혜소), 신흥사의 충언, 용암사의 각체, 진구사의 각휴 등은 앞서 언급한 구산선문에 속하지 않은 사찰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최치원의 글은 신라말 산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객관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는 동시에 구산선문을 통해 나말여초의 선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게 한다.

 

<각주> 

(주1) 『高麗史』, 「世家」 卷十, 宣宗甲子元年 正月 乙巳條. “普濟寺僧貞雙等秦 九山門參學僧徒 請依進士例三年一試 從之.”

(주2) ‘개조’와 ‘개산조’란 말은 불교학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가지산문의 경우 ‘도의’가 서당지장의 법을 받아 왔지만, 실제 가지산문을 개산한 것은 보조체징이다. 이에 대해 ‘개산조’와 ‘개창조’로 나누어 부르는 학자도 있는데, 필자는 도의는 가지산문의 ‘개조’라 하고, 체징은 ‘개산조’라 명명하여 이를 구분하고자 한다. 

(주3) 崔致遠撰, 『大朗慧和尙白月葆光之塔碑銘』. “復惟之 西學也彼此俱爲之而爲 爲役者何人. 豈心學者高 口學者勞耶. 故古之君子 愼所學. 抑心學臼 善則善矣. 然苟不能是 惡用黃金爲 爾勉之. 遽出書一師者何人心者立德 口學者立言. 則彼德也或憑言而可稱 是言也或倚德而不朽. 可稱則心能遠示乎來者 不朽則口亦無慙乎昔人. 爲可爲於可爲之時 復焉敢膠讓乎.”

(주4) 崔致遠撰, 『曦陽山鳳巖寺敎諡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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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룡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전북대 철학과 학부, 석사 졸업, 원광대 박사 졸업. 중국 북경대, 절강대, 연변대 방문학자. 한국선학회장과 보조사상연구원장 역임. 『보조지눌의 사상과 영향』, 『언어, 진실을 전달하는가 왜곡하는가』(공저)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brkim1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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