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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다시 돈황 석굴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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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5 년 3 월 [통권 제2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72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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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돈황 석굴을 참배한 것은 2013년 7월 초순경이었습니다.  

 

기차로 우루무치를 지나 투루판을 끝없이 달려 마침내 새벽녁 유원역에 내린 다음, 다시 버스로 희뿌연 모래먼지 속을 뚫고 달려 돈황에 도착하였습니다.  

 

주차장에서 1Km는 족히 될 듯한 길을 힘겹게 걸어 입장권을 사고 입장 검열을 하는데 사진기 및 휴대폰은 무조건 반입금지여서 할 수 없이 수거통에 담아놓고 맨몸으로 굴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우리 일행이 한국에서 온 것을 안 중국 가이드는 반색을하며 “한국의 단국대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금은 임시로 돈황유적 문화해설사를 하고 있다.”며 반갑게 인사을 했습니다. 그 덕으로 좋은 굴 두어 개를 더 안내 받는 호사까지 누리게 되었는데 그때는 마침 9호 입구가 수리 중이어서 북대불을 보지 못하고, 그 옆의 서대불을 대신 참배하게 되었습니다.

 

 

돈황 막고굴 풍경. 2월초여서인지 참배객들이 많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돈황 막고굴을 참배하는 그 감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막고굴은 353년에 개착되어 북조를 거쳐 수, 당대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492개굴의 벽화를 모두 한 벽면으로 모으면 5m 높이로 장장 25km 길이의 대벽화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10평 미만의 굴들이 주류를 이루고, 웬만한 크기의 굴천장에는 닷집 지붕형으로 천불을 채색으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모래산에 돌이 없어 소조상으로 부처님을 모시고 채색을 입히니 도형이 극도로 발달되어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격을 겨우 추스르고 명사산으로 자리를 옮겨 그리도 보고 싶었던 월아천을 찾아 나섰습니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날아온 모래들이 모여서 만든 모래산이라고 하는데 그 생성에 대해 지질학적 지식이 없으니 왜 모래산일까 하는 의문은 설명을 들어도 제대로 풀 수가 없었습니다.  

 

낙타 대신 전기차를 타고 월아천으로 향했습니다. 정말 꿈에 그리던 월아천을 모래등성이에서 내려다보는 그 순간 얼마나 환희로웠는지 모릅니다.

 


병령사 석굴을 둘러보는 필자 

 

초승달을 닮은 월아천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져 잠시 황홀감에 젖었습니다. 월아천을 휘돌아 도관을 지난 다음 다시 출발점으로 한 시간 가량 지나 돌아왔습니다. 그때의 막고굴의 불보살님들과 천불의 그림들, 명사산의 모래와 월아천 물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안고 다음날 다시 막고굴에 가서 어제의 가이드를 찾아서 12개의 굴을 더 돌아본 다음 북경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 온 즐거운 기억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난 2월 2일, 천수의 맥적산 석굴, 난주의 병령사 석굴, 돈황의 막고굴 참배를 위해서 중국 서안(西安)으로 출발했습니다.  

 

서안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마친 후 간단한 점심을 먹었습니다. 서안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천수로 달리는 일정이었는데, 마침 그 길목에 서안에서 300리 떨어진 곳에부처님의 진신 손가락 사리가 봉안된 법문사를 지나게 되어 참배하기로 일정을 변경하였습니다.  

 

5년 전인가 법문사를 참배했을 때와 달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주위 풍경이 너무나 달라져 있었습니다. 몇 천 평이 넘는 지역을 새롭게 개발하여 들어가는 입구가 마치 로마 개선장군이 기세등등하게 위세를 떨치며 마차를 타고 황제 앞으로 다가가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법문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담장에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당나라 때 황제들이 30년에 한 번씩 법문사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 손가락 사리[佛指舍利]를 장안으로 모셔가서 법회를 올리는 장면들로, 그 시대의 불지사리 친견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길을 지나 원래의 법문사에 도착하니 옛날 법문사의 감격이 줄어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지하궁전에 내려가 사면에 모셔져 있는 모형 불지사리에 삼배를 올리면서 많은 기원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참배시간을 가지고 출발하여 천수(天水)의 호텔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일찍 아침을 먹고 ‘보리단을 쌓아놓은 듯한 산’이라는 의미의 맥적산 석굴로 향하는데 20여 년 전에 와 보았던 그때를 상상하며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맥적산에 도착할 즈음에 눈발이 날리더니 입구에서 차량을 통제하여 지역의 작은 6인승의 소형차를 타고 맥적산 석굴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20여 년 전에 와 보았던 그 광경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의 입구와는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다행히 시기적으로 춘절 설을 앞둔 계절이라 참배객들이 드물어서 오히려 석굴들을 오래 감상하는 데는 더없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겨울철이라 관리하는 인원도 적어서 “사진을 찍지 말라.”고 당부는 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으니 동행한 참배객들은 요령껏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두세 시간 동안 설명도 천천히 들으면서 구석구석을 참배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4시간 넘게 삭막한 벌판을 달려 난주에 도착한 뒤 짐을 풀었습니다. 모두들 맥적산 석굴에서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이구동성으로 합창하였습니다. 맥적산 석굴 지역에는 모두 194개의 석굴이 있고 약 7천여 구의 불상들이 모셔져 있어 불교예술의 큰 보물창고라 할 수 있습니다. 후진(384~417) 시대에 개착되고, 동서위 때 완성되어 약 700여 년 동안 주위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난주 시내를 출발하여 50여 km 떨어진 황하 상류를 가로막은 유가협 댐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마침 눈이 내려 고갯길이 얼어붙어 있고, 또 눈까지 내려 차가 어찌나 드리게 달리던지 내심 이는 조급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한 시간이나 더 늦게 유가협 댐에 도착한 후 병령사 석굴을 향해 쾌속정을 타게 되었습니다. 넓고 넓은 호수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한 시간 남짓 달리니 주변의 돌산들이 기품을 자랑하며 병풍처럼 이어져 있는데 무언가 큰 선경이 있을 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에 압도되었습니다. 주변의 경관에 감탄하면서 병령사 석굴 입구에 들어서니 저 멀리 약사대불 형태의 부처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석굴참배 도로는 생각보다 잘 다듬어져 있는데 조각된 불상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부서지고 퇴화한 조각상들이 여느 석굴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이렇게 고생하고 머나먼 길을 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적잖은 실망이었습니다. 게다가 169굴을 보는 데 한 사람당 300위안(한화 약 5만4천원)의 특별 참배료를 내라고 것입니다. 발이 아프다 보니 높은 곳을 불안한 사다리를 타고 오를 자신이 없어 포기하고 나중에 일행이 찍어온 사진들로 대신 감상을 해야 했습니다.  

 


맥적산 석굴 

 

병령사는 오호십육국시대인 서진(420년경) 때 개착되기 시작하여 청대에 이르기까지 1500여 년 동안 183개의 석굴과 776구의 불상들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병령사’는 티벳어인 ‘선파병령(仙巴炳靈) 십만불(十萬佛)’ 즉 ‘천불만불(千佛萬佛)’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돌아와 감숙성 박물관을 견학하고 저녁 6시 돈황 출발 급행열차의 침대칸에 몸을 실었습니다.  

 

2013년 7월에는 투루판을 지나 유원역에서 돈황으로 왔지만, 이번에는 난주에서 돈황역으로 가는 노선이 새로 생겨 밤새 1200km를 달려 도착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때는 1차선 포장길이었다면 2년 만에 다시 찾은 지금은 돈황역에서 막고굴까지 4차선으로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찾은 돈황은 그렇게 변해 있었고 새로 만난 석굴은 그때보다 채색이 더없이 화려하고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또한 돈황도 겨울철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엄하게 사진기나 휴대폰을 수거하지 않고 자유롭게 가지고 다닐 수 있어 일행들이 요령껏 굴속에서 셔터를 눌러 귀한 자료를 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월 6일, 한국으로 돌아와 문명대 교수님의 『실크로드 학술기행집』을 펼쳐들고 비교해 보니 그때는 월아천에 지금과 같은 건물이 지어지지 않고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그 후 20세기가 지나면서 폐사지를 지금처럼 아름답게 복원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도 불교성지순례는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하는 것을 거의 느낄 수 없는데 중국의 환경변화 속도는 그야말로 초고속임을 눈앞에서 느끼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의 3대 석굴을 참배하면서 석굴형태로 조성한 성철 스님 기념관의 성공적 개관을 다시 한 번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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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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