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을미년 새해에, 엄마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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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5 년 3 월 [통권 제2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677회 / 댓글0건본문
#장면1
설 며칠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드디어. 마침내. 다행히.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천히, 조용히, 재가 사그라지듯이 가셨다. 도를 닦지 않고도 죽는 순간이 저렇다면 지금까지 죽음을 괜히 무서워했나 싶다.
일 당하고 처음 느낀 건 깊은 안도감이다. 아버지 가셨을 때도 똑같이 한 짐 덜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젠 엄마만 보내면 된다는 불손한 생각을 했었다. 고아가 되기를 바란 지 9년이 지나 정말로 가셨다. 화장을 한 뒤 가루가 된 몸을 품에 받고 보니, 이렇게 사대로 흩어질 사람에게 생전에 무슨 미움을 그리 쏟아부었나 싶다. 엄마 미워하는 데다 청춘을 불살랐으니 말이다.
#기억1
엄마는 하기 싫은 건 안 하는 사람이다. 환갑이 지나고 가족들 앞에서 선언을 하셨다. 여자는 정년퇴직도 없냐, 내가 왜 살림을 도맡아야 하느냐, 남자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니들도 다 컸으니까 이제부터는 각자 알아서 살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도 오빠도 나도 알아서 살았다. 엄마가 국 한 솥을 끓여놓으면 그걸 매우 감사하게 얻어먹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는 국에 간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이 씨네 제사를 왜 송씨가 준비해야 하느냐면서 몸에다 이불을 둘둘 말고 건넌방으로 가서 일찍 주무셨다. 덕분에 명절 때는 엄마 대신 시집도 안 간 내가 며느리증후군을 앓았다. 옆집 아줌마였으면 ‘저 아줌마 멋있다’고 할 뻔했는데 이 분이 내 엄마인 건 일종의 재앙이다. 엄마를 당할 순 없지만, 하기 싫은 일을 참고 하는 소질이 부족한 걸 보면 내가 엄마 딸이 맞긴하다.
#기억2
몇 년 전에 엄마가 잠깐 기절했다 깨어난 적이 있다. 당신도 놀랐는지 정신 있을 때 유언을 해야겠단다. 긴장을 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동안 잘 살았다. 고맙다.”하셨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말씀이 없다. 침묵을 깨고 물었다. “어, 그래서?” “뭘? 이게 끝이야.” “무슨 유언이 그래?” “그래? 그럼 너도 잘 살어~” 그때는 별 싱거운 유언도 다 있다 싶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어록에 넣을 만하다.
#기억3
엄마와 하남 정심사에 간 일이 있다. 정심사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내가 <선림고경총서> 일을 맡은 뒤였으니까 아마 1988년이었던 것 같다. 평소에 엄마와 쇼핑이나 목욕탕이나 미장원에도 같이 가본 적이 없던 터라 절에 동행했던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수박 한 통을 올려놓고 부처님 앞에 곱게 절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저렇게 콧대 높은 양반을 누가 또 납작 엎드리게 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역시 대단한 분이다.
절에서 나오는 길에 엄마가 원영 스님이 맘에 든다고 하면서, 저 사람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감히 스님을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원영 스님, 하마터면 팔자 고칠 뻔했다. 이번 장례식 때 오래된 기억을 꺼내서 전해주었더니 스님이 뒤집어지셨다. 그리고 울엄마 사위가 될 뻔 했던 원영 스님께서 49재를 맡아주셨다. 아버지 가셨을 때는 스승께서 제사를 맡아주셨는데 이번에는 연로하신 분께 민폐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어쩔까 하고 있는데 원영 스님께서 정심사에서 하자고 딱 결정을 해주셔서 번뇌를 덜었다.
#기억4
아버지 49재가 생각난다. 아버지 가시기 직전에 엄마가 뇌경색을 맞아서 정신이 없었다. 슬픔이고 뭐고 돈 걱정이 가장 컸다. 장례식장에 오신 스승께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묻기에 49재를 못 지낼 것 같다고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당신께서 집에 와서 초재를 지내주셨다. “머리 깎고 출장 푸닥거리는 처음이야” 하시면서. 그 뒤 다섯 번은 그대로 따라하고 매일 아미타경을 읽어드리라 하여 그렇게 했다. 평소에 무시하던 절차와 형식이 통증완화에 그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49일째 되는 날만 봉선사에 오라고 하셨다. 얼마를 가져가야 하느냐고 또 돈 얘기를 물었다. “네 형편에 맞게 하되, 조금 힘에 부친다 싶을 만큼 내라”고 하셨다. 좀 애매하다 싶었지만 시키는 대로 하고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너무 힘에 부치게 냈으면 아버지는 죽어서도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하는 원망이 들었을 것 같다. 섭섭하게 했으면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을 것 같다. 현명한 스승을 둔 덕분에 그 뒤로 다른 일을 할 때도 ‘조금 힘에 부치게’가 기준이 되었다.
#장면2
설날에 정심사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법당 가득 모여서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차례가 오자 영단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기원을 했다. 지옥에 빠진 엄마를 구해올 목련존자의 신통이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착하게 살아서 윤회의 수레바퀴에 빵꾸라도 내 드리고져….
집에 오니 맘껏 어질러진 방 꼴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신심을 내서 방바닥을 닦는다. 무릎 꿇고 엎드린 자세로 걸레를 밀자니 불편하여 철퍼덕 앉아 본다. 엄마가 앉은 채 엉덩이를 옮겨가면서 걸레질을 하던 이유를 몸으로 알 나이가 된 것이다. 걸레질 하던 중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 멈추었다가, 엄마 가신 일이 ‘원통해 못 살겠네’도 아니고, 하면서 계속 흥얼거렸다. 이러고도 동네 효녀로 소문났으니 내 연기력은 가히 대종상감이다.
장례식장에서도 입관할 때 말고는 거의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내내 웃었던 것 같다. 보다 못한 친구가 표정관리 좀 하라고 찔러주었다. 후배가 문자를 보내 주의를 주었다. ‘엄니 가셨다고 너무 조아하기 없기^^’ 그러나 본심이 삐져나오는 데야 낸들 어쩌랴.
방을 다 닦고 앉아 있으니 참 조용하다. 소원대로 고아가 되었고 고아가 되자마자 독거노인이다. 이제 엄마를 보러 요양병원에 갈 일도 없다. 하루 일과 중에 한 부분이 빈다. 허전하다. 무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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