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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사념처 수행과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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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5 년 3 월 [통권 제2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05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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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수행과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이 유행하면서 남방불교에서 전승되어 온 사념처 수행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사념처 수행에 대한 이론적 배경은 『대념처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이 경에서 제시하는 수행의 기본은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을 면밀히 통찰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4가지 육체현상, 9가지 감각현상, 16가지 심리현상, 5가지 법에 대한 통찰로 구성되어 있다. 수행의 내용적 측면에서 보면 사념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신념처는 몸(身)을 세심히 관찰하여 우리 몸이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아는 관심부정(觀身不淨)이다. 둘째 수념처는 감각(受)을 관찰하여 느낌으로부터 온갖 고통이 수반됨을 아는 관수시고(觀受是苦)이다. 셋째 심념처는 마음(心)의 현상을 잘 관찰하여 마음의 무상을 깨닫는 관심무상(觀心無常)이다. 넷째 법념처는 법(法)을 바로 관찰하여 제법이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임을 체득하는 관법무아(觀法無我)이다.

 


위빠사나 정진 중인 남방의 스님들 

 

마하시 사야도는 사념처 중에서 위빠사나 수행자들에게 기본이 되는 것은 몸에 대한 관찰이라고 했다. 육신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애지중지하며 집착해 왔던 자신의 몸에 대한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몸에 대한 관찰은 크게 살아 있는 육신과 죽은 시신에 대한 관찰로 나눠진다. 살아 있는 육신에 대한 관찰은 몸의 움직임에서 각종 기관들이 불결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묘지에 버려진 시신에서 구더기가 끓고 마침내 백골로 변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이 신념처의 내용들이다.

 

결국 사념처 수행의 기본은 육신의 부정함과 감각의 고통, 그리고 마음의 무상을 깨닫는데 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대념처경』은 “마음과 물질의 세계에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는 초연함”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 중생은 자신의 몸이 곧 자아라고 보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집착하는 것도 바로 자신의 몸이다. 하지만 사념처 수행을 하게 되면 자연히 몸에 대한 집착이 해소된다. 그래서 『대념처경』에서는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며, 괴로움과 고통을 소멸시키게 하고, 진리의 길을 얻게 하며, 열반을 직접 체득하게 하는 길”이 사념처 수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념처에 대한 중도적 이해

 

그러나 이 경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이 자신의 몸과 감각을 부정적으로만 관찰하면 육신에 대한 혐오와 염세적 자아관이 생겨날 수도 있다. 육신이 가진 부정적 측면을 극단적으로 추구해 들어가다 보면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질 수도 있다. 온통 더러운 오물로 가득 찬 육신을 먹여살려야할 이유도 없다. 아무리 애착해도 결국에는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가 들끓고 마침내 백골이 될 것을 구태여 지탱해서 무엇 하겠는가!

 

이처럼 육신에 대한 부정적 내용만을 관찰하면 극단으로 흐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정관을 하다가 염세적 사유가 깊어져 자살을 시도한 비구에 관한 내용이 있다. 따라서 사념처 수행이 몸에 대한 혐오스러운 사실을 관찰하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중도를 핵심으로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

 

무상, 무아, 고를 깨닫고 자아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해소했다면 다시 긍정적 자아관을 확립하는 것이 중도의 길이다. 사념처 수행을 통해 부정성에 대한 자각은 어디까지나 육신에 대한 집착을 해소하고, 집착에서 발생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기 위함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사념처를 부정적 관점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 해석으로 확장해야 함을 강조한다.

 

『대념처경』에 따르면 사념처 수행의 핵심은 신수심법 네 가지를 ‘바르게 알고[正知]’, ‘바르게 생각하는 것[正念]’이라고 했다. 성철 스님도 바로 이 대목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란 “몸(身)은 청정한 것이 아니며, 감각(受)는 즐겁지 못한 괴로움이고, 마음(心)은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이며, 법(法)은 자성이 없는 무아(無我)”임을 관찰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성철 스님은 ‘바르다[正]는 것은 양변을 떠난 중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사념처 수행을 통해 우리의 몸과 감각을 부정적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정견으로 몸을 보는 것이 몸을 바로 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중생의 몸이라고 해서 부처님의 몸과 다르지 않음은 분명하다. 부처님도 중생과 똑같은 몸으로 수행하여 거룩한 부처님의 몸을 이루었다. 몸 자체의 더러움이 문제가 아니라 육신의 욕망을 어떻게 조복하는가가 관건일 따름이다. 이 몸이 지탱되는 것 자체는 신비로운 조화와 연기적 관계의 산물이다. 따라서 『대념처경』에서 말하는 육신의 더러움과 감각의 고통은 집착을 끊고 해탈을 얻는 범위에서 닦아야할 것이지 부정성만을 절대화해서 자아에 대한 혐오적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 수행의 목적은 아니다.

 

육신을 더러운 것으로만 보는 것은 또 다른 변견이다. 그와 같은 변견의 눈으로 육신을 보면 진짜 육신의 모습인 ‘정색(正色)’을 바로 볼 수 없다. 오로지 부정적인 측면만을 관찰하고 그것에 매몰되는 것은 중도정견이 아니라 변견이다. 정견으로 보면 ‘내 몸 그대로가 실상(實相)’이며, ‘중생의 몸 그대로가 제불의 법신’이라는 것이 성철 스님의 견해이다. 따라서 성철 스님은 부정적 시각으로만 몸을 바라보는 것은 제불의 법신과 동등한 중생의 몸을 생멸의 몸으로 잘못 이해하는 망견이자 착각이라고 했다.

 

중생의 색신이 곧 법신

 

성철 스님은 육신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성문이나 연각의 관점이라고 보았다. 그와 같은 관점은 중도정견이 아니라 색안경을 끼고 몸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이다. 사념처 관법을 통해 육신의 부정을 깨닫고 집착을 해소하는 것은 철저히 부정해 가는 ‘쌍차(雙遮)’에 해당한다. 집착이 고통과 속박의 뿌리이므로 철저하게 부정할수록 해탈의 자유는 크다.

 

하지만 쌍차를 통한 부정에는 긍정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철저한 부정의 관점, 쌍차를 통해 자신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해소했다면 이번에는 쌍조(雙照)로써 긍정하는 길로 가야 한다. 깨달음을 얻어 거룩한 존재가 될 자아에 대한 절대적 긍정으로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 쌍조이다. 여기서 몸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더러움과 깨끗함을 넘어서는 불구부정(不垢不淨)의 중도적 시각으로 이해된다.

 

신수심법에 대한 관찰을 통해 육신에 대한 집착을 해소했다면 더 이상 자아를 부정적으로 불 이유가 없다. 육신을 부정하는 것은 집착을 해소하기 위함이지 육신 자체를 더럽게 보거나 부정하기 위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저한 부정을 통해 다시 대긍정의 자아로 돌아오는 것이 중도의 길이다. 긍정으로 돌아와 참된 자아를 깨닫고 법신의 몸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도의 눈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사념처를 통해 자아에 대한 부정과 염세적 가치관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긍정의 메시지를 읽어낸다.

 

여기 엄청난 값이 나가는 황금 덩어리가 하나 있다고 하자. 만약 황금을 알아보는 눈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누런 인분덩어리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황금을 똥덩이로 착각할지라도 황금의 가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중도의 눈으로 보면 중생의 몸이라고 해서 더러운 오물로 가득하고, 죽어서 구더기가 들끓는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다. 중생의 몸 이대로가 진여의 몸이고 법신의 몸이기 때문이다.

 

사념처 수행에 따라 육신의 더러움을 보고 집착을 해소하는 것은 정견이다. 하지만 불구부정이라는 중도의 이치를 보지 못하고 육신을 더럽고 무상한 것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또 다른 극단이자 망견이다. 따라서 성철 스님은 생멸의 견해로 육신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직 중도의 눈으로 사념처를 보고 바르게 닦아야만 그것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도정견으로 보면 중생의 몸그대로가 ‘제법의 실상’이고 ‘여래의 법신’이다.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 중생들이 가진 몸 밖에 따로 법신도 없고 불신(佛身)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똑같은 사념처 수행이라고 해도 생멸의 관점에서 보는가 아니면 중도의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는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들지만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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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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