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번뇌는 내 안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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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5 년 5 월 [통권 제2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64회 / 댓글0건본문
번뇌는 내 속에 있는가?
우리는 종종 “내 속에 욕망이 가득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무심코 던지는 말이지만 이 말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번뇌가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인식은 ‘인간은 번뇌 덩어리’라거나, ‘인간의 본성은 욕망하는 존재’라는 식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과연 욕망이나 번뇌는 내 속에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욕망은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언제부터 내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초기불전에 설해진 12처설에 이미 설명되어 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의식(意識)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이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六境]을 만나서 형성되는 것이다. 즉 눈, 귀, 코, 혀, 몸, 분별의식[意]이라는 감각기관이 빛, 소리, 향기, 맛, 촉감, 비물질적 대상[法]을 만나서 마음의 작용이 생겨난 것이다. 예를 들어 붉은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이 본래 붉은 장미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붉은 장미를 좋아해!’라는 인식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붉은 장미라는 대상을 만나서 생긴 ‘눈의 인식[眼識]’이다. 만약 눈이 없다면 ‘붉은 장미가 좋다’는 마음도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설사 눈이 있어도 눈의 대상이 되는 ‘객관의 사물[境界]’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욕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사람은 오늘날 사람들이 욕망하는 샤넬이나 루이뷔통 같은 명품을 욕망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 때 사람들도 눈이 있고, 사치품에 대한 욕망은 존재했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욕망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루이뷔통 백을 좋아해!”라는 것은 자기 마음속에 그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본래부터 내재해서가 아니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주체적 원인(因)이 되고, 밖으로 감각의 대상이 보조적 조건[緣]이 되어 만들어진 관계적 인식이 마음이다.
이렇게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을 모두 합치면 12가지 범주가 되는데 이를 ‘십이처(十二處)’라고 부른다. 그리고 감각기관이 감각의 대상을 만날 때 우리가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여섯 가지 인식이 성립되는데 이를 ‘육식(六識)’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마음은 인연 따라 생겨난 작용일 뿐 어떤 실체로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욕망과 번뇌도 본래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이 객관대상을 만나는 관계를 통해 성립된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자기 정체성의 근거라고 믿는 마음도 실체가 없기에 ‘무아(無我)’이다. 마음이라는 것도 인연 따라 만들어진 인식이기 때문이다. 결국 욕망이나 번뇌도 내 속에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자성은 본래 청정하다
그렇다면 욕망은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일까? 인식은 감각기관과 객관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하는 것이므로 나와 무관하게 밖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루이뷔통 백을 보고 욕망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런 욕망도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욕망이 밖에 있는 것이라면 욕망의 대상을 보는 모든 사람은 동일한 욕망을 일으켜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욕망이나 번뇌가 본래부터 내 속에 내재하지 않으며 그 본성이 깨끗한 것을 ‘청정(淸淨)’이라고 한다. 그리고 욕망이나 번뇌는 감각기관이 객관대상을 만나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이를 ‘수번뇌(隨煩惱)’라고 한다. 대상이라는 조건에 따라 발생한 번뇌라는 뜻이다.
『남전대장경』 ‘증지부’에는 “비구들아, 이 마음은 극히 청정하고 빛난다. 그러나 이것은 객(客)의 수번뇌에 물들었다.”라고 설해져 있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맑고 깨끗한데 밖에서 들어온 번뇌에 오염되어 맑고 깨끗한 성품이 빛을 잃었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은 유리알처럼 투명한데 먹구름에 가려 태양의 빛이 보이지 않는 이치와 같다는 것이다.
중생의 성품도 본래 맑고 깨끗하지만 외부 경계를 만나 촉발된 갖가지 수번뇌 때문에 자성이 드러나지 못할 뿐이다. 이렇게 외부 경계를 만나서 일어나는 번뇌를 달리 객진번뇌라고 한다. ‘밖에서 불어온 먼지[客塵]’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성을 가리고 있는 객진번뇌만 제거하면 본래 청정한 자성을 회복하고,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전대장경』 ‘상응부’에는 “중생의 마음이 탐욕・진에・우치에 염착(染着)되었다.”고 했다. 이 말은 중생의 마음이 객진번뇌에 물들어서 욕망하고 번뇌로 들끓고 있을 뿐 그 본성은 맑고 깨끗함을 말한다. 그래서 『유마경』에서도 “법(法)에는 중생이 없다. 중생의 때를 벗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객진번뇌에 물든 오염만 씻어버리면 중생의 마음은 본래 맑고 깨끗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기관은 감각의 대상을 만나기만 하면 욕망하고 번뇌에 물드는 것일까? 위의 경전에서는 중생의 마음이 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오염되었다고 했다. 육근은 대상을 보기만 하면 무조건 오염되고 번뇌로 물드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번뇌로 오염되지만 수행이 된 사람은 초연하다. 마음에 탐진치라는 삼독심이 작용하면 경계에 물들고, 번뇌가 생겨나지만 삼독심이 없으면 물들지 않는다. 물론 삼독심도 본래부터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경계에 오염된 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에 삼독의 먹구름이 생겨서 본성을 가리지 않도록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상과 같이 중생의 마음이 본래 깨끗하다는 ‘자성청정(自性淸淨)’은 선의 핵심 사상에 속한다. 그래서 이런 개념은 선종에 의해 확립된 후대 사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남전대장경』과 『잡아함』 등의 내용을 근거로 자성청정이라는 가르침은 초기불교에서부터 확립된 것임을 논증한다. 이는 선종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참선은 덜고 또 덜어내는 수행
그렇다면 객진번뇌로 오염된 그 마음의 정체란 무엇일까? 성철 스님은 “심의식은 결국 수번뇌이고 객진번뇌”라고 했다. 이 말은 객진번뇌에 의해 오염된 번뇌의 뿌리는 바로 심의식이라는 것이다. ‘심의식(心意識)’이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인식의 근원적 뿌리가 되는 제8아뢰야식을 말한다. 아뢰야식은 오랜 세월동안 갖가지 경계에 염착되어 형성된 의식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생의 자성을 가리고 있는 그와 같은 근본무명을 제거해야만 맑고 깨끗한 자성이 드러나고 동시에 중도를 깨닫고, 연기를 바로 알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객진번뇌로 오염된 심의식을 정화하는가이다. 객진번뇌가 중생의 본성을 가로 막아서 번뇌가 생겨난다면 수행은 본성을 오염시키는 먹구름을 씻어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선 수행은 무엇을 익히고 마음에 지식이라는 분별의식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오염시킨 것은 밖에서 들어온 것이므로 내 속에 쌓여 있는 번뇌를 비워내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도를 닦으려면 날마다 덜고, 학문을 하려면 날마다 쌓아야 한다[爲道日損 爲學日益].”는 노자의 말씀을 인용한다. 도를 닦으려면 자성을 가리고 있는 온갖 오염된 인식을 덜고 또 덜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자를 익히고 논리에 매달려 요모조모 이해를 따지고, 이것저것 구별하는 분별만 익히면 번뇌는 깊어지고 오염은 심화된다. 따라서 바른 깨달음을 얻고 성불하고자 한다면 객진번뇌를 덜어내는 수행을 해야 한다. “덜고 또 덜어서 아무 것도 덜 것이 없는 그것까지 완전히 덜어버리면 자성청정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심의식의 오염을 씻어내는 가장 좋은 수행일까? 경전을 열심히 읽고 부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것일까? 아니면 다라니를 외우고 염불을 열심히 하는 것일까? 성철 스님은 이 대목에서 수행에 비록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참선하는 것이 최고”라고 강조했다.
성불을 추구하고, 생사해탈을 추구한다면 참선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근본은 깨침을 얻는 데 있고, 깨치려면 참선이 근본이라는 것이다. 결국 불자의 공부는 배우고 익히며 마음에 정보를 쌓아가는 공부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을 가로막고 있는 온갖 오염된 언어와 왜곡된 인식의 먹구름을 씻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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