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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주인공의 삶]
책 정리를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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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5 년 7 월 [통권 제2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6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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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더위에 습격을 당했는지 컨디션이 영 좋지 않다. 누워있자니 시선이 닿는 곳에 답답한 책꽂이가 눈에 들어온다. 제발 숨 좀 쉬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젠 필요 없어진, 앞으로도 백 년 동안 볼일 없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책들만이 아니다. 몸을 돌려 눕자 이번에는 방바닥을 점령한 물건들, 물건들, 물건들이 눈을 습격한다. 끊을 것을 끊지 못해 재앙을 초래한다는 옛 선사들의 말씀이 이런 경우인가 보다. 오늘은 기필코 치우리라, 구국의 결단을 하고 일어났다.

 

늘어놓다가, 늘어놓은 물건들 위로 탑을 쌓아올리는 신공을 발휘하다가, 발 디딜 틈이 없어지면 몸을 ㄹ자로 구겨 눕는 필살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놀라운 적응력이다. 때때로 치우면 될 것을, 몇 년에 한 번씩 대청소를 하다 보니 치우고 나면 언제나 몸살이 난다. 다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해 세운 원칙이 하나 있다. 기억할 만한 사연이 있어 간직했던 물건, 혹은 비싼 것부터 하나 버리고 시작한다. 애지중지하던 것도 버렸는데 그 밖의 것은 이것쯤이야 하면서 미련 없이 버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한나절 만에 공간이 숨을 쉬고 나도 숨통이 트인다. 그러나 치우고 나면 그 때뿐, 어느새 다시 쌓아놓기를 반복하는 고질병이 도진다.

 


 

 

잠시만 생각해 봐도 이 물건들이 다 필요해서 지니고 사는 게 아니다. 단지 버리지 못할 뿐이다. 버리지 못해 쌓아두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TV에서 본 적이 있다. 주변 정리도 못하고 생활 관리도 안 되는 사람들이고, 그중에는 우울증을 겪는 사례도 종종 있다. 도우미 팀이 출동하여 번개같이 정리해주는 것을 보고 나도 방송국에 사연 한 번 보내볼까 했었다. 도움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어느 날 김치 갖다 주러 온 동네 친구가 김치를 놓고 사라지더니 금새 50리터짜리 쓰레기 봉지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방 꼴을 보다 못해 나선 것이다. 한 시간도 못 되어 네 활개를 펴고 누울 공간이 생기는 신통을 체험을 했다.

 

그 친구는 아침에 치워놓고 출근했다가 퇴근하자마자 식구들이 어질러 놓은 것을 쫒아 다니면서 치우고, 저녁 먹고 밥 먹은 자리 닦고, 취침 전에 걸레질로 하루를 마감한다. 전화 걸어서 “뭐해?” 하고 물으면 “치워!” 하는 대답이 가장 많다. 『Zen Theraphy』라는 책에서 읽은 바, ‘overly ordered disorder’라는 전형적인 강박증이다. 우울증 옆에 강박증 친구가 있으면 도움이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 뒤에 대대적으로 짐을 정리할 일이 있었다. 집을 새로 짓기 위해 몇 달 동안 살 집으로 이사를 갈 때였다. 몇 십 년을 쓰던 물건들이 집 곳곳에서 나왔다. 좁은 데로 가려니 짐을 대폭 줄여야 해서 2주 정도 매일같이 버렸다. 누구 물건을 얼마나 버리느냐를 놓고 엄마와 대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엄마의 옷과 내 책이 싸움의 빌미가 되었다.

 

엄마의 옷은 어마어마했다. ‘살 빼서 입어야지’ 할 때는 이미 지난 나이였는데도 버리지 못했다. 아마 ‘옛날엔 내가 저것도 입었었는데…’ 하려는 용도였을 것이다. 옷 한 벌마다 각각의 의미와 입고 나갔던 날의 역사가 서려 있을 것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공격했다. “엄마, 그 옷 버려! 한 20년은 안 입었겠네. 이 집에 엄마 혼자 살아?” “그러는 너는, 거들떠도 안 보는 책들이 쌨잖아. 논어, 맹자 다 읽었다는 게 엄마한테 하는 말본새가 그게 뭐니? 공부는 해서 뭐해!” 이런 말들이 오갔다.

 

듣고 보니 찔렸다. 지적인 욕구도 아닌 단지 구매욕 때문에, 아니면 남들 앞에서 읽은 척 하려고 사놓고 감당이 안 되서 책꽂이만 차지하고 있던 책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옷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와 책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둘이 아니었다. 취향과 허영에서 출발하여 ‘나에게 속한 물건’이라는 아집의 연장선상에 물건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죽을 때는 몸뚱이 하나 가져가지 못하고 평생의 업만 따라 간다는 가르침을 여러 번 들었는데, 쓸데없이 쌓인 책들이 내 업의 일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살지 말라고, 오래 전에 비구가 지닐 수 있는 물건을 열여덟 가지로 제한해 주셨나 보다. 옷 세벌ㆍ발우ㆍ석장ㆍ불상ㆍ보살상ㆍ경ㆍ율ㆍ부싯돌ㆍ향로ㆍ승상ㆍ좌구ㆍ물 거르는 주머니ㆍ병ㆍ수건ㆍ양치질 도구ㆍ비누ㆍ칼ㆍ족집게. 육체적 생존과 정신적 혜명을 위해 허락된 최소한의 물건이다. 이것으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게 무소유에 가깝다. 이만큼만 쓰다가 죽고 나면 그마저 후인들이 물려 쓰고, 남은 것은 병자의 약값이나 불사 비용에 충당했다고 한다.

 

그중에 대표 격인 옷과 발우는 전법의 상징이 되어 선사들의 전기에 ‘누구누구에게 의발을 전해 받았다’는 표현으로 남았다. 죽고 나서 남는 물건이 진짜 이것밖에 없다면 어딜 가나 주인공으로 살았을 것이다. 사람이 물건의 노예가 된 세상, 한편에서는 ‘자발적 가난’을 새로운 담론인양 캐치프레이즈로 들고 나오는 이즈음, 의발에 담긴 ‘오래된 미래’의 정신을 상기해볼 만하다.

 

시작한 대청소는 마무리도 못했는데 책 몇 박스 정리했다고 안 쓰던 근육이 놀랐는지 자판을 두드리는 팔이 덜덜 떨린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이젠 몸살이 날 예정이다. 책꽂이가 좀 헐거워지긴 했으나 오늘도 생각만큼 버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한 권 한 권 뽑아들고는 엄정한 심사를 거쳐 박스에 넣으며 잘 가라고 장례를 치러 주느라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하필이면 원고 마감일에 이 피곤한 작업을 시작했을까 후회가 된다.

 

이게 다 메르스 때문이다. 어느 날 메르스에 걸려서 몰록 죽더라도, 최소한 어질러진 방 때문에 쪽팔리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누웠던 몸을 일으켜 치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워지는 날씨에 우리 모두 ‘중동발 독감’에 걸리지 않기를 불보살님께 빌며, 이번에 죄를 뒤집어쓴 동물원 낙타의 성불도 함께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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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경총서>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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