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나무는 톱을 알고 톱은 나무를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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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5 년 7 월 [통권 제2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19회 / 댓글0건본문
삼청동 두가헌을 거닐다
지난 5월 16일 열린 무차(無遮) 대법회 후 광화문 법련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덕분에 아침 일찍 산책삼아 삼청동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바로 이어질 듯한 옆집인 두가헌(斗佳軒) 마당에서 서성거렸다. 저녁 레스토랑의 화려한 조명이 사라진, 화장을 지운 맨얼굴의 집을 주변눈치를 보지 않고서 샅샅이 살피는 기회를 가졌다. 큰 은행나무를 가운데 두고 전통한옥과 1910년대 붉은 벽돌과 흰 화강암을 사용하여 지은 러시아식 근대건물(현재 갤러리로 사용)이라는 이질적인 두 집이 잘 어우러진 ‘두(two)가(家)’였고 아름다운 집이라는 본래의 의미인 가헌(佳軒)이라는 명칭에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이 집의 본래주인이었다는 엄비(嚴妃, 1854~1911, 영친왕 생모)는 양정, 진명, 숙명학교를 세운 교육 선각자였다. 전혀 다른 건축 재료인 붉은 벽돌집을 만들면서 기존 한옥의 존재감과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높이와 크기를 조정한 건축주로서의 탁월한 안목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경복궁을 무대로 벌어지는 구한말 열강세력들의 잦은 물리적 충돌에 왕족의 신변마저 보호할 수 없는 허약한 군사력 앞에 스스로 자기안전을 위해 벽돌집을 필요로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빈속의 허한 가슴이 더 싸해졌다.
한일 퓨전건물을 만나다
화강암 붉은 벽돌집과 한옥의 대비라는 창조적 아름다움은 많은 건축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퓨전건축이 주는 조화로움은 뭐든지 종합하기를 좋아하는 한민족의 성정과도 맞아떨어졌다. 대구 삼덕동의 ‘한입별당’도 그랬다. 2007년 경주에 한옥호텔 ‘라궁’을 건축한 조정구 건축가가 이 집을 지을 때 가장 염두에 두고 참고로 한 것은 두가헌이었다고 한다. 병원은 한옥이고 부속건물은 일본식인 퓨전건물이다. 구입 당시 낡은 한옥과 적산가옥은 보존상태가 너무 나빠 리노베이션이 불가하다는 판정을 받고서 할 수 없이 기존 이미지만 그대로 차용하여 다시 지었다고 한다.
환자들이 대기하며 지루함을 덜 수 있도록 정갈하게 꾸며놓은 중정(中庭)을 바라보며 읽으라고 비치한 것은 인기 만화책인 『미생(未生)』이었다. 그리고 마당을 거닐고 싶은 이들을 위해 까만 고무신과 흰 고무신 몇 켤레가 댓돌에 놓여 있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안주인의 활동공간인 한입별당으로 이동하다
벽으로 처리한 난간을 따라 이층계단 끝나는 부분의 하얀 벽 위로 푸른 정사각형 바탕에 한글로 된 ‘한입별당’이란 네 글자가 두 자씩 또박또박 박혀있다. 문을 열자 만만찮은 면적의 2층을 통째로 이용한 큰 주방이 있었다. 사각형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실내 인테리어와 창문너머 보이는 동 기와로 만든 눈썹 처마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환자를 진료하다보니 잘못된 식생활 습관이 질병의 주요 원인임을 절감하고 주변에 이 사실을 알릴 겸 건강한 먹거리 홍보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별당미씨’인 안주인은 말할 것도 없고 외과의사인 바깥양반도 ‘요리하는 남자’를 겸하고 있었다. 정말 식약동원(食藥同源, 음식이 곧 약이라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부부는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한입’이라는 다소 직설적인 집 이름을 사용한 것에 대해 누구라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현판을 보기 전에는 ‘한잎’이려니 했다. 그런데 의외로 ‘한입’이었다. 신랑은 안주인이 잠시 나간 사이를 이용하여 ‘한입은 집사람 별명’이라고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설명한다.
서울 삼청동 두가헌
아이들과 함께 외식을 나가면 부인은 음식 값을 아낄 심산인지 아니면 다이어트를 하려는지 자기 것은 빼고 주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오면 꼭 “한입만!”이라고 하면서 애들 것까지 돌아가면 한입씩 먹는 바람에 주문한 다른 가족의 한 그릇보다도 더 많이 먹는 것을 보고는 붙여준 별명이라고 했다. 안주인은 이 당호사용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가족회의 구성원의 다수결에 밀려 그 영광스런(?) 별명을 두고두고 떠안고 있어야만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빛나는 존재가 되다.
한러 퓨전건물인 두가헌과 마찬가지로 한일 퓨전건물인 ‘한입별당’은 서로가 서로를 빛내주는 조화로움이 돋보이는 공간미를 자랑한다. 건물 상호간의 인연(因緣)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바깥양반과 안주인이 조화롭게 역할분담을 하면서도 또 같이 식약(食藥)을 협업하는 한입별당 공간 역시 부부가 함께 인연 관계를 연출하는 공간이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했다. 지아비가 노래하면 지어미는 추임새를 잘 넣어야 한다. 그것이 서로의 관계성을 전제로 한 우리들의 삶인 까닭이다.
백아(伯牙)가 켜는 거문고 소리를 종자기(鍾子期)는 너무 잘 알아들었다. 지음(知音)이란 유명한 말의 근거가 되었다. 벗이 죽자 그는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이란 말은 관계성에서 벗어난 존재의 무의미성을 드러낸 대표적인 고사성어가 되었다.
톱과 나무가 인연관계로 만나다
부나야사(11조) 존자와 마명(12조) 보살은 『보림전』 권3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너(마명)는 나무의 이치(木義)로써 대답했고, 나(부나야사)는 톱의 이치(鋸義)로 말했구나.(此是鋸義. 彼是木義)”
톱은 나무 자르는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존재 의미를 가진다. 나무는 톱의 작용을 받아들일 때 제대로 된 쓰임새를 가진다. 철로 만든 톱은 강하고 나무원목은 약하다. 그렇다고 해서 쇠톱이 닳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몇 번 사용 후에는 반드시 날을 다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강약은 있지만 서로 닳아야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스승과 제자는 톱과 나무처럼 서로 탁마해줄 때 불교의 진리는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이 문답 역시 두 수행자가 서로 관계성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혹여 문답 속에 더 깊은 뜻이 있다면 화두삼아 두고두고 더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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