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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행위에 대한 기록과 윤회의 주체- 『해심밀경』의 유식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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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5 년 11 월 [통권 제3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2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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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불교에서 보는 중생의 범주는 단지 인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이라는 육도의 세계에 걸쳐 있는 다양한 생류(生類)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하나의 개체는 그 개체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는 것이 업보윤회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설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풀어야할 숙제도 많다. 정말로 삶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금생에서 지은 업의 씨앗[業因]에 따라 다음 생에 그 과보(果報)를 받는 것이며, 내가 한 행동은 누가 어디에 기록하고 증언하는 것이며,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라는 것들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나의 정체성을 확보해 주는 것은 ‘의식(意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은 이후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윤회하는 ‘나’의 자기동일성은 무엇이 유지해 주는가가 업보윤회설의 관건인 셈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인식은 18계설로 요약된다. 즉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이 여섯 가지 객관대상[六境]을 보면서 만들어지는 여섯 가지 인식[六識]이 우리가 말하는 의식이다. 하지만 이렇게 성립된 의식은 어디까지나 생존의 영역에서만 유효하다. 그 의식이 작동하는 개체가 죽으면 의식도 함께 사라지고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은 이생에서 지은 업에 대해 기억할 수도 없고, 업에 대한 정보가 없음으로 자신의 업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일도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교리적으로 치밀하게 설명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 중에 하나인 유식학(唯識學)이다.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6식 밑에 두 개의 식(識)이 더 있다고 보았다. 바로 제7식과 제8식이 그것이다. 유식학의 근본경전인 『해심밀경』에 따르면 삶과 죽음을 거듭하는 중생의 근원적 자아이자 윤회하는 존재의 자기동일성을 지켜주는 뿌리는 제8아뢰야식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개체의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음 생으로 이어지며 나의 행위정보를 전달하는 윤회의 주체라는 것이다.

 

씨앗처럼 기록을 저장하는 식

 

윤회하는 개체의 근원적 뿌리가 되고, 자기 존재의 동일성을 유지시켜주는 아뢰야식은 매우 복잡한 개념이기 때문에 유식학에서도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 각각의 이름들은 아뢰야식이 갖고 있는 특징들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이름은 ‘종자식(種子識)’이다. 아뢰야식은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를 저장하기 때문에 식물의 씨앗에 비유한 이름이다. 종자식의 기본적 특징 중에 하나가 씨앗처럼 유정들이 하는 행위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달리 ‘장식(藏識)’이라고 부른다. 모든 정보를 낱낱이 저장하고 있는 ‘창고와 같은 식’이기 때문이다.

 


 

 

『해심밀경』에 따르면 “곡식의 종자가 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종의 근본식이 종자식이 되어서 그로부터 모든 생사가 벌어진다.”고 설하고 있다. 식물이 다 자라고 나면 비록 그 식물이 동물에게 먹히거나 비바람에 썩어져도 한 톨의 씨앗 속에 다시 자라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그와 같이 사람도 삶이 끝날 때가 되면 몸은 쇠락하여 사라지고 기억도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삶의 기록은 종자식 속에 저장되어 죽음 이후에도 고스란히 남게 되고, 그것이 육도를 윤회하는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씨앗이 제대로 싹을 틔우고 큰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한 개체의 유전정보가 빠짐없이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 유전정보에 한 가지라도 문제가 생기면 기형아가 탄생하거나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은 유전과학이 밝혀주고 있다. 따라서 아뢰야식이 윤회하는 존재의 씨앗과 같은 것이라면 그 씨앗 속에는 그 개체가 어떤 형태를 띠고,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에 대한 정보를 충실하게 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종자식의 특징 중에 하나는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인데 이것을 경전에서는 ‘집수(執受)’라고 표현했다. 집수라는 기능에 의해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 행위들은 빠짐없이 수집되어 종자식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해심밀경』에서는 이와 같은 아뢰야식의 정보 수집기능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즉, “일체 종자의 심식(種子心識)이 성숙하여 반복하며 화합해서 더욱 자라나 커지니 두 가지 집수(執受)에 의지한다. 첫째는 유색(有色)의 모든 근과 의지하는 것에 대한 집수이고, 둘째는 상명(相名) 분별의 언설과 희론의 습기에 대한 집수이다.” 

 

종자식은 두 가지 방식에 의지하여 유정의 행위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물질적 형태가 있는 것[有色]으로 눈・귀・코・혀・몸・의식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그것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 경험과 관련된 정보들을 수집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양과 이름을 분별하여 수집하는 것이다. 나와 남을 분별하는 언어, 갖가지 관념과 이론 등의 주관적 활동에 의지하여 수집되는 정보들이다. 이렇게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채널을 통해 생명 개체의 행위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수집되어 종자식에 저장된다. 그렇게 기록을 저장한 식(識)은 마치 컴퓨터의 전원을 꺼도 하드 디스크에 작업 내용이 저장되는 것처럼 그 개체가 죽은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음의 생명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빈틈없이 수집되고 사라지지 않는 기록

 

아뢰야식은 인간이 하는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종자식이라고 하지만 또 다른 이름은 아타나식(阿陀那識)이다. ‘아다나(adāna)’라는 말은 ‘잡아서 보존한다’ 뜻을 담고 있어서 한문으로는 ‘집지(執持)’로 번역된다. 『해심밀경』에 따르면 “아타나식이 몸을 따라다니며 집지(隨逐執持)한다.”고 했다. 집지식은 일생동안 자신이 깃들어 있는 육신을 따라다니면서 그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빠짐없이 수집하여 잃어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선업과 악업의 종자 등 모든 행위와 기억들은 집지의 특성 때문에 온전히 보전된다. 이렇게 보존된 정보는 새로운 개체를 받아 어떤 환경을 만나게 되면 싹이 돋아나듯 힘을 발휘한다. 

 

항상 몸을 따라다니며 수집된 정보들의 창고인 아뢰야식은 한 번 기록되면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그와 같은 특징을 나타낸 이름이 바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명칭이다. 산스크리트어로 ‘ālaya’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한문으로는 ‘무몰(無沒)’이라고 번역한다. 우리가 몸과 말과 마음으로 경험한 갖가지 일이나 착한 업이나 악한 업은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기억, 즉 육식에서 잊어버린 것일 뿐 무몰식에 저장된 정보는 지워지지도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해심밀경』에서는 “이 식이 몸에서 섭수하고 간직(攝受藏隱)하여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같이 한다.”고 했다. 무몰식이 항상 우리들의 몸과 함께 하면서 삼업으로 짓는 모든 정보를 기록하여 창고에 물건을 쌓듯이 차곡차곡 저장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저장된 정보가 발현되면서 편안한 삶을 만들기도 하고, 고통과 위기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아뢰야식은 달리 ‘심(心, citta)’이라고도 한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마음이란 금생에 태어나서 지각하고 경험해서 성립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유식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은 아득한 과거로부터 훈습(熏習)되어 온 것이다. 결국 시공을 초월하여 아득한 역사와 공간적 경험을 총체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것이 마음이 된다. 

 

『해심밀경』에서는 심(心)에 대해 “이 식이 물질・소리・향기・맛・감촉 등을 쌓고 생장하게 하기 때문(積集滋長故)이다.”고 했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여러 가지 식은 저장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언어와 행위로 나타나고, 그 사람의 습성으로 드러난다. 한 사람의 개성과 성격을 심성(心性)이라고 부르는데 유식학에 따르면 그 심성조차 아득한 삶을 거듭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운명과 미래를 결정짓는 것은 신도 아니고 어떤 초월적 힘도 아니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지을 정보를 쓰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삼업(三業)이다. 자신이 하는 행위를 지켜보고 하나도 빠뜨림 없이 기록하는 것도 자기 자신에게 내재된 8식이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사람들의 걱정 중에 하나가 한 번 기록된 자신에 대한 정보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단 디지털화된 정보만 지워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유식학에서는 내가 짓는 모든 행위정보도 낱낱이 다 기록되며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인간의 삶과 미래는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윤리는 유식설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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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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