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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
명추회요를 목판에 새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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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  2015 년 12 월 [통권 제32호]  /     /  작성일20-08-19 14:39  /   조회6,00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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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는 『종경록』 100권 중 7권을 제외한 나머지 93권의 내용을 골고루 인용하고 있다. 이 점은 이번에 출판된 책의 차례를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차례에는 『종경록』의 권수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10판, 11판 등의 ‘판(板)’이 나오는데, ‘판’은 『명추회요』를 만든 이들이 인용한 『종경록』목판의 순서를 가리킨다. 요즘 같으면 종이로 된 책뿐만 아니라 인터넷으로 전자책을 볼 수도 있지만, 천 년 전에는 붓으로 종이에 직접 글을 쓰거나 아니면 이를 목판에 새겨 전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회당조심 스님과 영원유청 스님이 『명추회요』를 간행하기 위해 보았던 『종경록』의 목판본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오늘날 확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필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경록』의 판본인 고려대장경본과 명대 이후 중국에서 나온 판본을 가지고 『명추회요』와 대조해 보았는데, 결과적으로는 구성이 일치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접하는 『명추회요』는 고려대장경에 수록되기 이전의 『종경록』 목판본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경록』의 목판본과 관련된 아주 귀중한 단서 하나가 『명추회요』의 「발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지난 호에서도 말했던 영원유청 스님의 글(774쪽)이다. 유청 스님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명추회요』를 만들자, 배우는 사람들이 이를 다투어 세상에 전하였다. 그런데 당시 책을 전달하는 경로는 주로 필사(筆寫), 곧 ‘베껴 쓰는 것’이었으므로, 그 과정에서 오자(誤字)가 많아졌다고 한다. 이는 한문 서적의 필사과정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로써, 가령 노나라 노(魯)를 적어야 하는데 고기 어(魚)로 잘못 쓰거나, 어조사 언(焉)을 써야하는데 새 조(鳥)로 잘못 베끼는 것과 같은 경우다. 글자가 달라지면 내용이 엉뚱하게 바뀌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처럼 필사 과정에서 잘못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게송을 잘못 전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불조통기(佛祖統紀)』를 보면 이와 관련된 아난 존자의 얘기가 나온다. 아난 존자가 죽림정사(竹林精舍)에 이르렀을 때, 어떤 비구가 게송을 외는 것을 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이 백 년을 살면서 수로학(水老鶴)을 보지 못하면, 

이는 하루를 살면서 그것을 보는 것만 못하네.

若人生百歲 不見水老鶴

不如生一日 時得覩見之

 

이 게송을 듣고 깜짝 놀란 아난 존자는 자신이 부처님에게 들은 게송을 다시 일러 주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백 년을 살면서 생멸법(生滅法)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는 하루를 살면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만 못하네.

若人生百歲 不解生滅法

不如生一日 而得解了之

 

이는 부처님께서 설한 생멸법(生滅法)을 수로학(水老鶴)으로 잘못 전한 과실을 전하는 고사이다.

 

아무튼 『명추회요』가 나온 다음에 이를 베껴 쓰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자, 유청 스님은 아예 이를 목판에 새겨서 배포할 마음을 먹게 된다. 목판에 새기면 유통 과정에서 글자가 바뀌는 실수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명추회요』의 제작을 위해 목판으로 인쇄된 『종경록』 두 가지를 구하였다. 스님은 이를 경본(京本)과 제본(淛本: 浙江省本)이라고 불렀는데, 북송(北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나온 『종경록』의 목판인쇄본을 ‘경본’으로 불렀고, 연수 스님이 활동했던 항주가 있던 절강성(浙江省)에서 나온 것을 ‘제본’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유청 스님은 이 두 가지 목판인쇄본을 바탕으로 서너 명의 납자들과 함께 글자를 반복해서 대조하여 『명추회요』를 목판에 새겼다고 한다.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 동안 원본에서 오자가 발견되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는데, 이 점만 보더라도 유청 스님이 이 책에 기울인 정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종경록』의 목판본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청 스님이 『명추회요』를 목판으로 간행한 때가 1096년이므로, 스님이 보았던 『종경록』의 두 가지 목판본은 이보다 전에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종경록』의 서문을 쓴 양걸(楊傑)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양걸은 북송 시기의 유명한 관리이자 문인이며 재가불자이다. 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종경록』이 처음 나오자 오월국(吳越國)의 충의왕(忠懿王)이 직접 서문을 써서 교장(敎藏)에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즉 세상에 널리 유통시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후 송이 중국을 통일한 뒤 신종(神宗)의 시대에 이르러 황제의 동생인 단헌왕(端獻王)이 원풍(元豐) 연간(1078~1085)에 『종경록』을 목판에 새겼지만, 유명한 사찰에만 나눠주었으므로 정작 필요한 사람은 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이때 새겨진 것이 바로 『종경록』의 경본(京本)으로 생각되는데, 양걸은 이 목판인쇄본을 먼저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몇 년 후 양걸은 연수 스님이 활동했던 항주 지역에서 그곳 스님들이 새롭게 교정해서 목판에 새긴 『종경록』을 보게 되었는데, 이 판본이 앞의 것보다 훨씬 정밀하고 상세하였다고 한다. 양걸이 말하는 이 항주 지역의 새로운 판본이 앞서 『명추회요』에 나온 제본(淛本)으로 보인다.

 

이처럼 『종경록』은 연수 스님의 입적 후 100여 년이 지난 뒤 두 차례나 목판에 새겨져서 중국 각지로 전해졌고, 『명추회요』와 같은 촬요본도 나오게 되었다. 『종경록』은 당시 매우 귀한 책이었으므로 목판에 새겨져 널리 유통되었지만, 정작 책이 많이 보급되자 이를 제대로 보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연수 스님을 극히 존경하던 혜홍 각범(慧洪覺範, 1071~1128) 스님은 『임간록(林間錄) 하』(선림 고경총서, 166쪽)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천하의 명산대찰에서 그 책(=『종경록』)이 없는 곳이 없는 데에도 학인들은 죽을 때까지 한차례도 펴보지 않은 채, 오로지 배불리 먹고 실컷 잠자며 근거 없는 말로 유희를 삼고 있으니, 그들을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는 자라 하겠는가. 부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라 하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책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어떤 책이 좋은 것인지를 분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가 군대를 전역한 후 오랜만에 대학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가 기억난다. 큰 책장을 가득 채운 서고를 보면서 그 많은 책의 양에 압도당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도서관의 책을 다 보려고 한다면 평생 보아도 극히 일부분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때 필자의 중심을 잡아준 게송이 하나 있다. 서산 대사께서 편집하신 『운수단가사(雲水壇歌詞)』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에게 한 권의 경(經)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된 것이 아니네

펼쳐보면 글자 하나 없지만, 항상 대광명을 비추고 있네.

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

 

이 게송을 떠올리고서 했던 생각은 다름이 아니라,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따라 필요한 책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도서관에 있는 많은 책들에 대해 더 이상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번에 한글로 번역된 『명추회요』는 360여 가지의 주제로 뽑아져 있다. 그러므로 평소 공부를 하다가 문득 궁금한 문제가 생길 경우, 이 책의 차례를 보면서 그에 맞는 항목이 있으면 찾아가서 읽는 방법을 한번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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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불교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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